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한양가(漢陽歌)

작품명
한양가(漢陽歌)
저자
한산거사(漢山居士)
장르
가사
작품소개
조선 헌종 때 한산거사가 지은 풍물 장편가사. <한양풍물가(漢陽風物歌)>, <한양태평가(漢陽太平歌)>라고도 한다. 1880년의 목판본을 비롯하여 필사된 이본(異本)이 많이 전한다. 분량은 3·4조와 4·4조가 반반씩 섞인 모두 1,528구의 장편가사이다. 조선 왕도인 한양성(漢陽城)의 연혁·풍속·문물·제도·도국(都局) 및 왕실에서 능(陵)에 나들이하는 광경 등을 노래하였다.
내용
현대어풀이(부분발췌) 천지 개벽하니 일월이 생겼구나 별들이 빛을 발하니 오행이 되었어라 초목과 곤충이 생겨날 때 인물이 번성하다. 오악이 솟아나고 큰 강물 넷이 광활히 흐르니 곤륜산의 한 맥이 동해로 돌아올 때 높고 낮은 산맥은 몇 만리이며 굽이는 몇 굽이인고 백두산 봉우리 일어나 함경도 넘어서서 강원도로 내달아서 경기도로 돌아들제 북극을 받쳤는 듯, 연꽃을 깎았는 듯, 도봉에 머물러서 층층이 오는 기세 뭇 신선들이 모여있는 듯, 벼슬아치들의 홀처럼 벌려있는데 삼각산의 봉우리가 일어날 때 천년을 경영할 것인가 만년을 경영할 것인가 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산세는 기이하고 북악이 한양의 머리가 되고 종남산이 맞은편 산이 되었구나 좌청룡은 타락산이요 우백호는 안현이라 <중략> 하늘이 내신 왕도(王都) 해동에 으뜸이라 국호는 조선이요 도읍은 한양이라 단군의 구족(舊族)이요 기자의 유풍이라 의관도 화려하고 문물도 거룩하다 <중략> 동편은 종묘되고 서편은 사직이라 경복궁 창덕궁과 창경궁 큰 전각이 반공에 솟았으니 만호천문(萬戶天門) 깊을세라 인정전 근정전은 백성을 다스리는 정전(正殿)이요 희정당 대조전은 내전(內殿)의 처소 되었구나 <중략> 남편은 숭례문과 동편은 흥인문과 서편은 소의문과 북편은 창의문이 네 관문이 되었으니 수문장 호군부장 수문군을 호령하며 칼을 꽂고 명을 내린다. <중략> 각색 어물 벌여있다 북어와 말린 청어와 꼴뚜기며 민어 석어 통대구며 광어 문어 가오리며 전복 해삼 가자미며 곤포 미역 다시마며 파래 해의 우뭇가사리며 패물 가게와 종로 마루의 저자에 금은과 보석 패물이 놓였구나 <하략> - ‘한양가’, 이석래 교주, <풍속가사집>, 신구문화사, 1974
구성
이 가사는 “천지개벽하니 / 일월이 생겼구나.”로 시작하여 “우리나라 우리임금 / 본지백세 무강휴를 / 여천지로 해로하게 / 비나이다 비나이다.”로 끝맺고 있다. 중요한 내용을 문단별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제1문단은 한양의 지세와 도국(都局)을 노래하였고, 제2문단은 궁전 보탑(寶榻: 옥좌), 제3문단은 궁방(宮房)·내시(內侍)·나인(內人), 제4문단은 승정원(承政院)·의정부(議政府), 제5문단은 육조관아(六曹官衙), 제6문단은 조마거둥(調馬擧動: 거둥의 절차대로 말을 연습시키던 일)과 여러 관서(官署), 제7문단은 선혜청(宣惠廳)과 여러 관서, 제8문단은 성첩(城堞: 성 위에 낮게 쌓은 담)과 백각육의전(白各六矣廛), 제9문단은 마루저자·광통교와 구리게 전방(廛方), 제10문단은 유희와 유희처, 제11문단은 승전노름과 복식(服飾) 및 기생점고(妓生點考)와 가무(歌舞), 제12문단은 능행(陵行)하는 광경, 제13문단은 과거 시험장의 풍경(風景)과 장원 급제자의 유가(遊街)하는 광경을 입심좋게 그려내어 독자들에게 조선시대 서울의 면모와 풍속까지를 자세히 알려주고, 마지막 문단에서는 한양을 찬탄하며 나라와 왕과 한양성이 무한히 태평하기를 축원하였다. 특히, 끝부분에서 “원생고려 한단말은 / 중원사람 말이로세 / 추 차언이 관지하면 / 제일강산 가지로다 / 산악수기 받아나니 / 충효인물 총총하다 / 범절이 이러하니 / 천하제국 제일이다.”라고 노래하여 구구절절 애국·애족의식을 드높이고 있다.
특징
이밖에 한산거사 <한양가>의 축약형으로 줄여서 향토 한양을 찬미한 이용기(李用基)의 <한양가>가 있는데, 분량부터가 2율각 1구로 170구의 짧은 작품이다. 그 내용은 한산거사의 <한양가>를 모두 10개 문단에 간결히 발췌, 요약한 듯하다. 내용이 다른, 같은 이름의 이본이 많으므로, 조선 도읍지 한양을 노래한 작품을 <향토한양가(鄕土漢陽歌)>라 하고,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를 노래한 작품을 <왕조한양가(王朝漢陽歌)>라고 분류한다. 한산거사가 지은 <한양가>는 <한양태평가(漢陽太平歌)> 또는 <한양풍물가(漢陽風物歌)>라고 하는 이본들도 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이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궁체(宮體) 반초(半草) 목판본으로 ‘세경진국추석동신간’이라는 간기와 함께 본문 이외에 <신증동요>만을 책 끝에 싣고 있는 국립중앙도서관본 계통의 것이다. 그 다음은 간기는 같지만 책 끝에 <신증동요> 외에 <한양가사>와 <갑술경가>가 부록된 목판본이다. 또 지은이와 지어진 연대는, 목판본의 <한양가> 본문 끝에 ‘세재갑진계춘 한산거사저’라고 기록된 연기(年記)에 따라 ‘1844년(헌종 10), 한산거사’임을 알 수 있다. 작자의 본명은 알 길이 없고, ‘한산’을 작자의 호로 보아, <한양가>의 주해본을 펴낸 송신용(宋申用)은 ‘한산(漢山)’이라 쓰고, 이병기(李秉岐)는 ‘한산(寒山)’이라고 달리 표기하였다. <한양가>는 조선의 관직·문물·제도 및 태평성대의 모습을 담았다. 단군과 기자 조선을 통해 우리 민족의 뿌리를 과시한 후 한양 풍물과 풍경을 예찬해 긍지에 찬 민족의식을 보여주었다. 시정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다 보니 사실적인 표현을 이룩했다. 조선 말기에 독특한 작품군을 이루고 있는 <한양가>는 시대상황과 당시인의 삶에 대한 밀접한 관계를 보이면서 분량 면에서도 3000천여 구 내외의 방대한 작품으로서, 격동했던 시기에 한평생을 보낸 작자가 어떻게 당대 세상을 보고 문학을 보았는가 하는 작자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한양가>는 그 내용적 특성 때문에 문학성에 대한 의혹 또한 쉽게 제기되는 작품이다. 그러나 문학이 의식의 한 형태이며 일체의 사유적 추상을 포함하면서도 구체적 체험이 기조를 이루는 예술형태임을 감안할 때 <한양가>야말로 당시인의 구체적 체험이며 진솔한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 훌륭한 문학작품이라 할 것이다.
관련멀티미디어(전체0건)
이미지 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