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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가(龍潭歌)

작품명
용담가(龍潭歌)
저자
최제우(崔濟愚)
장르
가사
작품소개
<용담가>는 수운 최제우가 1860년 득도한 바로 그 해에 지은 가사이다. 전체가 4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음보 1구로 모두 144구로 되어 있다. <용담가>는 조상 때부터 지켜내려왔고, 또 최제우 자신이 태어나서 자랐으며 득도하였던 경주 구미산 용담의 아름다움과 득도의 기쁨을 노래한 가사이다. 용담의 산의 형세와 물의 형세가 아름답고 절묘함을 노래하였으며, 신라 때 우리 문화를 찬미하면서 득도하게 된 내력과 그 기쁨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이 <용담가>에는 당시 일반 민중간의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풍수지리사상과 가계존중의 문벌충효의식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운율의 흐름과 변화 있는 언어의 구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최제우(崔濟愚, 1824~1864)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이다.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는데 수많은 책을 읽어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10세 때에는 이미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탄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집안의 형편이 매우 어려워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면서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익히고,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복술(卜術) 등의 잡술(雜術)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라 여기고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1855년(철종 6) 3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승려로부터 〈을묘천서(乙卯天書)〉를 얻고 난 후 더욱 수련에 힘써 1856년 양산군(梁山郡) 천성산(千聖山)의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 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가 죽어 47일 만에 기도를 중단했으며 다음해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 기도를 드렸다. 이후에도 울산 집에서 계속 공덕을 닦았으며, 1859년 고향인 경주로 돌아온 뒤에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을 계속했다. 이무렵 어리석은 세상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고쳤다. 1860년 4월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공중으로부터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종교체험을 했다. 이후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사람들에게 포교할 준비를 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고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서학(西學: 천주교)을 신봉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어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피신하였다. 피신중에 자신의 도가 서학으로 지목되는 것을 반성하고 표현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으며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고 노력해 <논학문(論學文)>을 써서 서학을 비판하고, <안심가(安心歌)>·<교훈가(敎訓歌)>·<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었다. 1862년 9월 이술(異術)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혐의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와 최제우의 가르침이 민속(民俗)을 해치지 않는다고 증언하면서 석방해줄 것을 청원하여 경주진영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무죄로 석방했다. 신도가 늘어나자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신도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해 7월 최시형(崔時亨)을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그해 제자 23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어 대구감영으로 이송, 심문받다가 3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효수형(梟首刑)에 처해졌다. 최제우의 글은 그가 처형당한 후 신도들에 의해 간행된 <동경대전(東經大全)>·<용담유사 (龍潭遺詞)>에 남아있다. <포덕문(布德文)>·<수덕문(修德文)>·<논학문>·<불연기연(不然基然)> 등 한문으로 씌어진 4개 교의문은 <동경대전>에 실려 있고, <용담가(龍潭歌)>·<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교훈가>·<도수사>·<안심가>·<도덕가> 등 8편의 한글 가사는 <용담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한문으로 된 4개의 교의문은 식자층을 대상으로 지었고, 8편의 가사는 한글로 구송(口誦)에 편하도록 쉽게 풀어썼다는 점에서 한문을 모르는 부녀자나 일반민중을 주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동학사상의 핵심은 ‘시천주(侍天主)’로서 한울님을 모시면 누구나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환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서양열강을 무사불성(無事不成)의 강대한 외래자로 보아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일본에 대해서는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왕조를 포함한 양반사회질서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변혁되어야 한다는 자연적 필연성을 주장하면서 지상천국이 건설된다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주장했다. 적서(嫡庶)나 반상(班常)의 구별없이 누구나 천주를 마음에 모시면 신분에 관계없이 군자가 된다고 하여 만민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인간관을 보여주었다.
현대어표기
국호는 조선이오 읍호는 경주로다 성호는 월성이오 수명은 문수로다 기자때 왕도로서 일천년 아닐런가 동도는 고국이오 한양은 신부로다 아동방 생긴후에 이런왕도 또있는가 수세도 좋거니와 산기도 좋을시고 금오는 남산이오 구미는 서산이라 봉황대 높은봉은 봉거대공 하여있고 첨성대 높은탑은 월성을 지켜있고 청옥적 황옥적은 자웅으로 지켜있고 일천년 신라국은 소리를 지켜내네 어화세상 사람들아 이런승지 구경하소 동읍삼산 볼작시면 신선없기 괴이하다 서읍주산 있었으니 추로지풍 없을소냐 어화세상 사람들아 고도강산 구경하소 인걸은 지령이라 명현달사 아니날까 하물며 구미산은 동도지 주산일세 곤륜산 일지맥은 중화로 버려있고 아동방 구미산은 소중화 생겼구나 어화세상 사람들아 나도또한 출세후에 고도강산 지켜내어 세세유전 아닐런가 기장하다 기장하다 구미산기 기장하다 거룩한 가암최씨 복덕산 아닐런가 구미산 생긴후에 우리선조 나셨구나 산음인가 수음인가 위국충신 기장하다 가련하다 가련하다 우리부친 가련하다 구미용담 좋은승지 도덕문장 닦아내어 산음수음 알지마는 입신양명 못하시고 구미산하 일정각을 용담이라 이름하고 산림처사 일포의로 후세에 전탄말가 가련하다 가련하다 이내가운 가련하다 나도또한 출세후로 득죄부모 아닐런가 불효불효 못면하니 적세원울 아닐런가 불우시지 남아로서 허송세월 하였구나 인간만사 행하다가 거연사십 되었더라 사십평생 이뿐인가 무가내라 할길없다 구미용담 찾아오니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산이로세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수는 의구하고 초목은 함정하니 불효한 이내마음 그아니 슬플소냐 오작은 날아들어 조롱을 하는듯고 송백은 울울하여 청절을 지켜내니 불효한 이내마음 비감회심 절로난다 가련하다 이내부친 여경인들 없을소냐 처자불러 효유하고 이러그러 지내나니 천은이 망극하여 경신사월 초오일에 글로어찌 기록하며 말로어찌 성언할까 만고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득도로다 기장하다 기장하다 이내운수 기장하다 한울님 하신말씀 개벽후 오만년에 네가또한 첨이로다 나도또한 개벽이후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만나 성공하니 나도성공 너도득의 너희집안 운수로다 이말씀 들은후에 심독희 자부로다 어화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 닥친줄을 너희어찌 알까보냐 기장하다 기장하다 이내운수 기장하다 구미산수 좋은승지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 구미산수 좋은풍경 물형으로 생겼다가 이내운수 맞혔도다 지지엽엽 좋은풍경 군자낙지 아닐런가 일천지하 명승지로 만학천봉 기암괴석 산마다 이러하며 억조창생 많은사람 사람마다 이러할까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 구미산수 좋은풍경 아무리 좋다해도 내아니면 이러하며 내아니면 이런산수 아동방 있을소냐 나도또한 신선이라 비상천 한다해도 이내선경 구미용담 다시보기 어렵도다 천만년 지내온들 아니잊자 맹세해도 무심한 구미용담 평지되기 애달하다
해설
<용담가>는 최제우가 지은 <용담유사(龍潭遺詞)>에 수록되어 있다. <용담유사>는 조선 후기에 최제우(崔濟愚)가 지은 포교가사집(布敎歌辭)으로서 한글본이며 1860년(철종 11)에서 1863년에 걸쳐 지었다. 수록 내용은 용담가(龍潭歌)·안심가(安心歌)·교훈가(敎訓歌)·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도수사(道修詞)·권학가(勸學歌)·도덕가(道德歌)·흥비가(興比歌)·검결(劍訣)의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운행록(水雲行錄)>에 의하면, 이 <용담유사>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처사가(處士歌)>를 포함하여 모두 10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담유사>는 1881년 6월 충청북도 단양군 남면 천동 여규덕(呂圭德)의 집에서 최시형(崔時亨)에 의하여 처음 간행되었고, 그 뒤 1893년과 1922년 각각 목판본으로 다시 간행된 바 있다. 이때 <검결>은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함께 간행되지 못하였다. <용담유사>는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東經大全)>과 더불어 동학의 기본경전이다. 최제우는 그가 깨친 후천개벽사상을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국문으로 쓰고, 가사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였던 것이다. <용담가> 이외에도 <용담유사>에 수록된 각 편의 내용과 특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안심가 : 1860년에 발표한 가사이다. 2음보 1구로 총 290구로 되어 있다. 이 <안심가>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불안해하던 부녀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지은 노래이다. 이 가사에서 최제우는 득도한 뒤 하늘에서 물형부(物形符: 최제우가 영감을 받아 천신을 그린 천주교도의 영부)를 받아 이를 그린 종이를 먹고 신선과 같은 풍채와 골격을 갖추게 된 자신을 서학(西學)을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그 뒤, 왜적에 대한 적개심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곧 왜적을 쓸어버리고 우리나라의 운수를 보전할 몸임을 밝히고, 따라서 부녀자들은 안심하라고 설득하고 있다. 특히, 이 가사에서 최제우는 천대받던 이 나라의 부녀자들을 현숙하고 거룩하다고 칭송하면서, 춘삼월 호시절의 태평가를 함께 부를 주체로 설정하고 있다. 선각자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2) 교훈가 : <수운행록>·<천도교창건사> 등에 의하면 1860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최제우가 득도한 이듬해인 1861년에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2음보 1구로 총 448구로 된 장편가사이다. 자손들에게 내리는 교훈형식으로 된 이 가사는, 고향의 교도들에게 힘써 수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곧,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그의 몸에 이미 모시고 있으므로, 하늘 조화의 그 참된 마음을 고이고이 삼가 지켜 이를 공경하고 믿는 데서 창조의 바른 기운을 되살려낼 것을 당부한 것이다. (3) 몽중노소문답가 : <수운행록>에 의하면 1861년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천도교사(天道敎史)>에는 1862년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총 4장으로, 2음보 1구로 총 169구로 이루어져 있다. “삼각산 이(梨)양도읍 기관(嗜貫)년 지늰 후의 이(悧)원갑 이 세상”에 자식이 없던 두 늙은이가 금강산에 들어가 산신께 빌어 옥동자를 얻었다. 이 아이는 ‘군불군(君不君)’·‘신불신(臣不臣)’·‘부불부(父不父)’·‘자부자(子不子)’의 난세를 한탄하고, 천하를 두루 다니다가 고향에 돌아와 백가시서(百家詩書)를 외웠다. 그러다가 다시 고향을 떠나 금강산 상상봉에 올라 쉬다가 꿈속에 한 도사를 만나 깨우침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이 가사는 최제우의 출생·성장·득도과정·득도내용 등을 요령 있게 잘 설명하고 있다. (4) 도수사 : 1861년에 지은 가사로, 2음보 1구로 총 200구로 되어 있다. 득도한 뒤 고향에서 여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제자들에게 수도하기를 간곡히 당부한 것이다. (5) 권학가 : 남원읍 서쪽 10리 밖 교룡산성 안에 정하였던 은적암(隱寂庵)에서 임술년(1862) 새해를 맞이하면서, 각지 제자들에 대한 정회(情懷)를 가눌 길 없어 지은 가사이다. 2음보 1구로 총 228구로 되어 있다. 최제우 자신이 자각창도(自覺創道)한 동학을 믿음으로써 다 같이 한울님의 참뜻으로 돌아가 한 몸 같이 될 것을 권유한 노래이다. (6) 도덕가 : 1863년 7월 경주 현곡면 등지에서 순회설법하던 당시에 지은 가사로, 2음보 1구로 총 136구로 되어 있다. 지벌(地閥)과 문필(文筆)보다는 도덕의 귀중함을 깨우친 노래이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조화를 자각 실현함에 있어서 소중한 것은 내 몸에 이미 모시고 있는 하느님에 대하여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니, <대학>·<중용>의 종지(宗旨)로서 천명된 성경이자(誠敬二字)가 그것이요, <주역(周易)>의 문언전(文言傳)에 언급된 바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기를 강조함이 그것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7) 흥비가 : 1863년에 지은 가사로, 2음보 1구로 총 184구로 되어 있다. <흥비가>는 <시경>의 노래체인 흥(興: 먼저 다른 물건을 읊어서 그 목적한 것을 끄집어 일으키는 것)과 비(比: 어떤 사물을 끌어대어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가리켜 하는 말)를 사용하여 도를 닦는 법을 가르친 노래이다. 도를 닦는 일은 결코 어렵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적인 일부터 요령 있게 행하는 데에서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흥비가>는 천도 파악의 인식론적 과정을 비유적으로 노래한 가사라고 할 수 있다. (9) 검결 : 1861년에 지은 가사로, 2음보 1구로 총 24구의 짧은 노래이다. ‘칼노래’라는 뜻의 이 노래는 최제우가 정치적 변혁을 꾀하였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최제우는 전라북도 남원의 은적암에서 수도를 하면서 득도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이 <검결>을 짓고 목검(木劍)으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 입고 이칼 저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켜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에서 보듯이, 최제우는 수도에만 그치치 않고 상원갑 세계를 위한 변혁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최제우는 처형당하였고, <검결>도 <용담유사>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해지지 못하였다. 갑오동학농민전쟁 때는 동학군의 군가로 애창되기도 하였다. <용담가>의 내용·형식을 검토해 보면 이 작품이 동학가사 중 그 시원이 되며, 그 종교적 성격을 가장 거시적으로 표현했고 작자 수운이 창조한 무극대도를 예언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용담가>가 수록된 <용담유사>는 우리 문학사에 있어 최초의 근대적인 성격을 지닌 시가이며, <용담유사>에 나타난 근대적 성격으로는 전통사회에 대한 부정, 우리말 우위의 정신, 만민평등의 정신, 여성의 사회적 지위 인정, 서양에 대한 저항, 자유로운 참정의식, 서민대중의 문학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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