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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관창의가

작품명
신의관창의가
저자
신태식(申泰植)
장르
가사
작품소개
<신의관창의가>는 경북 문경 출신의 의병장 신태식의 작품이다. 전체 1,210행이며 몇 개의 필사본으로 전하나 그 초벌원고는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필사본들은 전편에 심한 사투리와 군데군데 심한 오기가 나타나고 문맥의 흐름을 파악할 수 없는 부분도 없지 않다. 의병의 활동이 대개 한문으로 된 우리 측 사료나 일제의 사찰 문헌 속에 나타나 있는데 비하여 신태식의 <창의가>는 전편이 우리말로 기록되어 있으며 직접 의병활동에 참가한 의병의 생생한 기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그가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전국 각지의 민족적 항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태식(申泰植, 1864~1932)
한말의 의병장·독립운동가. 본관은 평산(平山). 이명은 철회(哲會).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도산(島山). 아버지는 명하(命夏)이다. 1894년(고종 31) 의병을 일으켜 간첩혐의가 있었던 문경 가은면(加恩面)의 김골패(金骨牌)와 상주의 강용이(姜龍伊) 등을 총살했다. 1902년에 내부주사·중추원의관을 지냈다. 1907년 8월 3일 이강년 부대와 합세하여 갈평전투를 치르고, 8일에 단양에서 김세영(金世榮)·강창근(姜昌根)·유제칠(柳齊七)·엄해윤(嚴海潤)·조수안(趙守安)·김운선(金雲先) 등과 함께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울진·평해·영양·영월·산동·제천·원주·홍천·철원·신계·곡산 등지에서 많은 전투를 치렀다. 양주 산안 전투에서 일본군 장교를 사로잡아 총살하는 등 크게 용맹을 떨쳤으나, 1908년 영평 이동전투에서 다리에 총탄을 맞고 잡혔다. 1909년 1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이강년의 발안으로 영평면민들이 호소하여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1909년 4월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1918년 1월 출감한 후 3·1운동에 참여했고, 1920년 3월에는 김천에서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을 조직하여 경상북도 단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현대어풀이(부분발췌)
아, 세상 사람들아 오늘날의 나라 형편을 들어 보십시오. 이 태조가 창업하시어 오백여 년 동안 내려올 때, 오천 년 동안 태평 성대를 누렸던 요순 시대의 정치와 이천 년 동안 이어온 공자의 도(道)인 인의예지를 법으로 삼아 삼강 오륜이 뚜렷하다. 대대로 이어 내린 임금님의 덕은 온 나라를 편안하게 바로잡도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양대 전란이 중간에 끼친 근심이라. 고종 황제가 이르시기를 인의가 있다고 칭찬하더니, 불행하구나 을사조약의 다섯 도적이 제 마음대로 온 나라를 일제에 넘기니 천지도 어둡고 일월도 끝이 없도다. 나라가 요란한데 백성인들 편하겠느냐? 수백 년 동안 양반 종사하였는데 이씨 왕조의 은혜를 입지 않은 이가 그 누구인가. 가슴에 끓는 피는 개개인의 마음과 똑같도다. 죽자고 하니 어리석고 살자고 하니 병이 되어 밤낮으로 잠을 못 이루어 엎치락뒤치락 하며 누웠더니, 사립문 밖에서 개 짖는 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다. 문을 열고 수소문하여 들으니 관동 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났다는 놀라운 소식이라. 이천만 우리 동포 놀라고만 있다는 말인가? 군율에 당하지 말고 하루 빨리 출두하소. 칼을 짚고 일어서서 문경읍 들어가니 충남진이 먼저 도착하여 적병을 소멸했구나. 다음날에 갈평 장터 들어가니 토벌대 수백 명이 북양사로 넘어온다. 효자진이 함께 합쳐 종일토록 접전을 벌이니, 피차의 죽은 사람이 얼마인지 알 수 없고, 날이 이미 저문지라 용못에 와서 밤을 새우고, 두 명을 사로잡아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 시체를 매달아 놓으니 마음에 쌓인 분한 마음이 만분의 일이라도 풀리겠는가 <하략>
해설
<신의관창의가>는 작가가 3년의 의병활동과 10년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스스로 맛보고 느끼고 부딪힌 일들을 적은 기록이다. 이 작품은 우선 전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허두 부분으로 이 부분에서는 그릇되어 가는 국정에 대한 작가의 개탄과 겨레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피력되어 있다. 둘째, 전개 및 절정을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 여기서부터 1907년 문경의병활동 이후 3년에 걸친 작자의 의병활동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이 기간 동안 신태식은 한 사람의 의병장으로 몇 번인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보다 많은 인정과 의리에 몸부림친다. 적과 우군을 찾아 무수한 고을을 지나치고 심산을 헤매는 동안 두 번의 큰 부상을 입고 많은 부하들을 잃었다. 이 부분에서는 그 모든 사실이 빠짐없이 되뇌어지며 항전의 과정이 그대로 펼쳐진다. 셋째는 수난의 부분이다. 의병으로서 연평 전투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사로잡힌 다음 적이 주관하는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죄수로 복역하는 동안의 실황·소감 등을 적은 부분이다. 여기에서도 대의명분을 위해 사는 남아로서의 작자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나타난다. 넷째, 전체의 결말을 지은 부분으로 저자는 스스로 향리에 돌아왔음을 만족하고 앞으로 평화롭게 여생을 보내리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한갓 수사적인 의미 이상의 것이 아니었음은 그 이후로 계속된 그의 저항활동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신의관창의가>에서 주목할 것은 저자 신태식의 저항정신의 격렬성 및 정통성이다. 본래 의병활동의 정신적 맥락은 척사위정(斥邪衛正)파의 구국사상과 종교동원에서 실현된 평민계급의 민족운동 참가에 그 국면이 맞닿은 것으로 파악된다. 척사위정파란 개화기의 변수 가운데서 서구라는 존재를 경계해 마지않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그 이전에 우리는 전혀 사전 준비없이 개항이라는 민족사의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개항 이전에 우리가 익혀온 것은 대체로 사대교린 질서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것이 개항과 동시에 허물어지면서 역사적 변수로 대두된 것이 서구의 앞잡이로 일본의 접촉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명(明)이나 청(請)을 섬기는 쪽과, 왜(倭)나 거란, 유구를 견제하면 그만이었던 도식적 질서체제에 익숙해 있었던 상황에서 이른바 서구라는 존재의 출현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개화파와 척사위정파의 대립 양상 속에서 <신의관창의가>는 척사위정의 사상을 행동적으로 대변했던 신태식의 삶의 체험에 근거한 사실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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