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성산별곡(星山別曲)

작품명
성산별곡(星山別曲)
저자
정철(鄭澈)
장르
가사
작품소개
정철(鄭澈)이 지은 가사. 3·4조가 주를 이루며 총 84절 168구이다. 성산은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다. 1560년 지은이가 25세 때 처외재당숙(妻外再堂叔) 김성원(金成遠)을 위해 지은 작품이라고 한다. 김성원은 성산에 서하당(棲霞堂)·식영정(息影亭)을 세우고 풍류를 즐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은 이곳을 중심으로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와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하고 있다.
정철(鄭澈,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국문학사에서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인 누이와 계림군 유(桂林君 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明宗)과 친숙해졌다. 1545년 을사사화로 맏형이 죽고 부친은 유배를 당했다가 1551년에 풀려났다. 이후 부친을 따라 전라도 담양에 내려가 살았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선비들과도 사귀었다.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40세인 1575년 시묘살이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 우거시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해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1592년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송하였으며,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하였다. 문집으로 <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현대어풀이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좋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매창(梅窓) 아침볕의 향기에 잠을 깨니, 산중 늙은이의 할 일이 아주 없지도 아니하다. 울타리 밑 양지 편에 오이씨를 뿌려 두고,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비 온 김에 가꾸어 내니, 짚신을 죄어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흩어 짚으니, 도화 핀 시냇길이 방초주에 이어졌구나. 잘 닦은 거울 속에 저절로 그린 돌병풍, 그림자를 벗삼아 서하로 함께 가니,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 남풍이 문득 불어 녹음을 헤쳐 내니, 철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희황 베개 위에 선잠을 얼핏 깨니, 공중의 젖은 난간이 물 위에 떠 있구나. 삼베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비껴 쓰고, 허리를 구부리거나 기대면서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룻밤 비 온 뒤에 붉은 연꽃과 흰 연꽃이 섞어 피니, 바람기가 없어서 모든 산이 향기로다. 염계를 마주하여 태극성을 묻는 듯,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차일삼아 돌길에 앉으니, 인간 세상의 유월이 여기는 가을이로구나. 청강에 떠 있는 오리가 흰 모래에 옮겨 앉아, 흰 갈매기를 벗을 삼고 잠깰 줄을 모르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하여 어떤가. 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아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빈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푸른 풀이 우거진 강변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의 흥을 못 이겨 피리를 비껴 부니, 물 아래 잠긴 용이 잠을 깨어 일어날 듯, 연기 기운에 나온 학이 제 집을 버려두고 반공에 솟아 뜰 듯.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잔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야단스럽다. 공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오니,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물 가리워 얼고 외나무 다리 걸려 있는데,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속 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경요굴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만고의 인물들을 거슬러 세어 보니,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찌 무심하랴마는, 어찌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 하였는가.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끝이 없다. 기산의 늙은 고불(古佛) 귀는 어찌 씻었던가. 소리가 난다고 핑계하고 표주박을 버린 허유의 조장이 가장 높다.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록 새롭거늘, 세상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술잔을 잡거니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구나, 거문고 줄을 얹어 풍입송을 타자꾸나.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렸도다. 높고 먼 공중에 떠 있는 학이 이 골짜기의 진선(眞仙)이라. 이전에 달 아래서 혹시 만나지 아니하였는가? 손님이 주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곧 진선인가 하노라.
어휘풀이
- 천손운금(天孫雲錦) : ‘천손’은 직녀성, ‘운금’은 구름같은 비단. 곧 직녀가 짠 비단이며 은하수를 가리킨다. - 서석(瑞石) : 상서로운 돌. 또는 서석대(瑞石臺) - 청문고사(靑門故事) : 진나라 때 소평이 청문(장안성 동남문)에서 오이를 가꾸며 지낸 일 - 방초주(芳草洲) : 꽃다운 풀이 우거진 물가 - 백빈주 : 흰 마름꽃이 핀 물가 - 경요굴(瓊瑤屈) : 옥으로 만든 굴. 여기서는 ‘성산(星山)’을 가리킴
해설
전체 내용은 6단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단은 서사(緖詞)로 김성원의 풍류와 식영정의 자연경관을 예찬했고, 제2단은 춘사(春詞)로 성산의 봄경치를, 제3단은 하사(夏詞)로 성산의 여름풍경을, 제4단은 추사(秋詞)로 성산의 가을밤 풍경을, 제5단은 동사(冬詞)로 눈경치와 이곳에 은거하는 산옹(山翁)의 부귀를 노래했다. 제6단은 결사(結詞)로 산 속에 벗이 없으니 독서를 통해 고금의 성현호걸의 흥망과 지조를 느낀다 했고 뜬구름 같은 세상에 술과 거문고를 즐긴다며 진선(眞仙) 같은 생활의 즐거움을 읊었다. 한자어구와 전고(典故)가 많아 한시의 분위기가 짙게 풍긴다. 이 작품은 당시 성산에 모인 김성원·정철·임억령·고경명이 함께 지은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 20수를 부연 설명하고 발전시켜 만든 것으로서 지은이의 개성이 잘 나타나 있다. 송순의 <면앙정가(俛仰亭歌)>를 본받았으나 계절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경치 묘사와 자연 흥취의 표현에서는 더 뛰어나다. <송강가사(松江歌辭)>·<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 등에 실려 전한다. <성산별곡>은 특히 다음 몇 가지 부분에서 그 의미를 획득한다. 첫째, 아름다운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한문의 취미에서 벗어난 점을 인정할 만하다. 둘째,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 풍류가 넘치는 개성과, 동경하는 이상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생활의 단면 등을 박진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셋째, 표현미의 측면에서 자연의 묘사, 유유자적하는 흥취 등은 공교함을 보이고 있다. 넷째, 험난한 정치생활 속에서 마음 속 깊이 사모하는 서하당에 대한 동경과 선망은 작자 송강의 정감 넘치는 인간미를 돋보이게 한 것이다. 다섯째, 호남가단의 모태가 된 성산에 대한 사랑, 그 자연미의 탄영(歎詠)은 작가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자연관과 시인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연계정보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관련멀티미디어(전체5건)
이미지 5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