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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탄(船上嘆)

작품명
선상탄(船上嘆)
저자
박인로(朴仁老)
장르
가사
작품소개
1605년(선조 38) 박인로가 지은 가사. 전문 68절 144구. <노계집(蘆溪集)>에 실려 있다. 지은이가 통주사(統舟師)로 부산에 부임할 때 전선(戰船)에서 전쟁의 비애와 평화를 추구하는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저자
박인로(朴仁老, 1561년∼1642년) 조선 중기의 문인. 임진왜란 때는 무인(武人)으로도 활약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이며 또는 무하옹(無何翁). 경상북도 영천 출생. 어려서부터 시재(詩才)가 뛰어나 이미 13세에 <대승음(戴勝吟)>이라는 한시 칠언절구를 지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동래·울산·경주지방을 비롯해 영양군까지 잇따라 함락되자 분연히 붓을 던지고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38세 때는 강좌절도사(江左節度使)인 성윤문의 막하에 수군으로 종군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1599년 무과에 등과하여 수문장 선전관을 제수받았다. 거제도 말단인 조라포(助羅浦)에 만호로 부임하여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는 무인의 몸으로서도 언제나 낭중(囊中)에는 붓과 먹이 있었고,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시정(詩情)을 잃지 않았다. 만년에는 여러 도학자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이덕형과는 의기가 서로 통하여 수시로 종유(從遊)하였다. 1601년 이덕형이 도체찰사가 되어 영천에 이르렀을 때, 처음 대면하여 지은 시조가 <조홍시가(早紅枾歌)>이며, 1605년에는 <선상탄(船上歎)>을 지었다. 1611년 이덕형이 용진강(龍津江) 사제(莎堤)에 은거하고 있을 때 그의 빈객이 되어 가사 <사제곡(莎堤曲)>·<누항사(陋巷詞)>를 지었다. 1635년에 가사 <영남가(嶺南歌)>를 지었고, 이듬해 <노계가>를 지었다. 그 밖에 도합 가사가 9편이고 시조는 68수에 이른다. 말년에는 천석(泉石)을 벗하여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다가 1642년에 세상을 떠나 영양군 남쪽 대랑산(大朗山)에 안장되었다. 죽은 뒤에 향리의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여 1707년에 생장지인 도천리에 도계서원을 세워 춘추제향하고 있다. 그는 비록 후반생부터 문인활동을 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에 버금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3권 2책으로 이루어진 <노계집>과 필사본 등에 실려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시가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비록 시조를 더 즐겨 지었지만, 국문학사상 의의는 가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문학적 재능도 가사작품에 더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어풀이
임금께서 이 늙고 병든 몸을 수군(水軍)으로 보내시기에, 을사년 여름에 부산진에 내려오니, 국경의 요새지(要塞地)에 병이 깊다고 앉아 있으랴? 한 자루 긴 칼을 비스듬히 차고 병선(兵船)에 감히 올라 기운을 떨치고 눈을 부릅떠 대마도를 굽어보니, 바람을 따라 이동하는 누런 구름은 멀고 가까운 곳에 쌓여 있고, 아득한 푸른 물결은 긴 하늘과 한 빛일세. 배위에 이리저리 거닐며 예로부터의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며 회억(回憶)하고, 어리석고 미친듯한 생각에 배를 처음 만든 황제(黃帝)를 한하노라. 큰 바다가 넓고 아득하여 천지에 둘러 있으니, 진실로 배가 아니면 풍파가 많은 만 리 밖에서 어느 사방의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엿볼 것인고? 무슨 일을 하려 하여 배 만들기를 처음 하였던고? 장구(長久)한 세월에 끝없는 큰 폐단이 되어, 온 천하에 만백성의 원한을 조장한다. 이런 일 보건대는 배가 생긴 제도야 지극히 묘한듯 하다마는, 어찌된 우리 무리는 나는 듯이 빠른 판옥선(板屋船)을 밤낮으로 비스듬히 타고서, 풍월을 읊되 흥취가 전혀 없는고, 옛날 배 안에는 술상이 어지럽더니 금일 배 안에는 큰 칼과 긴 창뿐이로다. 배는 한 가지인데 지닌 바가 다르니, 그 사이 근심과 즐거움이 서로 다르도다. 때때로 머리를 들어 임금님 계신 곳을 바라보며, 때를 근심하는 늙은이의 눈물을 하늘 한 모퉁이에 떨어뜨리는구나. 우리나라의 문물이 찬란한 문물을 자랑하던 한나라, 당나라에 지랴마는,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왜적들의 흉악한 꾀에 빠져 천추를 두고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안고 있어, 백분의 일이라도 못 씻어 버렸거든, 이 몸이 변변치 못하지만 신하가 되어 있다가, 신하와 임금의 신분이 서로 달라 못 모시옵고,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님을 향한 충성스러운 마음이야 어느 시각인들 잊었을 것인고? 강개를 이기지 못할 씩씩한 기운은 늙으면서 더욱 장하다마는,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병중에 들었으니, 분함을 씻고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버리기가 어려울듯 하건마는, 그러나 죽은 제갈량도 산 중달을 멀리 쫓았고, 발이 없는 손빈도 발이 성한 방연을 잡았거든, 하물며 이 몸은 손과 발이 성하고 목숨이 이어 있으니, 쥐와 개와 같은 왜적을 조금인들 두려워하겠는가? 나는 듯이 빠른 배에 달려들어 선봉을 휘몰아치며, 9~10월 상풍에 낙엽지듯 헤치리라. 제갈량이 맹획을 마음대로 놓았다 잡은 일을 우리인들 못할 리가 있겠는가? 벌레처럼 꾸물대는 저 섬나라 오랑캐들아, 얼른 항복하여 용서를 빌려무나.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않나니, 너희들을 구태여 모조리 다 죽이랴? 우리 임금님의 거룩한 덕이 너희와 다 같이 잘 살기를 바라시니라. 태평스러운 천하에 요순시대와 같은 화평한 군민(君民)이 되어 있어, 광명한 해와 달의 빛이 아침이요 또 다시 아침인 태평성대가 계속되거든, 전쟁하는 배를 타던 우리 몸도, 고기잡이 배로 바꿔 타 저녁 무렵을 노래하고, 가을 달 봄바람에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 있어, 성군 치하의 태평성대를 다시 보려 하노라.
해설
내용은 다섯 문단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단은 일장검을 짚고 서서 배 위에 올라 쓰시마 섬(對馬島)을 굽어보며 왕명을 받들어 부임하는 각오를 읊었다. 제2단은 배를 만든 유래에 대한 내용으로 1만 리 밖의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범해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은 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배를 처음 만들었다는 황제(黃帝)를 원망하고 또한 불사약을 구하려고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을 배에 태워 동해로 보내 모든 섬마다 도적을 낳게 했다며 진시황을 원망했다. 또 신선을 못 만났다고 망명해버린 서불(徐市)을 원망했다. 제3단은 배 위에서의 흥취를 읊었는데 옛날 배에는 술자리의 흥취가 있었지만 지금은 술상 대신 대검장창(大劍長槍)뿐으로 달을 읊어도 흥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제4단은 지은이의 우국단심을 읊었는데, 나라에 운이 없어 왜구로부터 수치를 당했다며 자신은 비록 미약하나 나라를 위한 굳은 마음을 가졌다고 했다. 제5단은 왜국이 잠잠해지고 마음이 평온해지기를 바라는 기원으로 전선(戰船) 대신 고깃배를 타고 풍월을 노래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지은이의 절절한 애국심을 감상에 젖지 않고 노래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창작한 1605년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7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로서, 악화된 대일 감정이 지속되고 있던 때이다. 즉, 반일과 극일은 당시 우리 민족의 일반적 정서였고, 직접 전쟁에 참여했던 박인로의 기본적인 정서이기도 했다. 이런 사상은 17세기 윤계선의 <반생몽유록>·<달천몽유록>·<용문몽유록>과 <강도몽유록> 등의 몽유록 계통 소설과 김시양(1581~1643)의 <자해필담(紫海筆談)>·<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그리고 묵재 이귀(1557~1633)의 <묵재일기(默齋日記)> 등의 각종 필기류(筆記類)에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 이 작품은 작자가 통주사로서 나라 수비의 임무를 맡게 됨에 따라, 임진왜란의 참상과 굴욕을 견딘 후에 이를 이상적으로 초극하려는 의지와 민족의 염원을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지은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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