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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곡(賞春曲)

작품명
상춘곡(賞春曲)
저자
정극인(丁克仁)
장르
가사
작품소개
정극인(丁克仁)이 지은 가사의 효시작. 총 39행 79구이며 <불우헌집(不憂軒集)> 권2에 실려 있다. 단종이 폐위되자 정언(正言)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인 전라북도 태인(泰仁)에 은거하면서 후진을 교육할 때 지은 작품으로, 속세를 떠나 자연에 묻혀, 봄 경치를 완상하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생활을 노래한 것이다.
저자
정극인(丁克仁, 1401∼1481)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성(靈城).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 광주(廣州) 출신. 1429년 생원이 되고, 여러 번 과시(科詩)에 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437년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 그 뒤 풀려나 태인으로 남귀(南歸), 초사(草舍)를 짓고 불우헌이라 명명(命名), 자호(字號) 또한 이를 사용하였다. 불우헌 앞 비수천(泌水川)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아 양성을 힘쓰면서 향리자제를 모아 가르치고,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풍교(風敎)에 힘썼다. 1451년 은일(隱逸) 6품(六品)을 받고, 이어 인수부승(仁壽府丞)으로 있다가 1453년 전시(殿試)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나,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자 사임하고 태인으로 돌아갔다. 그 해 12월 조정에서는 인순부승록(仁順府丞錄)으로서 좌익원종공권(佐翼原從功券) 4등을 내렸다. 이로부터 다시 출사하여 약 10년간, 네 번의 성균관주부, 두 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내고, 사헌부감찰 및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 등을 역임하였다. 1470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서 관직을 내어놓고 물러남),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1472년 영달을 구하지 않고 향리 자제를 교회(敎誨)한 공으로 3품산관(三品散官)의 은영(恩榮)이 내리자 이에 감격, <불우헌가(不憂軒歌)>·<불우헌곡(不憂軒曲)>을 지어 이를 송축하였다. 비록 환로(宦路)의 영달은 없었으나 선비로서의 지개(志槪)와 풍도(風度)를 고수하였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81세로 별세하였다. 문학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여 최초의 가사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단가(短歌) <불우헌가>,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시가사에 공헌하였다. 정극인은 원래 광주(廣州) 두모포리 태생인데, 처가가 태인인 까닭으로 이곳에 우거하게 된 것이다. 송세림(宋世琳)의 <동중향음주서(洞中鄕飮酒序)> 발문에도 애초의 태인 사람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되었으며,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현대어풀이
속세에 묻혀 사는 분들이여, 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가? 옛 사람의 운치 있는 생활을 따를까 못 따를까?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 나만한 사람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자연과 벗하여 사는 지극한 즐거움을 누릴 줄 모르는 것일까? 두어 간 초가집을 맑은 시냇물 앞에 지어 놓고 송죽(松竹)이 우거진 숲 속에 자연의 주인이 되었도다. 엊그제 겨울이 가고, 이제 봄이 돌아오니, 복숭아꽃, 살구꽃은 저녁 놀 속에 피어 있고, 버드나무와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 칼로 마름질해 냈는가, 붓으로 그려냈는가? 조물주의 신비로운 창조의 솜씨가 사물마다에 야단스레 나타나 있구나. 수풀에서 우는 새는 봄의 흥겨움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마다 아양부리는 모습이로구나. 자연과 내가 하나이니 흥(興)이야 다르겠는가? 사립문을 나와 걸어도 보고, 정자에 앉아 보기도 하고, 또 천천히 거닐며 시를 읊기도 하며 산 속에서 지내는 나날이 고요하고 적적(寂寂)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한가로운 가운데 참된 즐거움을 누리는 맛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나 혼자 뿐이로구나! 여보게 이웃 사람들아, 산수 구경을 가자꾸나. 푸른 풀을 밟으며 들을 산책하는 일은 오늘 하고, 냇물에서 목욕하는 일은 내일 하세. 아침에는 산나물을 캐고 저녁에는 낚시질을 하세. 이제 막 익어서 발효한 술을 갈건(葛巾)으로 걸러 놓고, 꽃나무 가지를 꺾어 그것으로 잔 수를 세어 가며 먹으리라. 부드러운 봄바람이 잠깐 불어 푸른 물이 건너오니 맑은 향기는 술잔에 스며들고, 붉은 꽃잎은 옷에 떨어진다. 술동이가 비었거든 나에게 알리어라. 아이를 시켜 술집에 술이 있는가를 물어 받아다, 어른은 지팡이를 짚고, 아이는 술동이를 메고, 나직이 시를 읊조리며 천천히 걸어 시냇가에 혼자 앉아, 깨끗한 모래사장 맑은 물에 술잔을 씻어 술을 가득 부어 들고, 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니, 떠오는 것이 복숭아꽃이로다. 무릉도원이 가깝도다. 저 들이 바로 그 선경인가? 소나무 숲 사이 좁은 길에 진달래꽃을 부여잡고, 산봉우리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내려다보니, 수많은 촌락이 여기저기에 벌여 있네. 안개와 놀과 빛나는 햇살로 채색된 자연의 아름다움은 마치 수놓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구나. 엊그제까지 검던 들이 봄빛으로 넘치는구나. 공명도 나를 꺼리고 부귀도 나를 꺼리니, 아름다운 자연 외에 어떤 벗이 있겠는가? 소박하고 청진한 시골 생활에 부귀와 공명 같은 번거로운 생각을 아니 하네. 아무튼 한평생 자연을 벗하여 욕심 내지 않고 즐겁게 지내는 일이 이만하면 족하지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해설
<상춘곡>의 작품내용은 서사(序詞)·춘흥(春興)·취락(醉樂)·결사(結詞)의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단락에서는 속세를 떠나 벽계수(碧溪水) 앞에 수간모옥(數間茅屋)을 짓고 자연과 벗하는 풍월주인(風月主人)의 삶을 제시한다. 둘째·셋째 단락에서는 봄 경치를 즐기며 자연에 몰입하는 삶이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의 삶과 비견되어 그려진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이렇게 세속의 명리(名利)를 멀리하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벗하며 사는 삶에 만족한다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작품에 그려진 전체적인 내용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던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도 실력을 쌓아 중앙 정계로 진출하려다가 거듭되는 수난을 겪던 조선 전기 사림파의 출처관(出處觀)을 알 수 있다. 조윤제(趙潤濟)가 이 작품을 가사의 효시작(嚆矢作)으로 본 이후, 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적지 않게 있었다. 그 근거로 <상춘곡>이 실려 있는 <불우헌집>이 정극인 사후(死後) 30년 뒤에 편찬된 점, 임진왜란 전 표기법이나 어휘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 내용이 작자의 생애와 비교할 때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 그리고 효시작으로 보기에 형식이나 표현이 너무 정돈되어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정극인이 작자가 아니라는 명확한 근거가 없는 한, 일단 정극인의 작품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견해가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상춘곡>이 가지고 있는 가풍(歌風)은 이후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仰亭歌)>로 이어져 강호가도(江湖歌道)라는 시풍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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