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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현(趙演鉉)

예술가명
조연현(趙演鉉)
전공
평론
개요
조연현의 비평은 흔히 생리적 비평, 혹은 자의식의 비평으로 지칭된다. 그의 비평가로서의 활동은 광복 후부터 두드러지는데, 1948년 처녀평론집 <문학과 사상>을 발간한 이래로 우익 민족문학론의 선두에 섰으며, 탁월한 인상비평의 새 영역을 구축하고 또한 순수문학론적 입장에서 전통을 적극 옹호하였다. 첫 번째 평론집 <문학과 사상>은 당시 문단에서 주도적이었던 유물론적 비평이론과 인상주의적 비평이론을 동시에 배제하는 그의 비평관을 잘 보여주는 저작이다. 특히 <비평의 논리와 생리>에서 그는 창작이 생리적인 현상인 것과 마찬가지로 비평 역시 개개인의 생의 원리로서 자기 세계를 완성해나가는 가치 표현, 즉 “주체의 생명의 표현”으로 파악하면서 독자의 주체적 정신에 입각한 문학의 해석과 수용이 비평의 본질임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생리에 입각한 문학이 정치적 논리에 의한 문학보다 원초적인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그의 비평론은 김동리의 ‘순수문학론’과 일치하게 된다. 또한 그는 활발한 평론활동을 펼치는 한편, 문학사 연구에도 진력하였다. <한국현대문학사>는 갑오경장 이후부터 한국문학을 역사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한국문학의 문단적 계보를 풍부한 자료에 입각하여 검토하고, 중요 작가와 시인의 문학적 성과와 한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자 하였으며, <한국현대문학사 개설>, <한국신문학고> 등의 작업을 통해서 한국문학의 역사적 맥락을 고찰하였다. - 참고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생애
경남 함안에서 출생한 조연현은 배재고보를 거쳐 혜화전문에서 수학하였다. 1940년 만주 하얼빈에 잠시 가있다가 귀국하여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학생사건에 연좌되어 중퇴하였다. 1945년 순수문예지 <예술부락>을 창간하고 <새로운 문학의 방향>을 발표, 이 때부터 본격적인 비평활동을 전개했다. 1946년 박종화, 김동리 등과 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좌익계 문학가동맹측의 문인들과 민족문학론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전개, <논리와 생리>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순수문학 옹호에 앞장섰다. 또한 <민주일보>, <민중일보>, <민국일보> 등 신문사에서 기자나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결성의 산파역을 했다. 1948년 언론계를 떠나 문예사의 편집장을 맡았고, 한국문학가협회를 창립했다. 1949년 <문예>를 창간하고 편집했으며, 격동기 순수문학과 자유수호의 기수로서 평론을 썼다. 1955년 <현대문학>의 창간회원으로 그 주간을 맡았으며, 이 시기에 대표작인 <한국현대문학사>를 발표해 방법론적 관점에서 문학활동 및 작가를 중심으로 갑오경장 이후의 신문학사를 정리했다.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2년에 조연현문학상을 제정, 시행하고 있다.
약력
1920년 경남 함안 출생 1938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1940년 혜화전문 입학 1941년 혜화전문 중퇴 1945년 김동리·서정주 등과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 <예술부락> 창간 1948년 한국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49년 김동리와 함께 <문예> 발간 1953년 한국문학가협회 평론분과위원장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55년 <현대문학> 주간 1970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 국제펜클럽 아시아 작가대회 참석 1971년 국제펜클럽 세계대회 참석 1976년 현대문학사 사장 1978년 한양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1979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상훈
1963년 대한민국문화포상 1965년 문교부문예상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70년 국민훈장동백장 1972년 3·1문화상 평론집 <문학과 사상>(1949) <문학개론>(1951) <한국현대작가론>(1952) <휴일의 의장>(1958) <한국현대문학사>(1961) <한국신문학고>(1966) 수필집 <문학적 산보>(1951) <문학적 인생론>(1959) <여백의 사상>(1962) <문학과 사회>(1973)
작가의 말
(……) 아무리 위대한 전통을 자랑할 수 있는 민족이라 할지라도 그 민족이 창조적인 능력을 상실할 때는 그의 위대한 전통도 일조일석에 무너져 버릴 수 있는 것이며 아무리 전통이 빈약하고 빈곤해도 그 민족의 창조력이 왕성할 때는 그의 빈약한 전통은 새로이 풍부하게 빛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통이란 자동적으로 발전되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그 민족의 창조력과 함께 언제나 그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민족의 창조력과 결부되지 못한 전통은 이미 과거의 한 유물에 지나지 않으며 전통의 배경을 갖지 못한 창조력이란 또한 단순한 혈기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전통과 창조력은 서로 떠날 수 없는 동일한 혈육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전통이라는 것이 어떤 고정된 내용이나 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현실과 함께 부절히 변용되고 발전될 수 있는 현실이나 역사의 기본적인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통이란 단순한 과거로부터의 축적된 가치나 역량만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로 향해서 이념하는 산 생명이요, 움직이는 힘인 것이다. (……) 러시아의 근대문학이 백년이라는 짧은 시간 사이에 도스토예프스키니 톨스토이니 푸시킨이니 고리키니 고골과 같은 위대한 문학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슬라브민족의 방대한 창조력에 원인된 것이었던 것이다. (……)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의 빈곤한 문학전통에 실망하거나 절망하기 전에 우리의 민족적인 창조력을 십이분으로 발휘하고 행사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 - ‘문학과 이상의 현실’, 조연현, <한국의 문학비평 2>, 민음사, 1995
평론
비평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이 물음에 온몸을 던졌던 최초의 비평가가 조연현이다. 물론 조연현 이전에도 비평가들이 없지 않았다. 조연현보다 학식이 풍부하거나 감수성이 민감한 비평가도 있었을지 모르나 비평에 대한 자의식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면서 이를 운명의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해간 비평가로는 조연현이 처음이었다. 이 사실은 조연현 비평을 문제삼을 때에도 빠뜨릴 수 없는 으뜸 항목이다. 사람은 시인이나 소설가 또는 희곡작가가 될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사람이 비평가로 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그는 무엇을 대가로 치르고 비평가가 되어야 했을까. 왜냐하면 시인이나 소설가 되기의 논의가 끝난 자리에서 비평가 되기 논의가 비롯되는 까닭이다. 무엇인가를 대가로 내주고 그는 비평가가 되어야 했는데, 그 때문에 그는 이 ‘무엇’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과 아쉬움, 나아가 저주를 은폐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이 점에서 조연현 비평은 그것에 시달린 형국을 빚는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식을 철저히 은폐하는 방식을 창출해낸 점이야말로 조연현 비평의 핵심이 아니었을까. 곧 근대성이라는 이름의 주인에 맞선, 노예로서의 주체성 확보가 그것이다. (……) 그의 문학적 출발은 시였다. (……) 시 창작에 대한 자질이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창작이야말로 학업이라 말해지는 세속적 삶을 초극하는 것이라 믿었는데, 이 믿음의 근거를 분석하는 일은 상당한 인내가 요청된다. 그가 별로 시적 자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계속 쓰고자 했는데, 그 이유란 무엇인가. <여성문화>에 <혼자 가는 길>이 발표되었을 때, 서정주가 <조선일보>에서 호의적인 시평을 해주었으나 “성급한 시대적 요구는 어느 사이에 시 한 편 똑똑히 지어내지 못하는 나에게 평론의 붓을 잡게 하였던 것”이라 그가 말해놓은 것은, 되새길 필요가 있다. 시에 대한 자신의 자질 없음을 암묵적인 상태에서 깨닫고 있었음과 동시에, 비평적 자질의 발견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면도칼’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해방공간의 비평계에서 많은 평론활동을 했다. (……) 우리가 보통 비평이라 할 경우 그것은 표현과 인식의 무한한 접근을 의미할 것이다. 가령 시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시작품을 내보인다면 그것은 표현으로 대답한 것이다. 시론이라든가 시 창작방법이라든가 시문학사를 내보인다면 그것은 인식으로 대답한 것이다. 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인식만으로도 표현만으로도 부족한 것, 이 둘의 무한 접근 그 이상이다. 조연현 비평은 이 사실을 알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표현만이 제일이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그 고정관념을 단 한 번도 실천하지 못했다. 여기서 못했다 함은, 안했다 함과는 구별된다. 원칙적으로 비평의 존재방식상에서 조연현이 바라는 그러한 ‘예술품처럼 형상화된’ 비평이란 존재할 수 없다. 표현과 인식의 무한 접근이 비평의 이상적인 존재방식인 만큼 표현 일변도를 지향하고자 한 조연현의 염원이란 실상 비평 자체의 부정행위가 아니면 안 된다. (……) 표현과 인식의 무한접근에서 비평의 이상이 놓여 있다는 일반론을 거부한 조연현 비평은 그 자체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가 그러한 고정관념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시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음에 대한 일종의 복수행위가 아니었을까. 시에 대한 편향성이 비평에 대한 원한을 낳았으며, 이 원한이 마침내 비평 거부현상으로 퉁겨져 나간 것이다. ‘내가 평론가가 된 것은 나 자신의 희망이거나 목적이 아니라 그것은 인생의 모순과 같은 하나의 운명’이라고 그가 강조할 때, 이 문맥 속에 놓인 원한의 밀도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누구나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원한이 예술작품처럼 형상화된 비평, 곧 불가능한 환상적 비평상을 상정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비평상의 내세움이란 기묘하게도 조연현 비평의 특성을 이루게 되는데, 이 점을 밝히는 것은 조연현 비평에 멈추지 않고 우리 근대정신사의 해명으로 연결되는 것이어서 특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조연현은 실상 비평을 거부함으로써 비평보다 그 근원적인 문제에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조연현 비평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존재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는 형편이다. 이 점은 앞장에서 상세히 검토되었거니와, 실상 ‘성급한 시대 요청’을 그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도스토예프스키로 말미암았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르침에 따라 그가 평필을 들었으며, 그 때문에 그의 평론은 가공할 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라는 장대한 사상체계에 맞설 수 있는 것이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대한 육체가 필요하였던 것. 근대성이란 이름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체계에 맞설 만한 사상체계란, 눈을 씻고 봐도 도스토예프스키밖에 없었던 것. (……) 이들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그들의 창작(표현)에 주력하고 있을 때, 이들의 창작에 논리적 형식을 부여한 것이 조연현 비평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창작이 근대성이란 이름의 마르크스주의라는 장대한 논리 앞에 크게 위협받게끔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위협에서 구출하고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끌어들인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였다. (……) - ‘근대와 반근대’, 김윤식, <김윤식 선집 3 : 비평사>, 솔출판사, 1996
관련도서
<조연현 문학전집>, 조연현, 어문각, 1977 <김윤식 선집 3>, 김윤식, 솔출판사, 1996 <한국의 문학비평 2>, 권영민 편, 민음사, 1995 <한국근대문학사상연구>, 김윤식, 아세아문화사, 1994 <한국현대문학사상론>, 김윤식, 일지사, 1992 <조연현 연구>, 김명인, 인하대 박사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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