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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진(金基鎭)

예술가명
김기진(金基鎭)
전공
평론
개요
팔봉 김기진의 초기 문학론은 정치를 우위에 두고 문학을 수단화함으로써 문학의 형식을 배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후 월평에서는 언어나 시의 리듬 등 외적 형식의 창조를 위한 표현수단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형식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박영희와의 내용 형식 논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김기진은 이러한 형식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 1920년대 후반부터 프로문예 양식론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 양식론은 대중화 논쟁 중에서도 시, 소설 등 기존 장르를 중심으로 한 프로문예의 형식적 가능성을 개진하며, 독자와 관련해서는 통속화를 지향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장르인식의 한계와 실천성이 결여된 작가태도 등의 이유로 카프 소장파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된다. 한편 그의 초기 소설인 <붉은 쥐>,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 등은 작가 자신의 주관적 관념이 인텔리의 내면 독백이나 일기체 형식을 통해 직접 토로되고 있다. <몰락> 등에서는 계급관계를 중심으로 소설의 상황을 설정하고 하층민 주인공을 내세우고는 있으나, 등장인물의 사고와 행위가 구체적인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 그 자신이 제기한 통속적 경향소설을 직접 실행한 장편 <해조음>은 소재뿐만 아니라 전대 소설의 구조를 작품 내에 수용함으로써 통속성을 획득하고는 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향성을 획득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참고: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생애
충북 청원에서 출생한 김기진은 1916년 배제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 일본 릿쿄오대학(立敎大學) 영문학부에 입학했다. 1923년 5월 릿쿄오대학을 중퇴했으며, 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기자 등 17년간 언론계에 종사했다. 1945년 출판 인쇄업 애지사(愛智社)를 운영했고, 1960년부터 1961년까지 경향신문 주필을 역임했다. 일본 유학시 1922년 박승희(朴勝熙), 이서구(李瑞求) 등과 함께 ‘토월회’를 조직했으며, 1923년 박영희, 안석영, 김형원, 이익상, 김복진 등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했다. 시 <애련모사>(1923)를 발표하면서 <백조> 3호부터 동인으로 참가해서, <한 갈래의 길>, <한 개의 불빛>, <권태>, <비오는 날> 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했다. 또한 <떨어지는 조각조각>이라는 에세이에서 신경향파 문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붉은 쥐>(1924), <불이야 불이야>(1925),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死)>(1925) 등의 소설을 발표함으로써 카프의 이론적, 실질적 지도자의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평론으로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1923),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1924), <문예사상과 사회사상>(1927), <프로문예의 대중화 문제>(1929) 등이 있다. 6·25 이후에는 <통일천하>(1954~1955), <군웅>(1955~1956) 등의 역사소설을 쓰기도 했다.
약력
1903년 충북 청원 출생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입학 1921년 릿쿄오대학(立敎大學) 영문학부 입학 1922년 박승희·이서구·김복진 등과 ‘토월회’ 창립 1923년 <개벽>에 <프로므나드 상티망탈>로 문단 데뷔 1924년 매일신보 입사 / 카프의 모태가 되는 ‘파스큘라’ 조직 1925년 시대일보 입사 1926년 박영희와 ‘내용과 형식 논쟁’ 1929년 임화와 ‘대중화 논쟁’ 1930년 중외일보 사회부장 1934년 매일신보사 사회부장 1945년 애지사 창립 1958년 민권옹호투쟁위원회 부위원장 취임 1960년 경향신문 주필 1961년 재건국민운동 중앙회장
상훈
1952년 금성화랑무공훈장 평론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1923)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1924)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1924) <조선어의 문학적 가치>(1924) <무산 문예 작품과 무산 문예 비평-동무 회월에게>(1927) <문예사상과 사회사상>(1927) <프로문예의 대중화 문제>(1929) 수필 <프로므나드 상티망탈>(1923) <환멸기의 조선을 넘어서>(1924) 소설 <붉은 쥐>(1924) <불이야 불이야>(1925) 소설집 <청년 김옥균>(1936) <해조음>(1938) <심야의 태양>(1952) <최후의 심판>(1953) <통일천하>(1965)
작가의 말
역사적으로 문예 사상의 발달을 보아 내려오면, 그 사상의 출발됨이 그 생활 상태로부터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꾸어 말하면, 그 시대의 생활 상태가 그 시대의 시대 사상을 출생하게 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학의 발달이 상공업의 발달이 되어서 도회라는 특수한 부문을 지어내고, 인구의 증식은 도회인으로 하여금 관능적으로 달아나게 하고, 생활의 불안정은 염세 사상을 지어내었다. 문예와 생활은 떼어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문예는, 그 시대의 사회 조직·생활 상태가 결정해준 생활 의식의 유로 된 것이다. 문예부흥에서 발족된 개인주의의 사상이, 오늘날의 상업주의-자본주의를 만들어내고, 기계의 발달은, 대중을 인생 생활에서 질식하게 만들어버렸다. 모든 방면으로 충만된 혁명의 기운이, 어찌하여 홀로 문예의 권내에만 없을까 보냐. 문예의 혁명은, 신낭만주의 발생 이후로 최근에 일어난 새로운 운동이다. 그러나, 문학의 혁명은 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사상의 혁명은 붓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의 생활을 개조하지 않으면, 참말로 혁명은 성취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현대인의 정신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사회 생활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다. 여기에 문예사의 유물사관적 견지가 있다. 미의식이라는 것은 생의 비참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이라는 것은 유쾌와 유익의 양면을 가지고 있는 즉 심미와 공리를 합해서 가지고 있는 것인데, 상업주의·자본주의 아래에서 예술품은 장식품이 되고 유희만 위해서 생산되게 되었다. 그것을 구원해 내오라는 역사적 필연을 가지고 있는 무산 대중과 악수하여 그 효적을 급속하게 할 일, 그러자면 조선에서 기괴백면의 정면의 적을 부셔버려야겠는데, 그와 같이 하자면 동일한 생활을 전민족이 생활한 일, 즉 무산 대중과 동일선상에 설 일, 그리하여 우리는 감각을 혁명하고 건전한 감각을 가져야 할 일, 그리고 신흥문학은 개성에 철저·보편화·신주류의 표현으로 중심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계 의식에 눈을 뜰 일, 그러면 자연히 프로와 악수하게 된다. -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 <김팔봉문학전집1 : 이론과 비평>, 문학과지성사, 1988
평론
(……) 김기진은 1922년 초부터 서서히 사회주의 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문학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이때의 그에겐 문학이 어떻게 즐거움을 주는가 하는 질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것은 복잡하게 짓찢겨져 있는 사회와 이러한 사회의 확대판인 세계 속에서 도대체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앙리 빠르뷔스의 클라르테 운동을 배우고, 유도무랑(有島武郞)의 ‘선언하나’에 접하고, 소목근강(小牧近江)의 <씨뿌리는 사람>을 읽고 하면서 그가 느끼고 생각한 것은 문학이 도대체 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의 제 모순들, 특히 계급적 이해관계의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조국 조선의 문제로 옮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인 그에게 있어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의 구체적 형태는 조선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당연하게도 이 질문은 지금 조선문학은 어떠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 작가가 써내는 작품이 자연스럽게 그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면서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시대는 행복하다. 그러나 작가가 다수 민중들의 열망을 대변하면서 작품을 썼을 때, 그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로부터 적대시되는 시대는 불행하다. 한 사회의 지배집단이 요구하는 문학과 작가 자신의 스스로 정직하게 형성한 사회의식이 첨예하게 갈등을 일으키는 사회는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종종 문학의 마술적 기능은 잊혀지고 계몽적·선동적 기능이 유일한 기능처럼 부각된다. 그리고 작가는 작품을 통해 변화를 요구하는 민중들을 만족시키면서 그 자신 역시 미래의 변화된 세계에 부끄럽지 않은 지식인의 일원으로 참석해야 한다는 이중의 부담을 지게 된다. 팔봉의 수필체 평론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의 소산이다. 그의 글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고발하여, 이러한 현실에 야합하는 모든 것들을 통매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단순하고 명쾌하게 그러나 다분히 감정이 배인 목소리로 현실을 격렬히 비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비판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충분히 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의 글들은 그 이전에 누구도 그만큼 시원하게 조선의 현실을 슬퍼하고, 조선의 현실에 항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근거에 의지했다기보다는 다분히 즉흥적이다. 팔봉의 이러한 수필체 평론이 가진 호소력은, 그러므로 성공적인 문학적 형상화나 체계적인 현실비판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의 글이 지닌 호소력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었던 식민지 조선의 현실로부터 온 것이다. 다친 아이가 자신의 상처를 보고 우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의 글을 통해 비로소 격렬히 자신의 감정을 터뜨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팔봉의 수필체 평론이란 말은 사실 평론체 수필이라고 해야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아니 좀 더 분명히 하자면 이 당시에 그가 쓴 글을 성격별로 구분해서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 등의 평론과 <프로므나드 상티망탈>, <통곡> 등의 수필로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렵지도, 불가능하지도 않은 이 작업을 필자가 기피하고 애매하게 수필체 평론이란 말을 사용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팔봉의 글이 수필이란 명칭을 분명히 달고 있을 경우에도 대부분이 어느 정도씩의 평론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이 현실에 대한 단상들과 어울려 일으킨 반응이 당대의 어떤 평론보다도 컸었다는 사실에 있다. 딱딱하게 논리적으로 문학적 견해를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슬쩍슬쩍 스쳐 지나가며 이야기하는 이 같은 글들이 훌륭하게 평론으로 읽힐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사회의 분위기와 함께 그때까지 평론이란 장르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문학이론을 어설프게 소개하거나 적당히 번안해서 어렵게 사용하는 몇몇 편의 글들과 감정적으로 남의 작품을 헐뜯는 인상비평적인 글 몇 편만 선보인 것이 이 당시 평론계의 실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일단, 팔봉의 글들을 수필과 평론으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필체 평론이란 명칭으로 묶어서 과도기적 성격을 부여하고자 한다. (……) - ‘팔봉 김기진 평전’, 홍정선, <문예중앙>, 1985~1986
관련도서
<김팔봉문학전집>, 홍정선 편, 문학과지성사, 1988~1989 <김기진의 문학연구: 문학과 이념의 관련 양상>, 신철하, 한양대 박사논문, 1997 <팔봉 김기진 비평문학 연구>, 조홍규, 조선대 박사논문, 1997 <팔봉 김기진 연구>, 이현우, 전주우석대 박사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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