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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원(郭鐘元)

예술가명
곽종원(郭鐘元)
전공
평론
개요
곽종원은 광복 후 본격적인 평론활동을 시작하여 좌익측의 계급주의 문학운동에 대응하는 청년문학가협회를 발족시켰고, 이어 한국문학가협회, 한국문인협회 등 문단의 요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동안 발표된 평론 <문학의 사상성과 예술성>에서 사상성과 예술성의 조화, 특히 예술성을 강조하여, 당시 좌익계에서 내세웠던 정치적 선전 선동을 위한 목적의식성의 강조를 직·간접적으로 반박했고, <신이상과 신인간의 탐구>, <문학정신의 확립> 등의 평론에서 인간의 영원한 본질을 창조해야 한다는 신이상주의를 제창하였다. 첫 평론집 <신인간형의 탐구>는 민족문학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인류적 보편성을 추구하려는 그의 문학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현대문학이 당면하고 있는 중요 문제들을 탐구해본 일반론적인 문학론이며 1950년대 평단에서 주요한 이슈가 되었던 문학상의 제문제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신이상주의 문학론은 해방 문단에서 제기된 청년문학가협회 내부에 존재했던 민족문학의 여러 방향, 김동리의 ‘순수문학론’, 조연현의 ‘문학생리론’과 동궤에 놓이는 것으로 좌익측의 정치주의로부터 문학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즉 민족이라는 개념이 특정한 계급이나 시대에 귀속되지 않는 것처럼, 민족문학이라는 것도 보편적이면서 일반화된 개념이며, 민족적 개성과 인류적 보편성이라는 본질적인 의미를 추구함으로써 그 존재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학의 의미와 기능을 구체적인 사회현상과 역사의 운동 안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거의 배제된 문학노선이 과연 해방 직후와 같은 상황에서 어떠한 적극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좌익측의 정치주의에 맞놓이는 대립항으로 제출된 이러한 문학론이 성급한 정치주의의 허점을 지적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익 정치세력과 무관하지 못함으로써 역시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극복하지 못하였음이 지적된다. - 참고 :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한국근대문인대사전>, 권영민 편, 아세아문화사, 1990
생애
경북 고령에서 출생한 곽종원은 1938년 만선일보에 수필 <이역에 젖은 애상>을 발표하고 다음해 도일, 1941년 니혼대학 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군상>의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몇 편의 평론을 조선일보, 매일신보의 학생란에 투고했다. 1942년 <문학의 함축성>을 매일신보에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평론활동에 들어갔다. 해방 후 월간지 <생활문화>를 주재했고, 상명여고 교감, 숙명여대 교수와 동 대학교 총장직무대리를 거쳐 건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한편 8·15 이후 줄곧 민족문학 진영의 입장에서 활발한 문단활동을 전개하여 문화단체총연합회와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을 비롯, 예총 부회장, 예술원 문학분과 회장, 예술진흥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약력
1917년 경북 고령 출생 1938년 만주 남만공업학교에서 교편 생활 / 만선일보에 수필 <이역에 젖은 애상> 발표 1941년 일본 니혼대학 문과 졸업 / 재학시 <군상> 동인으로 활동 1946년 잡지 <생활문화> 주간 / 상명여중·고 교무주임 · 교감 1952년 문화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 1961년 숙명여대 교수 · 총장직무대리 1968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 문인협회 상임이사 / 건국대 교수 1971년 영남대 명예문학박사 / 건국대 총장 역임 1972년 대만 문화대 명예문학박사 1972년 문화예술진흥원 설립준비위원 1973년 한국문예진흥원 초대원장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사 1980년 건국대 명예교수 / 상명여대 학장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상훈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8년 대통령표창 1969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70년 국민훈장동백장 1980년 국민훈장모란상 1989년 5·16민족상 평론집 <신인간형의 탐구>(1955) <문학이란 어떠한 것인가(공저)>(1959) <문장대전(공저)>(1961) <문학개론>(1973) 수필집 <사색의 반려>(1962) <사색과 행동의 세월>(1977) <마음의 거리와 우주의 거리>(1987) <생활의 예지를 찾아서>(1996)
작가의 말
(……) 우리의 정신상태가 이만큼 각박해진 오늘에 있어서, 이 심경을 움직여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옛날의 사건이거나 오늘날의 사건이거나, 심각을 노리고 비극의 깊이를 파고들어가는 소재이어야만 한다는 그것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환경 속에서 생존과 생활의 충실한 진실을 추구하려는 일념만으로는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가지는 이미지네이션이 최대한의 날개를 펴뜨리는 데까지 발전되지 않으면 도저히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소설적인 형태의 창작으로서는 애당초 충족시킬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사소설이라고 해서 일률적으로 상상력이 결여되었다고 단정해버린다면 약간의 무리가 있을지 모르나, 우리나라의 사소설은 그 대개가 진실을 추구하는 내성적 경향을 중시하는 나머지, 상상의 세계가 소홀히 취급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당면한 우리나라의 문학이 침체해진 작가정신의 타개를 위해서나, 또는 한국적인 현실에 새로운 메스를 가하는 의미에서나, 심각성의 추구와 비극의 심화는 하나의 필연적인 사태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현대 한국문학의 방향’, 곽종원, <한국대표작선집: 평론1>, 명문당, 1996
평론
(……) 1938년 만선일보에 수필 <이역에 젖은 애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발을 디딘 그는 해방 직후 청년문학가협회 활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비평 활동을 전개했다. “문학 평론도 어느 것부터 손을 대야 하고 어떤 문제를 중심 테마로 삼아야 할지 막연할 정도”였던 해방 공간에 본격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이야말로 그의 비평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는 해방 직후를 “살벌한 분위기”로 표현하고 있으며 “질서가 없는 혼란한 상태”로 회상하고 있다. 전혀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맨주먹으로 총칼과 겨누는 격”이었다는 상황에서 본격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한 당시의 그는 친일의 오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신진 기예였다. (……) 곽종원은 상대적으로 깨끗했으며, 상대적으로 신세대였다. 신세대라는 자부심과 친일의 오욕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것-이것이야말로 곽종원 비평의 출발점이자 원리이고 핵심이다. (……) 방법보다 태도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곽종원의 50년에 걸친 비평은 감성주의 비평이었다. 임화를 비롯한 카프의 여러 비평가들이 과학의 논리(유물론, 역사철학)를 앞세우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곽종원은 비과학적이고자 했다. 그는 과학 또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비과학 또는 감성에 철저히 기대어 있었다. 그의 반지성, 반과학적 비평 태도는 과학과 합리주의란 이름의 근대에 항거하는 비근대적 대응 방식의 하나였다. 이것은 일제에 항거하는 가장 효율적인 패러다임인 사회주의라는 이상이 더 이상 불가능한 1930년대 후반의 김동리적 이론을 나름대로 변형시킨 곽종원적 방식이었다. 문단사의 주류로서 청문협에 속했던 그가 문단사적 흐름 속에서 비평 활동을 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작품과 작가를 문학의 원리에서 비평하지 않고 문학의 흐름, 더 구체적으로 말해 한국 근대문학사의 흐름에서 보고자 할 때 논리나 과학은 무의미해진다. 곽종원이 후배들의 비평을 학술 논문으로 폄하한 것은 바로 그러한 초과학주의, 즉 감성주의적 태도 그리고 문단사적 관점 때문으로 보인다. 곽종원 비평의 가장 핵심적 테마는 신이상주의와 신인간형이다. 그의 신이상주의와 신인간형은 조지훈의 순수시, 김동리의 본령정계의 문학, 조연현의 생리적 문학론과 등가를 이루는 것으로서 문협 정통파의 본격문학 또는 순수문학의 중요한 이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신이상론과 신인간형은 곽종원 자신의 ‘청년 의식’에서 기인한다. 그의 ‘청년 의식’은 대략 두 번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첫째, 일제 시대 매일신보의 학생란에 쓴 일련의 글에서 그는 현대적 삶의 방식을 제시하면서 청년 의식을 고양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 때의 신세대라는 것은 대동아 전쟁의 일본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유학생 계층의 일본 중심 사상까지 배여 있는 이중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비록 곽종원이 적극적인 친일을 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결전 문학의 이념>을 썼고 창씨 개명에 동참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치유하는 과정이 그의 비평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둘째, 해방 직후에는 전혀 새로운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신세대 의식이 요구되던 상황에서 그의 청년 의식은 한층 공고해진다. 일제 시대에 거의 대다수 문인들이 친일을 했다는 것과 그들은 문단사적으로 구세대라는 것, 해방 직후 새로이 등장한 조연현과 자신은 신세대 즉 청년이라는 것 등이 강한 자부심으로 잠재하고 있었다. 그는 문학적 혁명이 필요한 해방 직후를 새로운 이상의 신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신세대 의식에 소극적인 친일이 촉매 작용을 하여 반정치주의를 표방하기에 이르렀지만 청년문학가협회의 역설로서의 정치주의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의 비평 세계를 관류하는 또 다른 축의 하나가 민족문학이다. 그는 끊임없이 민족에 집착하면서 민족 진영 평론의 선봉장을 자임해왔다. 민족이란 견고한 성을 그는 고수하면서, 때로는 그 의미를 축소하기도 하고 확대하기도 했다. 그가 말하는 민족 진영은 문단사적 갈래 또는 유파적인 개념으로서 한국문학가협회의 주류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민족 진영의 문학을 그는 어떤 때는 본격문학으로, 어떤 때는 휴머니즘으로, 어떤 때는 민족문학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 - ‘곽종원론, 비근대주의와 비정치주의’, 김승환, <한국현대비평가연구>, 강, 1996
관련도서
<한국대표작선집: 평론1>, 윤병로 편, 명문당, 1996 <한국현대비평가연구>, 김윤식 외, 강,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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