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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길(安壽吉)

예술가명
안수길(安壽吉)
전공
소설
개요
1935년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한 안수길은 단편 <사호실>(1940), <한여름 밤>(1940), <원각촌>(1942), <목축기>(1943), 중편 <벼>(1940) 등 1940년부터 꾸준한 작품활동을 보여주었다. 1943년에는 만주의 농촌을 무대로 한 12편의 중편과 단편을 모아 발간한 첫번째 작품집 <북원(北原)>에서 만주에서 토지를 개척하는 한국인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해방공간에서 광복 직후의 혼란상을 그린 <여수(旅愁)>(1949)를 비롯, <밀회>·<상매기(商買記)>(1949) 등을 발표했다. 초기의 농민소설적인 성격이 이때 일대 전환을 맞이해 도시 서민의 생활을 다루기 시작했다. 평범한 서민의 고뇌와 용기, 정의감을 주제로 삼아 시대와 역사를 다루는 그의 사실주의는 1950년대에 <제3인간형>, <초련필담(初戀筆談)>, 1960년대에 <풍차>, <벼> 등 4권의 작품집을 낸 후 1959년부터 1967년까지 <사상계>에 세 번으로 나누어 연재된 <북간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 다시 만주와 함경도를 무대로 민족사를 작품화하는 작업에 착수, 그 성과가 바로 <성천강(城川江)>이다. 그의 소설의 배경은 시간적으로는 한말부터 1970년대까지, 공간적으로는 만주일대까지 확대된다. 그 속에서 현대사와 국토의 문제를 제기하고 망국인들의 통한을 그린 것과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 참고: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생애
1911년 함남 함흥에서 출생한 안수길은 함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14세에 만주로 가서 1926년 만주 간도 중앙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함흥고보 2학년 재학 중 맹휴사건 주동으로 자퇴하고, 이듬해 경신학교 3년에 편입하여 다니던 중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퇴학당했다. 1930년 일본에 건너가 동양중학(東洋中學)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과 함께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영어과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1935년 단편 <적십자병원장>과 콩트 <붉은 목도리>가 <조선문단>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32년부터 1945년까지 간도에서 소학교 교원, 간도일보사와 만선일보사의 기자로 일했고, 1945년에 만선일보사를 사직, 함흥으로 돌아왔다가 1948년 월남하여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대구·부산 등지로 피난하였다가 해군 정훈감실 문관으로 근무하였고, 이후 서라벌예대 교수, 이화여대 강사, 한양대 교수,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문협이사를 역임하였다.
약력
1911년 함남 함흥에서 출생 1924년 만주 간도로 이주 1926년 만주 간도중앙학교 졸업 / 함흥고등보통학교 입학 1927년 함흥고보 2학년 재학 중 맹휴사건의 주동학생으로 인정되어 자퇴 1928년 상경하여 경신학교 3학년 편입 1929년 광주학생의거에 참여, 체포되어 구류를 살고 퇴학당함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동양중학교 입학 1931년 동경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영어과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1932년 간도의 소학교에서 교편생활 1935년 단편 <적십자병원장> · 콩트 <붉은 목도리>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 1936년 용정 간도일보사 기자 1937년 신경 만선일보사 기자 1945년 흥남으로 귀향 1948년 월남하여 경향신문사 입사, 문화부 차장 피임 1951년 해군 정훈감실 문관으로 근무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용산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1954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과장 취임 1959년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소설창작 강의 1960년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중앙위원 피선 1970년 대만 초청 아시아작가대회 한국대표 / 제37차 펜서울대회 한국대표
상훈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8년 서울시문화상 1973년 3·1문화상 단편소설집 <북원(北原)>(1944) <제3인간형(第三人間型)>(1955) <초련필담(初戀筆談)>(1955) <풍차>(1963) <벼>(1965) 장편소설집 <화환(花環)>(1955) <소년 수호지>(1955) <제2의 청춘>(1958) <북간도(제1부)>(1959) <북간도>(1967) <통로>(1970) <부교(浮橋)>(1972) <성천강>(1976) 수필집 <명아주 한 포기>(1977)
작가의 말
넓은 뜻으로 문학을 정의하는 경우 모든 문자로 씌어진 것이 이 범주 안에 든다. 그러나 글자로 씌어졌다고 해서 역사, 철학, 법률학 등등이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학이라고 하면 역사나 철학 같은 것과 엄연히 구별되는 그 어떤 개념이 우리에게 있다. 이것이 좁은 뜻으로 본 문학일터인데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한다면 그것은 ‘말의 예술’로 요약될 것이다. 문학하면 시건 소설이건 글자로 씌어지는 것인데, 왜 말의 예술이라고 하느냐 하면 글은 말을 일정한 부호로 고정시켜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글의 바탕은 말인 탓으로 글로 씌어지는 것이 문학이지마는 그것은 그 근원에 있어 곧 말의 예술이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문자의 근원이 말임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니와 그러면 예술이란 무엇이냐? 말의 예술인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술이 무엇임을 우선 알 필요가 있다. 사람에게는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알고 있는 것을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본능이 있다. (……) 그런데 생각하고 느낀 것을 표현해 전달하는 방법을 우선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상대편에서 두뇌를 통해 알려주고 이해시키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심장을 통해 정감에 호소하는 방법이다. 두뇌를 통하는 방법에는 사실의 정확성이나 논리가 필요하고 심장을 통하는 경우에는 생동하는 감동이 요망된다. 논리 위주의 전달 방법이 과학적 방법이요, 감동 위주의 방법이 예술적 방법인 것이다. 역사학, 철학, 법률학, 사회학 등등의 인문과학(人文科學)이 여기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문학도 포함시켜 광의의 문학으로 불리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작자의 생각과 느낌을 감정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며 미술, 음악, 무용 등등이 문학작품도 포함시켜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 그러나 여기서 못을 박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은 색이나 선이나 음이나 동작, 말 등은 각각 그 예술의 특징을 말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예술을 생산하는 작자의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 수단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내용과 표현이 혼연일치되는 데서 비로소 그 예술품은 빛을 발할 것이요, 감동을 불러일으켜 예술 본래의 기능을 다할 것이다. (……) 문학예술은 음악이나 무용 같은 순수성이 강한 부문과는 달리 감정뿐 아니라 사상을 내용으로 다루게 되고, 근대의 수법을 거쳐 현대문학에 이르러서는 사상에 치중하는 경향이 농후해지고 있다. 그 내용을 정확하고 과부족없이 표현할 수 있는 말의 선택, 그런 말의 정연하고 조화를 이룬 배치라야만 말의 예술로서의 문학의 기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렇게 작가가 제작한 작품을 독자는 왜 읽으며, 읽음으로 해서 어떤 작용이 심성생활(心性生活)에서 생기게 되는 것일까? (……) 인간은 자신이 모르는 일을 알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본능(욕구라도 좋다)도 있다고 하겠다. 문학작품은 자신이 모르는 일을 알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욕구를 만족시켜주되 심장을 통로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 문학작품을 통하는 경우는 단순히 사실을 안다는 흥미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생의 모습 그대로를 마음 속에서 체험한다는 쾌락과 효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다듬어진 한 편의 주옥 같은 서정시를 읽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그 감동의 여운이 오래 사라지지 않는 것은 시인이 독자 대신으로 절실한 내용을 다듬어진 말의 예술로 구현해주었기 때문이다. (……) 작품을 읽음으로써 자신이 체험 못한 다른 인생을 체험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이 가장 적절하게 적용되는 문학양식이 소설과 희곡일 것이다. 소설과 희곡문학은 시(서정시) 작품과는 달라 작자의 생각과 느낌이 직접 주관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고, 인물, 사건, 배경이 조화를 이루어 전개되는 설화(이야기)로서 나타나는 것이 그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본질적 요소로 삼고 있는 작품에 있어서는 거기에 다루어져 있는 인간의 생활이 어떻게 생생하고 진실하냐에 따라, 그 우열을 가릴 수 있을 것이다. (……) - ‘문학과 인생’, 안수길, <명아주 한 포기>, 문예창작사, 1977
평론
(……) 그가 문학에 뜻을 세우고자 한 것은, 위의 기록에 따른다면 일본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간도에 돌아온 1931년 이후이다. 그것은 ‘간도’라는 지정학적 성격에서 말미암는다. 모더니즘도 마르크스주의도 아닌 제3의 문학·사상적 자리, 그것이 간도의 사상사·문학사적 방향성이었다. (……) 안수길이 놓였던 시대적 정신이란 ‘전통지향성’ (‘일본에의 회귀’, ‘한국에의 회귀’, ‘동양에의 회귀’)이 한층 요구되는 시대로 보아도 될 것이다. 김동인, 염상섭, 박영희 등 <창조>, <폐허>, <백조>파들이 놓였던 ‘서구 세계에로의 열림’이 한층 중시된 시대적 정신과 이태준, 김동리, 박종화, 그리고 청록파 등이 놓였던 시대정신은 이처럼 큰 차이를 빚는다. 안수길은 ‘한국적 회귀’의 큰 물결을 타면서도 국내의 여러 유파들과는 달랐다. ‘간도에의 회귀’였기 때문이다. ‘간도에의 회귀’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그가 20년간 살던 간도를 떠나 8·15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장편 <북간도> 5부작을 간행한 1967년에야 주어졌다. 그러니까 <북간도>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는 일이 이제부터는 불가피한 과제가 되어진 셈이다. 그것은 우리 문학사의 하나의 큰 봉우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 <만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안수길의 문학활동에서 특기할 것은 <싹트는 대지>(1941)라는 소설집 출간에 관여한 점이다. 신형철이 편집한 이 창작집은 만선일보사 간행이며, ‘재만 조선인 작품집’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 안수길은 여기에다 <새벽>을 발표하였다. “우리가 살던 M골은 두만강 상류의 산골짝이었다”로 시작되는 <새벽>은 안수길의 만주시절의 대표작이자, 염상섭이 지적한 조선 개척 이민사의 전기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 안수길의 만주시절의 활동은 다른 여느 작가보다 특출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격인 <새벽>을 비롯, <벼>(1941), <토성>(1942), <부엌녀>(1937), <새마을>(1942), <원각촌>(1942), <목축기>(1942) 등은 그의 창작집 <북원>(1944)에 실려 있다. 이들 작품은 두 계통으로 갈라볼 수 있는데, 하나는 염상섭이 말한 개척 이민의 전사에 해당되는 것이며, 여기에는 <새벽>, <벼>, <원각촌> 등이 해당된다. 다른 하나는 만주국 건국(1932) 이후 이른바 개척 이민의 현 단계를 그린 것으로 <새마을>, <목축기>, 그리고 장편 <북향보>가 이 계보에 든다. (……) 서울에서 안수길은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취직하였다. 1948년 가을이었다. 그는 서울 생활이 매우 낯설고, 따라서 금방 작품을 쓸 수가 없었다. 더구나 만 3년 동안의 공백기가 있지 않았던가. 월남 후 그의 첫 작품은 <여수>이고, 두 번째가 <밀회>이다. 그는 만주 체험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떻게 사느냐’를 창작의 기본 태도로 하여온 안수길에 있어 그 나름의 수준을 보인 작품은 <제3인간형>(1953)이다. 이것은 6·25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6·25가 났을 때 안수길은 피난을 갔으며 해군문관으로 근무도 했고, 이어서 동산중학에서 국어교사 노릇을 하면서 틈틈이 창작을 했다. 그에 있어 직장이란 소설을 쓰기 위한 방편이었다. 1954년에 서라벌예술대학 창작 과장으로 취임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그만둔 것도 오직 창작에 전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 안수길이 전 생애를 들어서 작품을 쓴 것은 두루 아는 바와 같이 대하소설인 <북간도>(1959~1967)이다. <북간도> 제1부가 <사상계>에 발표된 뒤 그것이 5부로 완성될 때까지 무려 8년의 세월이 걸렸다. <북간도>는 이한복 집안과 장치덕 집안이 만주 비봉촌에서 4대에 걸쳐 살아가는 일을 그린 것이며, 안수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문학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꼽을 수가 있다. <북간도>를 쓴 뒤에 작가 안수길은 한동안 허탈한 듯 보였을 정도로 온갖 힘을 거기에 쏟았다. 그러나 <북간도> 이후 그는 <성천강>, <통로> 등의 장편을 썼다. 만주로 이민가기 전의 안수길의 가계(조부, 부)와 관련된 이들 장편도 중요하지만, 그가 틈틈이 써낸 단편도 매우 수준높은 것들이다. <이라크에서 온 불온문서>(1965)에서 그는 분단 문제를 밀도있게 다루었으며, 그의 마지막 단편인 <망명시인>(1976)에서는 작가와 조국의 관계를 깊이있게 다루었다. (……) - ‘간도에서 서울까지’, 김윤식, <안수길>, 지학사, 1985
관련도서
<안수길 연구>, 최경호, 형설출판사, 1994 <안수길>, 김윤식 편, 벽호, 1993 <한국 근대 소설과 민족 현실>, 민현기, 문학과지성사, 1989 <안수길 연구>, 김윤식, 정음사, 1986 <안수길 연구>, 김윤식 편, 지학사, 1985 <안수길 소설연구: 만주체험 소설을 중심으로>, 박은숙,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2 <일제강점기 간도소설 연구>, 계곤, 경남대 박사논문, 2002 <‘북간도’ 연구>, 박창순, 인하대 박사논문, 1990 <안수길 소설 연구>, 최경호, 명지대 박사논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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