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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徐基源)

예술가명
서기원(徐基源)
전공
소설
개요
서기원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중반경까지 가장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의 작품은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젊은이들의 삶의 고뇌와 그 출구를 찾기 위한 내면적 저항의 면모를 주로 담고 있다. 이들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은 대부분 전쟁과 연관되어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이런 작중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작가는 인물과 세계와의 대립과 갈등을 첨예하게 드러내는데, 이는 불투명한 미래와 무거운 현실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삶으로 구체화된다. 1970년대 이후에 발표한 <마록열전>과 같은 작품에서는 작품세계가 확연히 변모하는데, 이는 외부세계의 모습이 달라져 있으며 아울러 그 외부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 역시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이후 그의 작품은 현실을 넓은 범위에서 다양하게 바라보려는 작가의 시각과, 인물에 대한 작가의 거리감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특색을 드러낸다. 이러한 시각과 거리감의 유지는 냉소주의라는 평가를 낳기도 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전쟁에서 취재한 것, 사회현실의 경제적·정치적·소시민적인 소재와 역사적 소재를 다룬 세 가지 면으로 볼 수 있으며, 현실의식과 그 실천적 의지를 보여주는 리얼리즘 문학을 지향하고 있다. - 참고: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생애
서울에서 출생한 서기원은 신의주 운정소학교, 경복중학교를 거쳐 1948년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과 함께 행정장교 후보생으로 공군에 입대했다. 1956년 황순원에 의해 단편 <암사지도>가 <현대문학>에 추천됨으로써 등단했다. 이후 <딸과 이야기>, <달빛과 기아> 등을 발표, 계속해서 <오늘과 내일>, <잉태기> 등으로 문단의 각광을 받고 1960년 현대문학신인상을 수상했다. 1955년 공군에서 제대한 후, 1956년 동화통신사 경제부 기자로 입사한 것을 계기로 하여 조선일보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울신문사 사장, 문예진흥원장, KBS 사장 등을 지냈다. 동인문학상, 한국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잉태기>, <이 성숙한 밤의 포옹>, <연가> 등의 단편소설과 <전야제>, <혁명>, <김옥균>, <왕조의 제단> 등의 장편소설을 꼽을 수 있다.
약력
1930년 서울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중퇴 1957년 단편 <암사지도>로 등단 1970년 중앙일보 논설위원 1972년 경제기획원 대변인 역임 1976년 국무총리 공보비서관 1979년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 1988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1989년 서울신문사 사장 1990년 한국방송공사 사장 1996년 96문학의 해 조직위원장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97년 한국공연예술진흥협회 위원장
상훈
1954년 화랑금성무공훈장 1960년 현대문학신인상 - <오늘과 내일> 1961년 동인문학상 - <이 성숙한 밤의 포옹> 1996년 은관문화훈장 2004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소설집 <마록열전>(1972) <이 성숙한 밤의 포옹>(1976) <여자의 다리>(1976) <김옥균>(1979) <조선백자 마리아상>(1979) <왕조의 제단>(1983) 수필집 <물따라 고기따라>(1991)
작가의 말
“(……) 해방보다도 6·25전쟁이 나한테는 더 크게 정신적인 면에서 충격을 준 것 같습니다. 장편 <전야제>에서 그런 것과 관련된 고민을 나름대로 그리려고 했지요. 동족끼리 피를 흘리며 싸운다는 것에 대한, 뭐라 그럴까, 아주 구제받기 어려운 절망감 비슷한 거, 그리고 왜 싸워야 되는지 그런 것에 대한 회의, 이런 게 들끓어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구질서가 6·25전쟁 때 완전히 와해가 됐어요. 그런데서 생겨난 허탈감, 방향감각의 상실이라고 그럴까, 이런 것들이 일시에 몰려왔으니까, 확고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등·방황하면서 6·25전쟁을 겪은 셈이죠. 그후에 지식인들이 6·25전쟁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곤 하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칠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안간힘이라고 그럴까, 몸부림이라고 그럴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세월이고 삶이었습니다. (……) 1956년 10월에 공군에서 제대했습니다. 공군 대위로 예편했지요. 물론 후방 행정요원이니까 전투에 참가한 적은 없었지요. 근데 제대하기 전에 보니까 그해 봄부터인가 6·25전쟁 전에 나오던 <문예>지의 후신인 <현대문학>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현대문학>에 실린 추천 작품을 열심히 읽었죠. 읽었는데 건방진 얘기일지 모르지만 이런 정도하면 나도 한번 써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 이전에는, 문학작품도 많이 읽었지만 미술, 음악 이런 데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현대문학>이 나오는 걸 보고서 나도 글 좀 써야겠다, 나도 쓸 수 있겠다, 이런 자신감이랄까, 자기 다짐이랄까 하는 것을 가지게 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전쟁 시기, 정식으로 수입되는 것이 아니기에 구하기 어려웠지만 사르트르 전집, 까뮈, 하이데거의 책을 사서 읽었고 특히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자유의 길>, <구토> 등은 나에게 영향을 주었지요. 전쟁 상황이라는 게 실존적 상황이라 사르트르의 사고가 와 닿았어요. 나이 들면서 서구식 자아, 실존, 존재 등 동양철학에 있어 맞지 않았어요. 한국적 동양적 사고와 서양철학적 개념이나 자아에 대한 존재가 달라요. 한국의 자아는 조상과 자손의 연관관계 속의 나지요. (……) 우리 역사에서 조선말이나 한말이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 한국사람의 권력에 대한 의식에는 큰 변화가 없어요. 권력의 핵이 있으면 그곳으로 쏠려요. 회사도 리더십이 서면 몰려와요. 비판이 없어요. (……) 옛날에는 전통에 대한 반항과 자기부정이 강했죠. 지금은 너무 소시민적인 생각이 위주예요. 우리 세대 젊은이는 자기 자신의 안락을 취하겠다든가 이기적으로 자기 혼자 잘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요즘은 소시민적 행복, 안락함, 쾌락 그런 데 많이 안주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 전체 공동체의 책임감이나 진지함과 고민하는 게 없어요. 물론 생활양식의 변화이기 때문에 이해는 가죠. (……) ” 서 선생은 특히 우리 문학의 앞날에 대하여 좀더 ‘굵은 문학’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한다. 너무 시류에 아첨하는 이런 문학에 대하여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면서 미디어 시대라 진짜 좋은 작품이 일반 독자에게 전달이 안되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독자를 의식해야 하지만 생각하는 독자를 위한 작품을 쓰고 싶다고 하면서 사물을 생각하는 독자, 건성으로 넘어가는 독자는 안되며 굵은 문학의 시대를 바라고 있었다. (……) - ‘원로 소설가 서기원 선생을 찾아서: 정직성과 존엄성이 함께 한 서기원 <대담>’, 서기원·조병무, <월간문학>, 2003년 2월호
평론
(……) 여러 평론가들에 의해 논급된 바 있지만 서기원 씨는 이른바 전후문학으로 불리어지는 1950년대 문학의 특징을 누구보다 구체적으로 그러낸 작가이다. 그가 전후문학의 기수처럼 불려진 까닭은 소위 ‘전후문학’이라는 이름을 가능하게 했던 ‘6·25동란이 초래한 윤리적 파탄과 인간성의 상실을 주제로 전쟁의 부조리한 상황, 가치관의 전복, 기존 질서의 파괴 등을 남달리 적나라하게 분석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위 ‘전후문학의 기수’로서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학관이란 어떤 것인가 들여다볼 필요성을 느낀다. 그가 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였던 것은 ‘현실’과 ‘언어’였던 것 같다. 우선 ‘현실’의 문제에 있어서 그는 “한국 전쟁으로서 집약 혹은 상징되는 한국의 현대사의 현실을 떠나서는 문학을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언어’의 문제에 있어서는 “문학은 상상력의 산물이며 언어의 질서임에 틀림없으나, 그 상상력과 질서의 근원은 곧 현실이며 체험이다. 전후 작가 등에게 있어서 이 체험은 언어의 붕괴로서 나타났다”고 말한 바 있다. (……) 전후문학이 청산되고 작가의식이 폭넓게 확산되면서 1960년대 중반부터 서기원 씨의 작가적 관심은 대충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하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있게 한 우리의 근대사에 대한 점검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이었다. 전자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이 동학군을 주제로 한 <혁명>, 김옥균을 주인공으로 다룬 <김옥균> 등이며, 후자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이 <반공일>, <사지연습> 등 일련의 단편들이다. 이들 작품들은 발표될 때마다 여러 각도에서 시선을 모았는데 이와 같은 작가 서기원의 두 가지 관심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화를 이루는 양상을 보였고 그 결실로 나타난 것이 전후문학을 청산한 후 최대 성과로 꼽히는 연작 <마록열전>이었다. 1971, 72년에 걸쳐 5편이 발표된 <마록열전>은 최후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우선 형식의 면에 있어서 이들 연작의 특이성을 말한다면 현실의 상황을 역사상의 어떤 상황에 대입시켜 오늘날의 비리와 부조리를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을 통하여 작가가 보이고자 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구조나 현대인의 의식이 모두 봉건사회의 그것으로부터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의 결과일 것이다. 그는 크게 흥분하지 않고 현실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다만 현상으로서만 받아들이지 않고 역사 인식의 문제로서 수용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 - ‘전쟁문학의 결산, 역사와 현실의 조화’, 정규웅, <동서한국문학전집 24>, 동서문화사, 1987(……) 서기원의 전후소설에 등장하는 ‘파괴적 성격의 소유자’들-<암사지도>의 상덕, <잉태기>의 도섭, <이 성숙한 밤의 포옹>의 선구와 같은-은 전쟁이 낳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역사에 대한 환멸에서 기인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세상을 부정하고 환멸을 표하는 ‘향암성(向暗性)’ 인물들이고, 서기원의 소설은 사실상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작가 서기원은 도덕적 자아(물론 그들 역시 전후 상처를 받은 젊은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파괴적 성격의 소유자’들이다)를 대변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빛을 좇고, 긍정의 가치를 찾아나서며, 인간과의 진정한 ‘만남’을 부단히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의 지향은 곧 환멸의 질서에 좌절되거나 굴복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전후 사회의 극단적 피폐상을 폭로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그들의 자기 모멸의 확인과 극단적인 자기파괴의 충동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구원’으로서 제시한 것은 ‘생명’과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제시한 ‘생명’이란 모든 가치의 파탄과 혼란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무엇, 즉 생명의 존엄을 역설하는 당위적 차원의 것이다. 또한 ‘사랑’이란 그러한 생명의 존엄이 남녀간의 결합으로 상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기원의 전후소설에 드러난 ‘구원’이란, 사실상 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서기원의 전후소설에서 ‘구원’의 의미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생존의 부조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체념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모순과 분열을 통합시키려는 과정으로 ‘성숙’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서기원이 보기엔 삶이란 모순과 분열로 조건지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갖는 기본적인 부조리성과 모순성, 그리고 인간성 자체에 대한 기대가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서기원의 전후소설은 소박한 인정론적 휴머니즘은 기실 본능과 같은 인간애, 각성되지 않는 상태의 인간애와 등가물로 이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기원은 전후 생존의 부조리와 인간의 양면적 속성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둔다. 파괴적 성격과 건실한 성격의 대립·갈등이 서사의 근본적인 축을 이루게 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편 서기원의 전후소설은 부정적 세계에 함몰되어 허무주의로 빠지는 경향과도 다르다. 그의 소설은 ‘구원’을 통해 허무주의를 건너가려는 길을 부단히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서기원의 소설은 1950년대 ‘자기파탄의 소설’에서 1960년대 ‘자기구원의 소설’로 나아가는 징후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서기원의 체념과 환멸은 당대 현실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 좌절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양면성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점에서 좀더 근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전후문학의 자장(磁場)이 체념을 전제한, 그나마도 암시와 상징의 형태로 제시되었던 서기원의 구원을 유의미하게 했다면, 그러한 자장이 사라진 시대의 서기원 문학은 체념과 환멸만이 남을 터인데, 그의 방법이 풍자의 형태를 띠든(<마록열전> 연작의 경우처럼), 그의 소재가 역사로 가든(<혁명>이나 <왕조의 계단>같은 경우처럼), 이러한 체념과 환멸의 본질을 감추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 ‘구원으로서의 생명과 사랑’, 구자황, <1950년대 문학의 이해>, 성균관대출판부, 1996
관련도서
<1950년대 문학의 이해>, 조건상 편, 성균관대출판부, 1996 <동서한국문학전집 24: 서기원>, 서기원, 동서문화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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