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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趙炳華)

예술가명
조병화(趙炳華)
전공
개요
조병화는 다작과 다산의 시인이다. 그의 다작의 비결은 삶과 죽음, 그리고 인생의 본질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를 쉬운 일상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많은 독자와 솔직한 대화를 이루어 왔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현대시가 난해하다는 통념을 무너뜨린 희소한 시인이자 자신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대상과 감회를 평이한 일상적 언어와 문맥 속에서 진솔하게 표현함으로써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일찍이 시로써 베스트셀러 톱을 확보하고 있던 김소월의 서정시가 두메산골을 노래했다면, 그는 외로운 도시인의 고독을 구가하고 있다. 초기에는 현대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과 사랑, 그리고 애환을 평이한 문맥과 율조 속에서 읊었지만, 점차 인간의 존재와 운명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었다.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고 뛰어난 시적 표현과 쉬운 일상어로 심도있는 내면세계를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표현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시집으로 <하루만의 위안>, <패각의 침실>, <사랑이 가기 전에>, <서울>,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 <공존의 이유>,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 <내일 어느 자리에>, <가숙(假宿)의 램프>, <먼지와 바람 사이>, <창 안에서 창 밖에>, <안개로 가는 길>, <머나먼 약속>, <어두운 밤에도 별은 떠서>, <지나가는 길에>, <후회없는 고독>, <낙타의 울음소리>, <타향에 핀 작은 들꽃>, <잠 잃은 밤에> 등을 들 수 있다. - 참고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생애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한 조병화는 1938년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1945년에는 일본 동경고등사범에서 물리·수학을 전공하여 해방 후에는 경성사범·제물포고·서울고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수학을 가르치면서도 학생들에겐 시를 열강했다고 하며, 학창시절에는 럭비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중앙대학·이화여자대학 강사를 거쳐 경희대학과 인하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으로 문단에 등장하였고 다작의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68년 자신의 시작 생활 20년을 결산하는 <고독한 하이웨이>를 내놓아 주목을 끌었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으로 도쿄대회, 프랑크푸르트대회, 뉴욕대회, 망똥대회 및 자유중국 초청 등으로 여러 차례의 국제회의에 참석했고, 각종 단체에 관여하여 인하대학교 이사, 시인협회심의위원, 문인협회 부이사장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 유화개인전과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약력
1921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43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이과 입학 1945년 경성사범학교 이화학실 근무 1946년 대한럭비축구협회 이사 1947년 인천중학교 교사 · 럭비부 창설 1949년 서울중학교 교사 · 럭비부 창설 1955년 중앙대학교 문리과대학 출강 1957년 국제펜동경대회에 한국 대표단원으로 참석 1959년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조교수로 전직 / 국제펜프랑크푸르트대회 참석 1960년 경희대학교 출판국 창설 · 초대 국장 1961년 연세대학교 출강 1963년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부교수 /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1966년 국제펜뉴욕대회 참석 1967년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출강 1969년 국제펜프랑스망통대회 참석 1970년 국제펜서울대회 재정위원장 피선 1972년 경희대학교 문리과 대학장 취임 1973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피선 / 제1회 유화개인전 / 제2차 세계시인대회 참석 1974년 중화민국 중국문화대학 중화학술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 수여 1975년 제2회 유화개인전 / 제1회 아시아시인대회에 한국대표 단장으로 참석 1976년 정부시책 평가 교수 취임 / 제3회 유화개인전 / 제3차 세계시인대회에 한국대표 단장으로 참석 / 제4차 세계시인대회 대회장으로 피선 1977년 제4차 유화개인전 / 국제펜시드니대회 참석 1979년 제1회 시화전 1986년 제9차 세계시인대회에 한국대표 단장으로 참석 / 인하대학교 대학원 원장으로 정년퇴직 /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피선 1987년 중앙대학교 객원교수 / 국제펜스위스대회 참석 / 일본 제2회 국제시인대회에 한국대표 단장으로 참석 1988년 제10차 방콕 세계시인대회에 국제위원으로 참석 1989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1998년 경희대학교 학원이사 1999년 캐나다 빅토리아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상훈
1960년 아세아자유문학상 - <밤의 이야기> 1969년 경희대학교문화상 1971년 두보상패(중화민국 신시학회 제정) 1974년 한국시인협회상 - <어머니> 1976년 국민훈장동백장 1986년 국민훈장모란장 1990년 3·1문화상 1992년 대한민국문학대상 1993년 경희대학교대학장금장 / 공로상(문학공간사 제정) 1994년 순수문학상 / 세계시인대회감사패 1996년 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 1997년 5·16문학상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1949) <하루만의 위안>(1950) <패각의 침실>(1952) <인간도고>(1954) <사랑이 가기 전에>(1955) <서울>(1957) <석아화>(1958) <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1958)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1959) <밤의 이야기>(1961) <낮은 목소리로>(1962) <공존의 이유>(1963) <쓸개포도의 비가>(1963)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1964) <내일 어느 자리에서>(1965) <가을은 남은 거에>(1966) <가숙의 램프>(1968) <내 고향 먼 곳에>(1969) <오산 인터체인지>(1971) <별의 시장>(1971) <먼지와 바람 사이>(1972) <어머니>(1973) <남남>(1975) <창 안에 창 밖에>(1976) <딸의 파이프>(1978) <해가 뜨고 해가 지고>(1979) <길은 나를 부르며>(1987) <혼자 가는 길>(1988) <지나가는 길에>(1989) <후회없는 고독>(1990) <찾아가야 할 길>(1991) <낙타의 울음소리>(1992) <타향에 핀 작은 들꽃>(1992) <다는 갈 수 없는 세월>(1992) <잠 잃은 밤에>(1993) <개구리의 명상>(1994) <내일로 가는 밤길에서>(1994) <시간의 속도>(1995) <서로 따로 따로>(1996) <아내의 방>(1997)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1997) <황혼의 노래>(1997) <먼 약속>(1998) <기다림은 아련히>(1998) <따뜻한 슬픔>(1999) <고요한 귀향>(2000) <세월의 이삭>(2001) <남은 세월의 이삭>(2002) 평론집 <슬픔과 기쁨이 있는 곳>(1967) <시인의 편지>(1977) <고백>(1999) 수필집 <시인의 비망록>(1977) <낮달>(1978) <마지막 그리움의 등불>(1986)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1986) <왜 사는가>(1986) <고독과 사색의 창가 에서>(1986) <너와 나의 시간에>(1987) <어머님 방의 등불을 바라보며> (1987) <내일로 가는 길에>(1987) <추억>(1987) <홀로 지다 남은 들꽃 처럼>(1987) <사랑, 그 홀로>(1988) <사랑은 아직도>(1988) <새벽은 꿈을 안고>(1988) <꿈과 사랑, 그리고 내일>(1988) <떠난 세월, 떠난 사람>(1989) <하늘 아래 그 빈자리에(1989) <나의 생애 나의 사상>(1991) <꿈은 너와 나에게>(1991) <시의 오솔길을 가며>(1992) <꿈이 있는 정거장>(1992) <집을 떠난 사람은 길을 안다>(1993) <시인의 편지>(1994) <나의 생애>(1994) <버릴 거 버리고 왔습니다>(1994) <세월은 자란다>(1995) <너를 살며 나를 살며>(1996) <편운재에서의 편지>(1996) <내게 슬픔과 기쁨이 있듯이>(1999) 기타 <101인의 시인>(1961) <길>(1974)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1986) <꿈>(1993) <안개>(1995)
작가의 말
(……) 참으로 나를 스스로 구출하려는 하나의 방법이었으며, 이름 그대로 하나의 스스로의 먼 길의 발견이었다. 어둡고 고정된 개념의 파괴로부터 다시 나의 생존을 이끌어내자는 생각이었다. 조촐한 출판 기념회가 마련되었다. 김기림, 김광균, 장만영, 이봉구, 양병식, 김경린 등이 중국요리집에 모였으며, 나는 그들로부터 백양사에서 간행한 <조선문예사조사>(백철 저)를 선물받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분들은 당대의 당당한 모더니스트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새로운 시의 개척자들, 그 모더니스트들 덕분에 한국문단에 이름을 걸게 된 거다. 우선 멤버가 그러해서 기뻤다. 당당한 사람들이 연약한 나의 시에 울타리가 되어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흐뭇했다. 마음이 푹 가라앉는 걸 실감했다. 하나의 큰 터널을 뚫고 나온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공허했다. 자기 해체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중학교 4학년 시절 머릿속에 넣었던 괴테 말이 떠올랐다. “인간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는 것이다”라는 그 방황의 말이. 실로 방황이 시작된 거다. 물리·화학에서부터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거다. 지금까지 그렇게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려고 결사적으로 고민했던 그 꿈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 거다. 물리 화학으로 무언가 이름을 세우려고 했던 고등사범학교 시절의 그 꿈. (……) 여기까지가 내가 시의 길,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된 과정의 전부이다. 그리고 지금도 항상 문학에 접어들 무렵의 그 불안과 모색과 방황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머물지 않는 동경으로 시의 길을 가고 있다.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서 나의 시집들은 그 시기에 내게 있었던 그 불안, 그 모색, 그 방황,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머물지 않은 동경, 그것들이 같이 동숙하던 고독한 여숙들이라 하겠다. (……) - ‘나의 문학적 고백’, 조병화, <조병화>, 문학사상사, 2002
평론
(……) 많은 길이 있을 수 있다. 그 중 조병화는 가장 자신에게 충실하며 솔직하고 절실한 미학적 접근방법을 택했다. 즉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적 계급인 지식인 자신과 도시 소시민적 고뇌를 진솔하고 호소력 있게 노래하는 방법을 선택했으며, 이 선택은 이후 일생 동안 변함이 없었고, 또한 성공했다. 어느 시인도 조병화를 흉내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대중적 공감력을 따를 수 없었다. 더구나 사회경제사에서 많은 변모를 가져온 1960~70년대 이후의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신흥부르주아 계급이 대두된 이후에도 조병화가 노래한 소시민적 정서의 노래는 여전히 유효했다. 조병화의 시적 기교엔 특이한 비의가 있다. 모더니즘적 감각을 지닌 그는 그 표현방법에서 모더니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적 수학을 바탕삼아 이를 일상생활화하기 때문에 당시의 어느 모더니스트보다도 소시민적 생활 그 자체에 밀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더니즘이니 뭐니 하는 문학이론을 통해 문학수업을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를 통해 시로 접근해갔으며, 이것이 그로 하여금 대중적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오묘한 비의가 되었던 것이다. 지적 기교에 의한 설득이 아니라 정감적인 호소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의 시는 한 시대적 제약을 벗어나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인간소외와 이기주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고독과 인생고에 대한 위로의 형식으로 널리 사랑받을 것이다. (……) 과거와의 단절·외로움·슬픔으로 이어지는 이 시인의 정서는 그 현실적 연계점을 ‘밤’과 ‘창’이라는 모순된 시어에서 찾고 있다. ‘밤’이 어제와의 단절로서의 망각을 상징한다면 ‘창’은 망각 속에서 다시 그리워짐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미래지향성 의미를 지닌다. 이 시집 전편에서 빈도수가 꽤 많은 이런 일련의 술어들-밤, 슬픔, 창-은 그 극적인 정서의 고양과 효과를 위해 ‘비’를 동원하기 일쑤이며, 사실 조병화 시엔 비가 많이 내린다. 즉 시인은 밤과 비를 즐겨 자신의 입장과 심경에 비겨 노래하는 한편, 인위적인 것으로는 그와 대조적으로 창으로 긍정적인 정서를 느끼게 해주는 미래지향성 입장을 나타낸다. (……) 슬픔의 정서를 지고로 삼는 이 시인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며, 지난날에 대한 불행 대신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는 소시민들에게 내일의 행복 역시 보장된 것은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이를 영원히 도피할 수도 없는 처지의 인간이 지닌 삶의 숙명적인 고난을 이 시인이 조심스럽게 영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래에 대한 시인의 이런 자세는 “뒤떨어진 세월의 시인이래서가 아니건만/팽창하는 시절이 두렵다”는 말에 잘 표현된다. (……) 이렇게 한 시대를 앓으면서도 조병화는 그 시대의 전체상보다는 자신의 계층적 입장을 보다 중요시했다. 그러나 동시대의 어느 순수시인보다도 당대적 소시민이 지닌 고뇌의 참모습을 노래하는 데 전력했으며 그 노력은 즉각적인 보답을 받은 셈이다. 물론 대중들이 시인의 시에 만족했던 안 했던 이 시인의 고뇌를 더해주거나 덜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 조병화는 영원히 어떤 속물적인 소시민에게도 만족과 행복을 모르는 교훈을 가르칠 것이며, 어떤 세속적인 만족과 행복 속에서도 방황할 줄 아는 삶의 참모습을 노래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방황하면서도 절망을 앓으며, 슬퍼하면서도 과거를 버릴 용기를 지니고 있고, 두려워하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정서를 노래한다. - ‘영혼의 안식을 위한 소요’, 임헌영, <조병화>, 문학사상사, 2002(……) 이처럼 많은 시를 쓰고 보면 그 작품세계는 자연 이런저런 변화의 무늬로 아롱지지 않을 수 없다. 정도가 그리 심한 것은 아니지만 조병화의 시에서도 우리는 실제로 그런 변화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변화도 뿌리를 캐보면 필경 그쪽으로 귀착되고 마는 일관된 주제를 조병화의 시는 지니고 있다. 위에서 말한 바, 인간의 근원적 고독이 바로 그 주제인 것이다. (……) 그렇게 흘러가는 나그네에게는 정착지가 없듯이 고정된 소유물도 또한 없다. 설령 무엇인가를 지금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때의 임시보관일 뿐 참다운 소유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나그네는 언제나 빈손이다. 임시 보관의 소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집착도 갖지 않는다. (……) 여기서 노래되고 있는 바와 같은 인간관계, 즉 아무리 열고, 아무리 보이고, 아무리 주어도 너와 나의 깊은 외로움이나 노여움은 결국 너와 나를 모르게 할 뿐인 관계는 본질적으로 남남인 것이다. 남남인 인간은 비록 어울려 산다고 해도 혼자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인간이 숙명적으로 타고난 근원적 고독을 여기서 우리는 재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조병화는 이 고독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에 깊이 자맥질해 들어가서 오늘도 표표한 나그네의 삶을 가장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그네인 그가 찾아가는 곳은 앞에서 말한 대로 원숙이다. 그 원숙을 조병화는 또 죽음이라는 ‘순수 허무’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을 삶의 종말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체의 집착을 버린 고독한 나그네 조병화가 추구하는 영원한 꿈의 세계인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자각하고 그 속에 깊이 자맥질해 들어갈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런 꿈을 간직할 수 있다. 그것은 현세적 성취를 초월한 꿈, 죽음의 세계에 이르러서도 거기서 다시 머나먼 원숙으로 향수의 날개를 펴는 꿈인 것이다. - ‘고독한 나그네의 꿈’, 이형기, <조병화>, 문학사상사, 2002
관련도서
<조병화>, 조병화, 문학사상사, 2002 <조병화의 시연구>, 김삼주, 우리글, 2000 <조병화의 문학세계>, 마종기 외, 일지사 1986 <조병화 시 연구>, 조영숙, 경희대 박사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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