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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李殷相)

예술가명
이은상(李殷相)
전공
개요
이은상은 고유한 전통의 시 형식인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하며 시조의 한 유형을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대부분의 작품이 작곡되어 가곡으로 불려질 만큼 전래의 시조형식을 현대적 운율로 소화해냈다. 대체로 다작인 점과 가곡으로 불려지고 있음을 들어 문학적 평가에서 소홀한 듯한 경향도 있으나, <봄처녀>, <가고파>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전적 서정의 계승, <고지가 바로 저긴데>, <동해송> 등에서 이룩한 시조의 현대적 감각에 의한 재현 등으로 현대시조 부흥의 1인자로 지목받고 있다. 1932년에 나온 첫 개인시조집 <노산시조집>은 향수, 감상, 자연예찬 등의 특질로 집약된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 예찬, 조국분단의 아픔, 통일에의 염원, 우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등 개인적 정서보다는 사회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작품들은 <푸른 하늘의 뜻은>과 마지막 작품집인 <기원>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한때 주요한에 이어 두 번째로 양장시조를 실험해 시조의 단형화를 시도한 바 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음수가 많이 늘어나는 경향을 띠었다. 사학자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순례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광복 후에는 문학보다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했다. - 참고 :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생애
경남 마산에서 출생한 이은상은 1918년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에서 수업하다가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 시조 <아버님을 여의고>, <꿈을 깬 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 기자, <신가정>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45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유치 중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광복 후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76년부터 노산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노산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약력
1903년 경남 마산 출생 1914년 마산 창신학교 보통과 졸업 1918년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졸업 · 동교 보통과 교원 1920년 서울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23년 연희전문 수료 /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교원 1926년 일본동경 와세다대학 사학부 청강 1927년 일본동경 동양문고에서 국문학 연구 1931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 1945년 호남신문사 사장 1950년 청구대학교(지금의 영남대학교) ·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59년 충무공이순신장군기념사업회장 / 안중근의사숭모회장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 한글학회 이사 1969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 수여 1972년 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 1974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 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 /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1981년 국정자문위원
상훈
1964년 대한민국예술원문화공로상 1969년 대통령상 1970년 대한민국국민훈장무궁화장 1973년 5·16민족상 예술부문 본상 시집 <노산시조집>(1932) <조국강산>(1954) <노산시문선>(1960) 기타 <조선사화집>(1931) <이충무공일대기>(1946) <탐라기행한라산>(1947) <피어린 육백리>(1962)
작가의 말
나는 유달리 산수(山水)를 즐겨하는 사람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외로운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고향 가까운 산과 물을 찾아다니며 거기 하소연하고 또 거기서 위로를 받았었다. 더구나 일제의 사나운 정치 아래서 가슴에 피가 맺히고 눈물이 고일 적이면 바랑 메고 막대 짚고 바람과 달을 벗하고 나서서 북으로 압록강 상류에서부터 남으로 한라산까지 역내의 명산대천을 두루 밟아 어느 때는 산머리에서 소리쳐 울어도 보고 또 어느 때는 강기슭에서 쓴웃음을 웃어도 보았다. 보고 볼수록 아름다운 조국의 강산! 여기가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기름진 낙원이던가 하고 생각할 적에 고맙고 느꺼워 소맷자락 훌쩍 들고 춤추고 싶다가도 이러한 복지를 남의 손에 빼앗긴 일을 헤아려 보고서는 부끄럽고 분한 생각에 펄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든지 간 곳마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노래’이었다. 반만년의 긴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고 다시 그대로 우리 민족의 현실생활이 벌어져 있는 조국강산이라 저절로 나오는 온갖 노래를 어찌 눌러 둘 수가 있었을 것이랴. (……) 우리는 노래하는 국민이 되어야겠다. 진실로 조국을 사랑할진대 조국의 강산을 노래하는 국민이 되어야겠다. 애국이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제 국토를 사랑하고 제 동포를 사랑하는 그것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 - ‘머리말’, 이은상, <조국강산>, 민족문화사, 1954
평론
시인이나 소설가임을 불문하고, 그 시인이나 그 작가의 전모를 빠짐없이 다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그 작가가 시인의 그릇이 크고 넓으며 유현한 조화를 부리고 있을 때엔 더욱 그렇다. 노산의 세계도 역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만큼 한학자이면서도 사학가요, 동시에 뛰어난 문장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그의 시조를 중심으로 해서 논하는 것까지도 두려운 마음이 든다 하겠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그의 시조만을 주로 논한다 하더라도, 불가피한 경우 말고도 광복 이후의 것은 언급하지 않을 예정이다. 그리고 광복 이전의 것이라도 노산의 모든 시조 하나하나 다 다룰 수 없다는 것도 재언할 필요조차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노산 시조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시조를 읽어보아도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라 하겠다. 그 어떠한 것을 제재로 택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쓰인 낱말 하나하나가 모두 부드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는 뜻이다. 이런 점을 중시한다면 기교파라고 명명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글재주 그것 하나만으로 쓰는 기교파는 물론 아니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체질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 그동안에 노산 시인이 써놓은 시조 740여 수 가운데에서 우선 300수쯤만 추린 것이 <노산 시조집>이라 하면서, 그러나 생각하면 서러운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니, 어느 노래가 마음을 따를 수 있겠는가, 너무도 큰 것은 마음이요, 너무도 작은 것은 노래라는 것을 강조한 내용이다. 아무리 기교가 승하다 하더라도 그 상(想)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과 뜻이 똑같다. 어떠한 느낌이나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글자로 나타내면 본디의 것과는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본디 인생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제대로 된 일도 그리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는 것도 순간이요, 듣는 것도 순간이요, 말하는 것도 순간이요, 그리고 느끼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도 순간이 아니겠는가? (……) <인생>이라는 시조는 앞에서의 논조와는 약간 성질을 달리 하는 것 같지만, 실에 있어선 동궤를 걷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예술이나 문학이 모두 인생과 동행인인 것 같지만, 결국 인생이 먼저 간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완전히 표현했다곤 할 수 없으나, 역시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는 것은 오직 예술이라는 것도 그 속에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이미 노산은 유명을 달리하고 있지만, 그의 예술은, 아니 그의 시조는 지금도 빛나고 앞으로도 영원히 빛날 수 있기 때문이다. (……) 노산은 비단 시조에서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글에서도 자연을 제재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니 자연이 곧 노산이요, 노산이 곧 자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산과 자연과의 교감에 의해서 한덩어리가 된다고 하는 편이 훨씬 더 논리적이다. 이 때에 있어서의 교감이란 종교적인 경지에까지 승화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어느 의미로는 일제의 군화에 의해서 짓밟힌 이 강토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불꽃이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고 할 수도 있다. (……) 이상으로 노산 이은상의 시조에 관해 언급했는데, 이것을 간추려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산은 다정다감한 시인이어서 언제나 이상에 불타고 있었다. 둘째, 따라서 그에게는 꿈과 그리움이 늘 따라다녔다. 그 내용은 고향일 수도 있고, 어버이일 수도 있고, 산촌초목일 수도 있는, 천태만상이라 해도 상관없다. 셋째, 노산에 있어서의 자연은 저마다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넷째, 산을 좋아한 노산은 기행문을 무척 많이 썼다. 이 기행문은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적이나 고찰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다섯째, 그러므로 노산에게 있어서는 자연과 불교와 조국이 한 덩어리가 된다. 여섯째, 역사적인 차원에서 선조들의 위업에 경건하게 머리를 수그리는 한편, 과거나 현재의 잘못에 대해선 격분하기도 한다. 일곱째, 노산 역시 그 나름의 괴로움이 있고 번뇌가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다. 이런 뜻으로 볼 때엔 그는 분명 선지식이다. (……) - ‘노산 이은상 시조론’, 김상선, <국어국문학> 93권 1호, 1985년
관련도서
<한국현대시조 작가론>, 김제현 외, 태학사, 2002 <노산의 문학과 인간>, 노산문학회편찬위원회 편, 횃불사, 1983 <초기 현대시조 연구: 육당, 가람, 노산, 조운을 중심으로>, 이민영, 우석대 박사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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