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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柳致環)

예술가명
유치환(柳致環)
전공
개요
유치환의 시는 존재의 본질적인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과 허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때, 죽음과 허무는 시인의 정신적 편력과 결부되어 다양한 의미를 지닌 채 시적으로 변주된다. 한편으로는 일제 말기의 극한 상황이라는 역사적인 차원 속에서 자학적 분노와 야성적 생명의지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숙명적인 조건인 죽음 속에서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 의지와 애수라는 양가적인 감정은 대표작 <깃발>에 잘 나타난 바 있다. 깃발은 ‘푸른 해원’으로 표상되는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의지인 동시에 ‘애수’, ‘마음’을 만남으로써 이상향에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감상적인 마음인 것이다. 40여 년에 걸친 그의 시작은 한결같이 남성적 어조로 일관해 생활과 자연, 애련과 의지 등을 노래하고 있다. 생명의 긍정에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출발한 그의 시는 범신론적 자연애로 통하는 열애가 그 바탕을 이루며, 그 바탕 위에서 한편으로는 동양적인 허정(虛靜), 무위의 세계를 추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허무를 강인한 원시적 의지로 초극하고 있다. - 참고: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생애
경남 충무에서 출생한 유치환은 일본 도요야마중학(豊山中學)에서 4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여 동래고보를 졸업했다. 1927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가 1년 만에 중퇴했다. 일본 도요야마중학교 재학 시절, 극작가인 형 치진이 중심이 된 동인지 <토성>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시단을 풍미하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지용의 시에서 감동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31년 12월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1937년에는 동인지 <생리>를 주재하였다. 1940년 4월 만주로 건너갔다가 1946년 6월 귀국하여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했고, 청년문학가협회, 진주시인협회의 <등불> 동인, 대구의 <죽순> 동인 등으로 참가했다. 6·25 전쟁 중에 부산에서 문총구국대를 조직하고 육군에 종군했다. 1952년 대구의 <시와 시론> 동인에 참가했으며, 1955년에는 경남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동인지 <청맥>을 주재하기도 했다. 서울시문화상·예술원공로상·부산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펴낸 이래 <생명의 서>, <울릉도>, <청령일기> 등 10권이 넘는 시집을 간행하였고, 한국전쟁 종군 경험을 담은 <보병과 더불어>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약력
1908년 경남 충무 출생 1928년 연희전문 1년 중퇴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하며 등단 1937년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장응두·최상규 등과 함께 발행 1945년 통영문화협회 조직 /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 1946년 청년문학가협회 회장 1950년 문총구국대 조직 / 육군제3사단에 종군 1954년 안의중학교 교장 취임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55년 경주고등학교 교장 취임 1957년 한국시인협회 초대회장 피선 1959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재선 1961년 경주여자중학교 교장 취임 1962년 대구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 1964년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 1966년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전임
상훈
1947년 청년문학가협회시인상 1950년 서울시문화상 1958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64년 부산시문화상 1956년 경북문화상 시집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1949)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류나무와 남풍>(1964)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1963) <나의 창에 마지막 겨울달빛이>(1978)
작가의 말
(……) 내게 있어서는 내가 소산한 것들을 문학이라 이름 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어디까지나 높은 양식과 심오한 관조에서 재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서는 언제나 생명의 목마른 절규 같은 데서 자연 발생한 심히 조잡한 문학 이전의 어떤 소재 같은 것에 불과한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이 내면의 연소의 동력으로 인해서 오늘까지 중앙의 문단과는 외떨어져 있으면서도 능히 오늘 와서 문학이라 불러지는 나의 길을 자자(孜孜)히 걸어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 사실 나는 해방 이전에는 문단적 교우나 교섭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한때 미염(米鹽)을 벌이하던 화신(和信) 관계로 부산에서 조벽암(趙碧岩)과 접촉하던 외에는, 간간이 서울 가면 주배를 나눈 이로서 소운(素雲), 지용(芝溶), 이상(李箱) 제씨가 겨우 기억에 남아 있을 뿐, 따라서 현재 내가 가진 문단의 선배 동배의 교분은 거개가 해방 후 비로소 맺어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나의 시작 노력에 있어서 무엇보다 무상의 보람과 감명이 되는 것은, 나의 시 독자 가운데서 나의 작품을 통하여 항상 지향하는 내면을 나와 같이 호흡하며 격려해주며 주시해주는 한 은혜를 가졌다는 점이다. 인기 작가 되는 분은 수많은 애독자의 환호에 떠받혀 있음이 오히려 무괴하겠지만, 나 같은 고지식한 시인에게는 단 한 사람 이러한 애독자가 수만의 팬과도 바꾸지 못할 귀하고 중함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 - ‘청마시초 무렵’, 유치환, <청마시집: 유치환 시선집>, 문학세계사, 1988
평론
(……) 청마는 도처에서 “나는 시인이 아니다”라고 못박아 놓았다. 시를 쓰면서도 시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애련에 물드는 것, 그것을 치욕이라고 철저히 거부하며 비정의 바위의 생리를 닮으려 외치면서도 저 숱한 애정에 철저히 물들려는 연가는 무엇인가. 섬뜩하리만큼 가혹한 자학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이었을까. 허무 의지로서의 자연의 비정적 질서, 그 섭리에서 어떻게 구원의 가능성이 나타날 수 있었던가. (……) 이육사와 청마의 시가 거의 비슷한 발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들의 정신의 가열성이 동일한 차원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 파악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육사쪽보다 청마쪽은 또 다른 의미에서 문제점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온몸으로 저항에 임한다는 그 엄청난 모험에 대한 평가 단위는 이미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온몸으로 저항에 임하지 않더라도 그 온몸의 행동성에 대치될 수 있는 등가물을 획득한다는 것 역시 평가 단위를 절하는 경지를 열 수는 있는 법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회한 없는 삶의 자세이다. 행동으로, 신명으로 지향해야 할 단계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한 것만큼의 정신적 대치물을 획득한다는 것은 자신의 간을 쪼아먹는 엄청난 모험일 수 있는 것이다. (……) 북만주에로의 탈출,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나는 이 대목에서 강렬한 역사 의식을 감지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청마는 강렬한 원시적 생명력 일변도로 향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신명을 역사 속에 던지지 못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이 콤플렉스를 청마는 누구보다도 강렬히 의식했으리라.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청마는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까지 닿은 궁극으로 확대하려 시도한 것이다. 이 길만이 신명을 던지지 못한 것, 그 회한에 대한 보상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명을 가장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는 상태는 무엇인가. 생명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는 무엇인가를 청마는 무엇보다 먼저 모색해야 했으리라. 그것은 원시적 상태일 것이다. 고쳐 말하면, 비정적 세계와 생명이 닿은 그런 상황이리라. 가장 비생명적인 곳에 생명을 대치시킬 때, 비로소 선명히 생명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다. 그 비정의 세계가 외관상의 북만, 그 황량한 들판이었다. (……) 청마의 시는 거의 진술에 의거하고 있다. 그는 시론이나 형태 혹은 기법에 대한 고려가 거의 없음이 주지되어 있다. 그의 사유가 한국 시사에선 원래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유달리 돋보였을 뿐이다. 서구 시학에 외면함으로써 그대로의 자세를 지켰을 따름이다. 나는 그의 북만 탈출의 체험에서 빚어진 자학의 가혹한 시련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설사 그것이 많이도 수사법의 차원이지만 그것은 정신의 가열성에서 분명히 하나의 고처(高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처로서의 수사법이 유지될 수 있었음은 신명을 던지지 못한 것에 대한 자학으로서의 긴장의 지속이 가능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러한 콤플렉스의 긴장이 제거된 해방 후의 시에 대해서는 별다른 성과를 평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시인이 아니라고 자처했을 때 그는 참된 시인이었다. 그 후로 그는 너무나 시인이고자 노력하였다. 너무나 시인이고자 노력하려면 시학으로 향한 관심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한 시학에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도 시인이고자 할 때는 꼭 같은 수사법의 반복에 전력하기 쉬우리라. 성인이 된 후에도 시인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기를 모험해야 하리라는 것이 청마가 던지는 문제점이라면, 우리가 갖는 한국 시사에의 비판은 당연히 가혹해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유치환론 : 허무의지와 수사학’, 김윤식,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정음사, 1984
관련도서
<청마유치환전집>, 유치환, 정음사, 1984 <유치환: 휴머니즘과 실존 그리고 허무의 의지>, 오세영, 건국대 출판부, 2000 <유치환>, 박철석 편, 문학세계사, 1999 <청마시집: 유치환 시선집>, 유치환, 문학세계사, 1988 <유치환 시의 구조 연구>, 강정화, 효성가톨릭대 박사논문, 1998 <유치환 시 연구>, 박해수, 효성가톨릭대 박사논문, 1996 <유치환의 시 연구: 아나키즘과 세계인식의 관련양상을 중심으로>, 정대호, 경북대 박사논문, 1996 <유치환 시의 효용론적 연구>, 이혜선, 세종대 박사논문, 1996 <한국 현대시의 공간 구조 연구: 청마와 육사, 김춘수와 김수영을 중심으로>, 김광엽, 서강대 박사논문, 1994 <청마 유치환 연구>, 서정학, 충남대 박사논문, 1992 <청마 시의 심상 구조 연구>, 김예호, 연세대 박사논문, 1991 <유치환 연구>, 조상기, 한양대 박사논문, 1990 <한국 현대시의 인간주의 연구: 유치환의 시를 중심으로>, 방인태, 서울대 박사논문, 1990 <유치환 시 연구>, 박재승, 인하대 박사논문, 1990
관련사이트
통영시 청마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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