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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초(申石艸)

예술가명
신석초(申石艸)
전공
개요
신석초의 시세계를 살펴보면, 카프의식과는 극단적으로 상치되는 의식세계를 만나게 된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는 프랑스 상징주의, 그리고 발레리의 순수시 운동과 이백, 두보, 나아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은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제1시집 <석초시집>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라지는 불’의 세계, 즉 허무의 세계이다. 대체로 그가 가을 황혼, 붉은 바위, 단풍을 주로 노래한 것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제2시집 <석초시선>에 이르면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장시 <바라춤>을 통하여 새로운 시적 질서를 획득한다. 이 시의 리듬은 고시조의 운율을 원용한 것으로 발레리의 순수에 대한 경도가 마침내 동양정신과 만나면서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고 있다. 이때 동양정신은 노장사상을 의미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 향가·여요·시조의 리듬을 답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제3시집 <폭풍의 노래>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성은 불의 이미지로, 그것은 일상의 세계에 스며있는 한결 누그러진 불이다. 그러나 제4시집 <수유동운>에서 이러한 일상성 지향은 마침내 은거의 형식으로 고착된다. 즉, 상상력의 어떤 변증법적 울림이 없는 정신의 고요만이 나타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그가 영향받은 서구 순수시론이나 노장사상이란 현실적 요소를 배제하거나, 그러한 요소가 함축하는 삶의 공리성을 전적으로 고화시키려는 정신의 모험이다. 따라서 그의 시세계는 이러한 정신의 모험을 기본율로 한다. 대체로 과작에 속하는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 45연 427행으로 된 장시 <바라춤>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데, 이 시는 이승의 내적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서 동양 정신과 서구시적 요소의 이중적인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참고: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한국근대문인대사전>, 권영민 편, 아세아문화사, 1990
생애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한 신석초는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으로 공부하다가 192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병으로 중퇴하였다.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으며,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대학 철학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프에 가담하여 신유인이라는 이름으로 평론활동을 한 바 있다. 알려진 바로는 1931년 일본 호오세이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당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카프에 가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카프의 맹원으로서 당시 카프의 강경노선을 공격한 <문학창작의 고정화에 항(抗)하여>를 발표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카프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크게 일어났다. 그가 박영희의 전향선언과 함께 카프에 탈퇴원을 제출한 것은 1933년이다. 1935년 무렵 정인보의 소개로 이육사를 알게 되었고 그와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 시 <호접>, <무녀의 춤>, <파초>, <가야금>, <기>, 평론 <이상과 능력의 문제> 등을 발표했다. 1935년에는 <신조선> 편집일을 맡아보았고, 1948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1957년에는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에 취임하였다. 그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국시인협회회장,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약력
1909년 충남 서천 출생 1925년 경성제일고보 입학 1928년 신병으로 제일고보 자퇴 1931년 일본 호세이대학 철학과 청강생 자격으로 입학, 카프의 맹원으로 활동 / <중앙일보>에 유인(唯仁)이란 필명으로 <문학창작의 고정화에 항하여>를 발표 1933년 박영희와 함께 카프 탈퇴 1935년 위당 정인보 선생의 소개로 이육사와 교유하며 <신조선> 편집에 종사, <신조선>에 석초(石初)란 필명으로 <비취단장>·<밀도를 준다>, 에세이 <햄릿>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 본격화 1937년 서정주, 윤곤강, 이육사 등과 함께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 1948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피선 1951년 화양면장 부임 1952년 지방자치법에 의해 화양면장에 재추대되어 부임 1954년 한산중학교 이사 피촉 1956년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취임 1957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 196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 출강 1962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1965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회장
상훈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상 - <바라춤> 시집 <석초시집>(1946) <바라춤>(1959) <폭풍의 노래>(1970) <처용은 말한다>(1974) <수유동운>(1974)
작가의 말
(……) 내가 한 편의 시작품을 이루었다고 하면 그에는 나의 소망, 또는 몇 권의 책에서 얻은 조금씩의 영양이 작용한 셈이다. 나는 생래로 순수한 한국적인 가정-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습이 어디보다도 완고했기 때문이다-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처음에 한학적인 학습, 특히 시에 있어서는 시전(詩傳)과 당시(唐詩)로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에 서구의 시에 접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다시 되돌아와 우리의 시가인 향가나 고려가사나 시조 등을 섭렵하였다. 이러한 나의 경험은 나의 작품 가운데에 일종의 정신의 혼합물을 담아온 셈이다. 한편에는 동양적인, 한국적인 어느 것, 또 한편에는 서구적인 것, 그리고 대별하여 두 개의 정신적 패턴은 서로 상이한 얼굴을 하고 상극하고 힐항(詰抗)하여 하나의 오뇌하는 야누스의 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정신의 이 창해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려 하나 좀처럼 나르시스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처용 시 가운데서 나는 이 같은 자기의 상모(相貌)를 나타낸 셈이다. 그러나 내가 못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시가에서 전형적인 고전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오해되기 쉬운 말이다. 우리 시에는 운율의 고전적인 제약성도 규격도 없다. 시조가 하나의 정형을 보여주고는 있으나 너무 단시형이기 때문에 적용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일은 우리 시작에 새로운 영역을 남겨놓고 있는 것만 같이 생각된다. - ‘나의 시 정신과 방법’, 신석초, <바라춤>, 융성출판, 1985
평론
(……) 시인연구의 경우, 작품보다 시인의 삶에 큰 비중을 둘 때 그것은 한 인간의 궤적을 그려낸 인물 연구에 그치기 쉽다. 반면 작품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에 공력을 기울인다면 작품은 삶과 유리된 언어적 체계로 대상화할 위험성이 간혹 존재한다. 작품은, 작가의 의식과 작품의 내재적 구조가 상호 교호하고 침투하는 것을 전제할 때 의의가 있으며 마침내 문학사라는 확대된 의미망 속에 정당하게 편입될 수 있다. 신석초는 대가급 시인이라고 지칭되면서도 명성만큼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 설령 그를 연구했어도 기존의 대부분의 논문들은 당연히 작가와 작품연구에 전제되어야 하는 문헌학적 전제를 소홀히 한 채 작품과 작가를 논했기에 진정한 작가론이나 작품론과는 거리가 멀었던게 사실이다. 혹은 이를 염두에 두었어도 보다 정밀한 연구에는 미흡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이번 연구는 작가연구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실증적 태도를 견지하여 작가와 작품을 연구했다.(……) 이번 연구 역시 실증적 연구를 채택하여 석초의 시세계를 총괄적으로 조망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그의 시는 크게 세 단계의 통시적인 구조와 원리로 전개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첫째 단계는 ‘고통의 삶과 신화적 회생’으로서의 초기에 해당한다. <신조선>이나 <문장> 계통의 잡지에 시나 에세이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던 시기다. 조선정신을 표방한 정인보의 영향 등으로 고전주의적 색채가 강했다. 역사적 기록이나 유물로 확인되는 신라와 백제의 찬란한 문화에 대한 동경과 회고는 국가상실의 위기를 자위하는 한 방편이기도 했다. 파시즘이 전세계를 휩쓴 음울한 시기, 가속화되는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정책으로 한국의 많은 문인들이 침묵하거나, 자폐적 세계로 침몰했다. 지식인들은 조선의 얼을 학문적으로 접근했고 고전주의를 표방하여 묵시적으로 일본에 대항했다. 그러나 1940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그리고 1941년 <문장>, <인문평론> 등의 폐간으로 문인들은 그나마 발표할 지면마저 박탈당했다. 암흑의 시기였다. 신석초도 당시의 현실을 무덤으로 묘사하여 존재론적 위기를 표현했다. 그러나 해방을 맞으면서 실존적 위기는 상승하는 빛으로 전환했다. 희망은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으로 형상화되고, 칠흑 같은 밤도 여명에 의해 물러났다. <바라춤>에 오면 새롭게 재생하며 공동체적 유대와 사회적 연계를 희망했다. 둘째 단계는 ‘비밀한 사랑, 타오르는 정신’으로서 중기에 해당한다. 중기에 오면 그의 시는 피상적인 관념어나 생소한 어휘들이 많이 배제된다. 시행 역시 단축되면서 절제를 통한 언어의 조탁에 노력한다. 소재로도 주변적이고 일상적 생활에서 많이 취했다.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생활이 많이 안정된 탓에 시에서도 참신한 감각이 돋보인다. 사회적으로는 근대화 운동이 전개되고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그의 시도 희망찬 미래를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더구나 여성과의 우연한 사랑에서 야기되는 환희를, 짧고 경쾌한 작품들을 통해 많이 노래했다. 불현듯 찾은 사랑과 만족은 그가 사후 발표할 의도로 발표를 꺼린 <비가집>의 시편들 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여성과의 사랑은 오히려 늙어가는 자신을 쓸쓸하게 반추하게 했을 뿐이다. 이후 이러한 고적한 심사는 조락하는 가을을 배경으로 지는 잎으로 비유된다. 그러나 그는 다시금 반전을 시도했다. 여명의 시간, 비상의 날개짓을 통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나타냈다. 셋째 단계는 ‘꽃섬’과 ‘우주적 합일’로서 후기시의 세계를 일컫는다. 삶을 재충전하자 비로소 사회적 모순에 눈을 뜨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분단 조국의 불구적 상태를 지양하여 통일을 기원하는 작품이 활발히 창작될 정도로 소재의 폭이 확대됐다. 통일된 조국의 미래를, 뻗은 ‘길’로 형상화하면서 ‘공간의 시간화’를 도모했다. 그의 현실관은 민족공동체로 확대되지만, 그러나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어쩔 수 없이 노정했다. 통일은 구호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구체적 실천이 결여된 당위적인 외침은 공허한 만큼 허망하다. 따라서 현실은 관념화되고 이상화된다. 마침내 ‘꽃섬’의 이상적 공간을 설정하여 그곳을 추구하는 단계로 비약했다. 바다에 떠 있는 ‘꽃섬’은 각(覺)이 완성되는 공간이다. ‘꽃섬’은 연꽃으로 비유되는 것처럼 불교적 상상력에 의해 해탈을 달성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신석초는 ‘꽃섬’에 안착하고 크낙한 우주공간에 자신을 투신함으로써 대자연에 합일했다. 그러나 이는 시의 죽음을 선언하는 또 다른 목소리이다. 불교적 상상력에 의해 가능한 ‘꽃섬’에의 정주는 역설적으로 언어도단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종착지는 ‘꽃섬’이고 따라서 그의 시는 더 이상 전진을 멈추었다. - ‘시의 지속성과 변이양상’, 조용훈, <신석초 연구>, 역락, 2001
관련도서
<신석초 전집>, 신석초, 융성출판사, 1985 <신석초 연구>, 조용훈, 역락, 2001 <충남 작고 시인 연구>, 한국문인협회충남지회 편, 한국문인협회충남지회, 1997 <한국현대시인연구>, 이성교, 태학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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