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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도공사

작품명
하수도공사
저자
박화성(朴花城)
구분
1930년대
개요
1932년 5월 <동광>에 발표한 박화성의 단편소설. 1930년대 날품노동자들의 착취상태를 잘 형상화한 박화성의 대표 노동소설이다. 박화성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낙관적 결말을 맺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내용
실업노동자를 구제할 목적으로 하수도공사를 시작한 부청에서는 중정이라는 사람에게 그 일을 청부한다. 중정은 전주(錢主)에게 돈을 꾸어 공사액의 일부를 부청에 납입하고 자신의 뒷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한다. 한편 전주의 서기인 등촌이 농간을 부려, 돈줄이 막힌 중정은 노동자의 삯을 주지 못하고 일은 진척되지 않는다. 이 소식을 들은 부청에서는 계약을 해약하려 하고, 노동자들은 밀린 노임을 받기 위해 동맹파업을 벌인다. 노무자 대표로 선출된 ‘서동권’은 유창한 일본말과 합리적 언술로 임금지불을 약속받는다. 동권은 집안이 어려워져 상급학교를 중퇴하고 동경에서 고학을 하며 ‘정’이라는 지도자를 만나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그와 함께 귀국한 전력의 소유자다. 계모의 닦달 때문에 하수도공사장에 다니기 시작한 그는 어릴 때부터 동무인 융희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임금지불은 계속 연기되고, 겨우 임금을 받게 되지만, 중정을 이은 청부계약자는 더 교묘한 방법으로 노동자를 착취한다. 앞장서서 이의 시정과 보상을 요구하던 동권은 감독의 미움을 받게 되지만, 노동자들에게 계급적 지식을 전파하는 데 더욱 힘쓴다. 그러던 어느날 정이 검거되고 하수도공사도 마무리된다. 융희마저 부모가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 한다. 동권은 융희에게 정세와 대의 때문에 결혼하지 못할 것이므로 그녀의 길을 가라고 충고하고 헤어진다. 동권은 떠나기로 결심하고, 감옥에 갇힌 정을 향해 믿을 수 있는 동지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저자
박화성(朴花城)
생애(1904~1988)
본명은 경순(景順), 호는 소영(素影). 전남 목포 출생. 숙명여고 졸업 후 1926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여자대학 영문과를 중퇴했다. 한국문인협회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여류문인회 초대회장, 예술원 회원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문단 활동을 하였다. 목포시문화상, 한국문학상, 예술원상, 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추석전야>로 등단하였고 <하수도공사>(1932)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편 <백화>(1932), <북국의 여명>(1933)을 비롯하여 <비탈>(1933), <논 갈 때>·<홍수전후>(1934), <한귀>·<중굿날>·<불가사리>(1935), <춘소(春宵)>·<고향없는 사람들>(1936) 등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주로 빈궁을 소재로 강렬한 이념과 사상성을 보여준 작품들로서 카프와 직접적인 연관없이 동반자적 내지는 경향적인 소설 성향을 나타냈다. 1940년 절필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문학활동을 시작했는데, 1950년대 초까지 <검정사포>(1945), <봄안개>(1946), <광풍 속에서>(1948) 등 단편 위주의 작품을 발표하다가 1955년부터 장편소설 창작에 주력했다. <고개를 넘으면>(1955), <벼랑에 피는 꽃>(1957), <내일의 태양>(1958), <창공에 그리다>(1960), <너와 나의 합창>(1962) 등을 신문에 연재하였다. 박화성의 작품은 광복 전후를 불문하고 그 바탕에 일관되게 현실고발적인 면이 유지되지만, 특히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소설들은 사회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부자와 빈자, 지주와 소작인, 강자와 약자 등 계급적 대립관계의 모순을 포착하여 궁핍의 원인을 해명해 보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급하고 도식적인 저항성을 표면에 드러내는 일 없이 섬세하면서 박진감 있는 문장을 바탕으로 현실을 꿰뚫어보는 수작들을 발표하였다.
리뷰
(……) <하수도공사>는 작가의 고향 목표에서 유달산록을 잘라 대규모의 하수도를 건설하는 공사를 취재하여 쓴 단편이다. 이 공사는 실업자 구제의 명목으로 실시되는 것이었으나 청부업자의 농간으로 공사경비의 4할은 정부업자의 포켓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로 공사를 하다보니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을 고발한 것이다. 당초 약속했던 임금이 깎이었을 뿐 아니라 임금의 지급조차 석 달이 밀려 삼백 명 노동자는 격분하여 경찰서로 몰려간다. 이들 노동자들의 지도자격인 동권은 상업학교를 중퇴한 후 동경에 가 거기서 선배인 정이라는 지도자를 만나 그로부터 지도를 받고 주의서적을 탐독하다가 2년 만에 정의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동경으로 떠나기 전부터 기울기만 하던 동권의 집 가세는 이제 “오직 목수인” 아버지의 날품팔이만으로 호구하는 형편이 되어 있어 동권은 할 수 없이 노동판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노동자들은 밀린 임금을 받는데 정의 지도와 동권의 활약이 컸음은 물론이다. 장마비가 계속되어 일터에 나갈 수 없을 때 동권은 노동자들의 한바[飯場]로 가서 알아듣기 쉬운 말로 잉여가치의 이야기도 하고 계급적 초등지식을 넣어주거나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할 때 “그러기에 그렇게 한탄들만 할 것이 아니라 당신들도 생각이 있어야 한단 말이요” 하고 일러주기도 한다. <하수도공사>의 인물구조는 마치 사제관계의 고리처럼 보인다. 동경에서 사회과학 연구를 하다가 귀향한 정이라는 지도적 인물이 동권과 사상적 계보에서 사제관계로 변모했고, 동권과 노동자들의 관계도 동료에서 사제관계로 변화되며, 동권과 융희의 연인관계도 사제관계로 된다. 여동생 희순과 동권의 관계 역시 사제관계 형태가 된다. 사제관계라 이름할 수 있는 이러한 인물구조란 지도하는 내용의 절대성을 전제로 한다. 잉여가치, 계급적 초보지식 등과 부하린, 레닌, 막츠 등의 이름에서 이 지도내용이 마르크시즘인 것을 알아차리게 되나 이 지도내용은 동권이의 행위를 통해서 그 성격이 보다 선명해진다. 작품 첫 부분, 동권이가 일인 경찰서장을 만날 때, “통역을 통하여 말을 하게 되는 자리인지라 서동권이는 속으로 합당치 못하게 생각하였다. 서장이 자기 동무들에게는 하대하는 말을 쓰고 중정대리에게는 경어를 사용하는 것이 대단히 비위에 거슬렸다”고 하는 데서 조선인을 하대하는 일인서장에게 분대하는 것이라든지, 가난하고 무력한 노동자들에게 보이는 친화감 등에서 항일 저항의식과 반부르주아적 의식을 살펴보게 된다. 더구나 몇 차례 격문사건으로 정이 체포, 입감된다든가 이 격문사건에 자신을 참여시키지 않았음을 섭섭하게 여긴 동권이 고향을 떠나 역시 당당한 일꾼이 되어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맥락에서, 이들이 식민지 현실을 부정하고 동시에 바람직한 현실로 이끌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과, 이에 대한 확신이 절대라고 할 만큼 주저가 없음을 인지하게 된다. 따라서 현실과 주인공의, 즉 자아와 세계 간의 대립과 갈등이 이미 끝난 데서 소설은 시작되고 주어진 해답을 전수하고 실천하는 방식으로 스토리는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 동권이, 지도자 정이 갇혀 있는 감옥을 바라보면서 믿을 수 있는 동지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주먹을 들고 맹세하거나, 사랑보다 일이 중하여서 융희를 떨치고 떠나가는 데서 이 미래에의 낙관적 확신은 더욱 강조되고 확고해진다. 이 <하수도공사>는 당시 “금년도의 모뉴멘탈한 작이라고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고평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지금 O치적으로 사상적으로 대중을 기O하는 소위 궁민OO사업을 취급하고 어느 정도까지 이에 대한 대중의 O쟁을 표현한 까닭”이며, “일제에 대한 싸움, 혹은 궁핍에 대한 싸움은 이 문제적 개인이 자각되지 않은 개인을 충격함으로서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하나의 전형으로 보여준 작품이 바로 <하수도공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대각선 기관을 쟁의의 중재로 나서게 한 것, 그것에 의하여 해결되게 한 것에 청부제도의 기만성과 책임 회피의 야바위를 철저히 폭로하지 못한 것”이 한계로 지적되듯이, <하수도공사>는 여성작가가 지닐 수 있는 체험의 한계와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독특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 - ‘현실과 이념 및 창작방법’, 서정자, <박화성 문학전집>, 푸른사상사, 2004
작가의 말
(……) 맨 첫 번으로 활자화한 것을 처녀작(處女作)이라고 한다면 불가불 <추석전야>를 들 수밖에 없으나, 그보다도 한 해 먼저 쓴 것은 <팔삭동(八朔童)>이라는 단편이었다. (……) 다음이 <추석전야>인데, 이것은 열아홉 살 때 여름에 쓴 것이다. 당시에 내 고향에 방직공장이라는 것이 최초로 세워지고 많은 여성들이(처녀와 기혼자들이) 여직공으로 들어갔다. 나는 남매를 가진 불우하나 건실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고 공장의 감독과 집주인을 상대역으로 하여서 짤막한 얘기로 엮었다. C씨는 그것을 춘원선생에게 보였고, 그는 자기가 주재하는 <조선문단>지에 실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바로 내 앞서 임영빈 씨와 이기영 씨가 추천을 받았고, 나와 함께 한모(韓某) 씨의 <그날밤>이 추천을 받아, 이사람들은 왜 밤만 가지고들 야단이냐고 하던 농담을 들은 생각이 난다. 그때 김기진 씨라는 평론가가 그달호의 창작평을 했는데 자세히는 잊었지만 (……) “오직 박화성 작의 <추석전야>는 그 의도의 건전함으로나 착상의 묵직함으로나 필치의 유려함으로 보아 치기(稚氣)만 제하면 다 찬양할 만하다”고 했다. (……) 몇 년 후에 나는 <추석전야>를 읽고 과연 그가 지적한 그 ‘치기’를 절실히 동감했다. 그러기에 그저 처녀작이라는 첫정만 들었을 뿐 단편집에 수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읽어볼 기회마저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고는 이내 유학이라고 갔고, 그 기간중에 장편 <백화(白花)>를 집필하게 되어 40년간을 원고지와 씨름하다가 1931년에 <백화>가 동아일보에 발표되었으니 이것이 첫 번째의 장편소설이요, 동시에 <동광>지 창간호의 청탁으로 두 번째의 단편을 쓴 것이 <하수도공사>이었다. 그때 내 고향에 전무후무한 일대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유달산록(儒達山麓)을 잘라서 길고 넓고 깊은 하수도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것은 일인들이 부청(府廳)과의 계약으로 청부를 맡아 준공하기로 작정한 것인데, 표면의 목적이란 실업자 구제에 있었다. 그러나 청부업자들은 타지에서도 모여든 삼사백 명의 노동자들을 계약금의 반액으로만 부려먹기로 했다. 즉 임금의 절반씩을 착취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 공사의 암흑면(暗黑面)을 캐고자 노동자들과 개인접촉도 하고 그들의 한바[飯場]에도 드나들며 흑막을 들추어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그때 27세의 가정주부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사십 장에 불과했던 <추석전야>에 비하여 이것은 이백 장이 넘는 긴 얘기로서 꽤 복잡하고 대담하게 현장을 묘파한 작품이었다. 그때 춘원도 퍽 심각한 평을 주었고 독자들의 반응도 큰 것이어서 나는 이것을 딴 의미에서의 처녀작이라고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추석전야>나 <하수도공사>가 다 자본주 대 노동자의 항쟁기로서 첫번 출발부터가 계급의식을 무시하지 않았던 모양이요, 이 의식은 줄곧 그후의 작품에도 작용하여 언제나 지주 대 소작인, 부력 대 빈곤, 강자 대 약자에서 그 후자의 편에 서 있는 작자를 발견하게 되는 까닭으로 한때 동반자적이나 경향적 색채가 짙은 작가라는 평이 내렸는지도 모른다. (……) - ‘나의 처녀작·내가 고른 대표작: 약자의 편에 서서’, 박화성, <현대문학>, 1964년 8월호
관련도서
<박화성 문학전집>, 서정자 편, 푸른사상사, 2004 <박화성 소설 연구>, 변신원, 국학자료원, 2001 ‘동반자 작가가 본 빈궁과 여성의 현실: 박화성론’, 변신원, <페미니즘과 소설비평: 근대편>, 한길사, 1995 ‘피와 땀으로 이룬 창작의 운하: 박화성론’, 최일수, <한국문학>, 1988년 3월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한국문학명작사전>, 임헌영·김재용, 한길사, 1994
연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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