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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제1장

작품명
제1과 제1장
저자
이무영(李無影)
구분
1930년대
개요
1939년 10월 <인문평론> 1호에 발표된 이무영의 단편소설. 농촌을 주제로 한 장편의 서곡으로 발표, 속편은 <흙의 노예>(1940)이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자 신문기자였던 수택이 농촌으로 돌아와 아버지 김영감의 농민상에 동화되어가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무영이 신문기자를 그만두고 군포로 낙향해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창작에 임할 당시의 작품으로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은 도시의 이해타산과 몰인정을 모르는 농민의 생활태도를 찬양하는 전원 취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빈곤한 형편을 참고 견디는 덕성을 숙명인 듯이 다루고 있다. 주인공의 불분명한 귀농동기, 김영감이라는 농민상의 지나친 부각, 흙에 대한 무조건적 귀소성향, 순응 등은 1930년대 후반이라는 현실 속에서 한계를 갖는 것이 분명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소설가로서 작품을 쓰기 위해 농촌을 택해 간 작가의 직접적 체험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귀농한 지식인과 농촌토박이 김영감과의 성격대비가 특출하며, 한국농민의 전통적 윤리관을 형상화해, 전원파 농민문학에 기여했다.
내용
수택일가는 고향으로 향하고 있다. ‘수택’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찍이 도회로 유학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가와 신문기자로 활약해왔다. 수택은 원래 농촌을 싫어한 사람이다. 자기 아버지의 흙투성이가 되어 사는 꼴을 경멸하였던 그가 도시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농촌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고달프기만 할 뿐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기자생활을 하며 본래의 소망이던 소설도 써지지가 않았다. 흙냄새가 그리워졌고, 공부를 마치면 시골에서 같이 농사나 짓자던 아버지 말씀이 구원처럼 생각되었다. 드디어 신문사를 사직하고 낙향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그의 귀향을 반기며 농삿거리를 주고 농사일을 가르친다. 아버지는 아들 내외가 대처 사람인 체하는 것이 못마땅하고, 수택은 수택대로 시골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다. 차차 농사일에 보람을 느껴가던 수택은 드디어 40석을 추수하였다. 그런데 소작료, 비료대, 장리변, 지세 등을 떼고 남은 것은 여남은 섬. 분노를 참고 있는데, 아버지는 그것으로 내년까지 살아갈 궁리를 하고 있다. 수택은 남은 볏짐을 나르다가 짐이 겨워 코피를 쏟고, 김영감은 도우려는 동리 사람을 제지하며 “제 손으로 진 제 곡식을 못 져다 먹는 것이 있단 말인가!”하고 소리친다.
저자
이무영(李無影)
생애(1908~1960)
본명은 갑용(甲龍), 아명은 용구(龍九). 충북 음성 출생. 휘문보고를 중퇴한 후 1925년 일본 세이조중학(成城中學)에서 수학했다. 재학 중 일본작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의 문하에서 4년간 작가수업을 받았다. 1929년 귀국하여 소학교 교원, 출판사 사원, 잡지사 기자 등의 직업을 거쳤다. 1932년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가입하였고 1933년에는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4년 동아일보사의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였으며 1936년에는 이흡(李洽)과 <조선문학>을 창간, 주재하였다. 1939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군포 근처 궁촌(宮村)으로 이주하여 직접 농사를 지으며 문학적 전환을 꾀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친일적 색채의 작품을 쓰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중에는 해군정훈감으로 활동하였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1926년 일본에서 장편 <의지없는 영혼>과 <폐허> 등을 무영이란 아호로 발표했으며, 1932년 <동아일보>에 중편 <지축(地軸)을 돌리는 사람들>을 연재하면서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했다. 이어 단편 <거미줄을 타고 세상을 건느려는 B녀의 소묘>(1934), <산가(山家)>(1935), <만보노인(萬甫老人)>(1935) 등을 발표하였고, <동아일보>에 <먼동이 틀 때>(1934), <명일의 포도>(1937) 등을 연재하였다. 1939년 낙향하여 농촌에서 살면서 <제1과 제1장>(1939), <흙의 노예>(1940), <문서방>(1942), <농민>(1950) 등의 작품을 써서 농민문학 작가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일제강점기 말 <푸른 기와집>으로 조선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쟁 이후에는 농촌보다 도시를 제재로 한 시정(市井) 소설을 썼다. 작품집으로 <취향>(1937), <이무영 단편집>(1938), <흙의 노예>(1946), < B녀의 소묘>(1953), <벽화>(1958) 등이 있고, 기행수필집 <고도승지대관(古都勝地大觀)>(1947), 소설이론서 <소설작법>(1949)을 펴내기도 했다. 이무영의 농민소설은 주로 세 시기로 구분되는데, 그 첫 시기는 1932년~1935년 무렵으로, 주로 가난의 고통 속에서 체념하고 절망하는 농민의 모습을 형상화한 경향적 작품을 썼다. 문학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는 작품들은 1939년을 전후한 귀농 농민소설로, 역경 속에서도 인간적 품위와 생존의지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농민상을 창조하려고 하였다. 1950년 이후에는 농민의 수탈과 압박의 역사를 대하소설 형식으로 엮어보고자 하였다.
리뷰
(······)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는 이무영의 대표작으로 공인되어온 작품이다. (······) 이 작품들은 1939년에서 1943년 사이, 즉 일제강점시대 말기에 발표되었던 만큼, 작품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먼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이 시기의 농촌 관련 사항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 ‘국가총동원법’의 전체적 억압에다, 최대한의 수탈을 위한 다방면의 구체적인 농촌통제법령으로, 농민들은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는 극단적 곤경에 놓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고 있는 가운데, 한동안 제기되지 않던 농민문학론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 나타난 농민문학론은 1935년 이전의 농민문학론과는 성격이 판이한 것이었다. 새로운 농민문학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인문평론> 창간호의 <모던 문예사전>의 <농민문학> 항목이었는데 이 항목의 집필자는 최재서였다. (······) 농민문학이란 “흙에 대한 농민의 애착을 강조하는 동시에 명랑한 농촌을 그리자는 것”이며, ‘금일 농민문학의 중요한 과제’는 “농경인의 깊은 예지와 정서와 생활의 탐구에 있어 실체를 파악하는 동시에 그것을 시국(時局) 내지 시대와의 관련 하에서 처리해 나가는 것”이라는 일본 농민문학론을 소개·수용하였다. (······) 농민문학은 ‘생산문학’과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 권환도 농민문학론을 제기했는데, 그는 농민문학이 “생산문학의 일부분으로 농민의 생산활동을 묘사하는 문학” (······) 오늘의 농민문학은 “왕년의 계급문학과 같이 지주와 소작농의 대립관계만에 주력할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도 소작농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 농민의 건전한 근로생활을, 그들의 가장 전형적인 얼굴을 진실하게 묘사할 것”을 주창했다. (······) 1930년대 말의 농민문학론과 함께 나타난 농민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진 새로운 현상은 귀농지식인을 주인공으로, 지식인 귀농과 도시부정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소설유형의 등장은 일본 어용 농민문학론의 소개와 시기를 같이 하는 것으로, (······) 이 유형의 대표적인 작품이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이다. 이 유형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주인공들은 모두 농촌 출신이고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이며, 고학을 통해 도시에서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일제강점시대의 기준과 통념으로 볼 때 지식인들로서, 귀농을 단행한다. 이런 점에서는 이들도 과거의 농민소설에 나타났던 지식인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들의 귀농 동기와 목표, 농민문제를 보는 시각, 귀농 후의 활동에서 완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 <제1과 제1장>의 주인공 수택은 소작농의 아들로 고학으로 동경에서 대학전문부를 마치고 “이런 자리를 노린 대학 출신의 이력서가 기백장 설합 속에서 신음”하는 좋은 직장을 버리고 낙향한다. 귀향의 근본 동기는 도시 생활에 싫증이 났다는 것, 기자 생활에 적응하기 어렵고, 또 작가로서 작품활동도 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단행의 직접적 계기는 청량리 교외에 나갔다가 느낀 흙냄새였다. 그의 목표는 ‘오랫동안 동경해오던 이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인데, 이것은 흙냄새를 맡으며 농사를 짓고 한편으로 작품도 쓴다는, ‘반농반필(半農半筆)’의 생활이다. 농촌에 돌아온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자리 좋은 논 여덟 마지기”의 소작권을 이동받고 집도 장만하여 농민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 수택의 귀농 동기, 귀농 후 생활 계획에는 그곳 농민 전체를 위한, 즉 집단을 위한 이념·활동이 전혀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그 개인이 어떻게 충실한 농민이 되는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귀농 후 그의 생활범위는 개인적인 것에만 국한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1930년대 전기까지의 농민소설 지식인 주인공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 - <이무영>, 이주형, 건국대출판부, 2001
작가의 말
(……) 농민문학에 관심을 갖기는 실은 동경 시대부터였지만 작품을 쓴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서다. <만보노인(萬甫老人)>, <흙을 그리는 마음> 등 농민소설이라기보다는 농촌소설이었다. 본격적으로 농민문학에 깊이 파들어갈 결심을 한 것은 30세 때다. 불원(不遠) 우리말 신문이 전적으로 폐간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1년 전에 신문을 그만두고 농촌으로 들어갈 때의 의의(意義)는 충천했었다. 그러나 워낙 둔재인지라 지지부진, 농민의 그 어떤 새로운 인간형 하나 붙들어보지 못한 채 6·25를 맞고 말았다. <문 서방>, <승패>, <사위>, <청개구리> 등은 역시 이 농촌생활에서 얻은 소재였고, 장편으로서 <향가>, <농민> 등도 이때에 구상된 작품들이다. <제1과 제1장(第一課第一章)>이 낙향하면서 쓴 첫 작품이요, <흙의 노예>는 1년 후 작이다. <흙의 노예>의 속편은 구상만 해놓고 쓰지 못하고 있는 마음의 부채(負債)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어서 다시 농촌에 들어가서 이 속고(續稿)들을 쓰고 싶다. 문학 이력서에 쓰라면 단편이 150~160편, 장편이 20편을 산(算)하지만, 작가로서 내세울 작품 하나 없는 양(量)만의 작가다. 이 보잘것없는 작품들이지만 나로서는 최선,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여 쓰노라고 썼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일찍이 유진오 씨가 나를 ‘밥의 작가’라고 한 일이 있듯이 정말 평범한 이야기만 30년을 써온 셈이다. 그러나 촉새가 황새 걸음을 따라가다가는 다리가 찢어진다는 말을 믿고 재주 있는 사람들의 흉내는 아예 내볼 생각도 않기로 하고 있다. 어쩌다 내 작품을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술이라도 사주고 싶게 고마워지도록 나는 독자가 없지만 이 둔재의 평범한 이야기 테두리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어쩌면 죽을 때도 이런 말을 유언으로 남기게 될지도 모르느니라 생각하니 허무해진다. 입버릇처럼 농촌, 농촌, 하는 것도 농촌에 나가면 혹시 이 허무가 극복되지나 않을까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서울신문>, 1959년 6월 1일) - ‘농민에의 매력: 나의 창작 역정(歷程)’, 이무영, <이무영 문학전집 6>, 국학자료원, 2000
관련도서
<이무영 문학전집>, 이무영, 국학자료원, 2000 <이무영 대표작 전집>, 이무영, 신구문화사, 1975 <이무영 소설의 서술 시학>, 이종호, 국학자료원, 2003 <이무영: 소설과 농민을 향한 열정>, 이주형, 건국대출판부, 2001 <한국농민문학연구: 식민지 시대>, 류양선, 서광학술자료사, 1994 ‘이무영론’, 이주일, <한국현대작가연구>, 국학자료원, 2002 ‘이무영과 농민소설’, 임영환, <한국현대소설사연구>, 민음사, 1984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한국문학명작사전>, 임헌영·김재용, 한길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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