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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촌

작품명
사하촌
저자
김정한(金廷漢)
구분
1930년대
개요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김정한의 단편소설. 1936년 1월 9일부터 23일자 <조선일보>에 실렸다. 가뭄이라는 자연적 재난과 맞서기에 앞서 가혹한 소작제도 및 일제의 통제에 시달리는 사하촌 소작농민의 상황을 예리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민족운동의 계몽성 내지 사회주의 목적성을 표방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나아간 농민소설이다. 카프 해체 이후 지주-소작 관계의 대립을 다룬 작품이 농민소설에서 거의 사라지게 된 다음 발표된 작품이라 문학사적 의의가 더욱 크다. 1930년대 초반의 농민소설에서 볼 수 있는 긍정적 주인공의 형상화나 낙관적 전망은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강도높은 노동과 척박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여유와 낙천적 세계관을 잃지 않는 농민들을 형상화했다. 단편이면서도 단선적 구성으로 전개되지 않고, 농민들의 삶의 단면을 드러내는 일화 중심으로 엮어나가는 특이한 구성방식을 택했다.
내용
성동리 주민들은 보광사 소유의 땅을 소작하여 먹고 사는 농민들이 대부분이다. 모내기를 할 무렵부터 날이 가물기 시작해 곳곳에서 물싸움이 벌어진다. 특히 저수지 가까이 있는 보광리(중마을)에서 물을 독점하는 바람에 성동리 사람들은 여간 애를 먹지 않는다. 급기야 성동리의 고서방이 보광리 사람과 주먹다짐을 하다가 뭇매를 맞고 들깨와 철한이는 뜻을 합해 밤새 보광리쪽 물꼬를 터 성동리의 논에 물을 흘려보낸다. 보광리 사람들은 이를 고서방의 소행이라 추측하고 그를 주재소에 넘겨버리는데, 그런 난리 속에서도 모내기는 시작된다. 가뭄은 계속되고 농민들의 기우제도, 보광사의 기우불공도 영험없이 추석이 돌아온다. 어느날, 삭정이를 하러 산에 들어간 마을 아이들이 보광산 산지기 영감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가동할멈의 손자 상학이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만다. 주재소의 순사는 남의 산에 침입한 죄가 나쁘다며 유일한 피붙이를 잃은 할멈을 꾸짖는다. 드디어 가을걷이가 시작되고 보광사에서는 가뭄에도 아랑곳없이 소작료를 요구하는가 하면, 성동리 사람들의 저리대금 지불연기도 거절한다. 마을 곳곳에 입도차압(立稻差押)의 팻말이 나붙고, 빚을 갚을 길 없는 고서방은 야간도주를 하고 만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극한 상황에서 성동리 농민들은 차압취소와 소작료 면제를 탄원하기 위해 보광사로 떠난다.
저자
김정한(金廷漢)
생애(1908~1996)
호는 요산(樂山). 경남 동래 출생. 동래고보를 거쳐 1929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에서 수학하였다. 동래고보 졸업 직후 교원으로 취직하였다가 직장 내에서 민족적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조선인교원연맹을 조직하려다 피검되었으며, 도쿄 유학 시절에는 사회주의 문학운동단체인 ‘동지사(同志社)’에 참여하였다.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사하촌>이 당선되어 정식으로 등단하였다. 194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한국어교육이 금지되자, 교직에서 물러나 동아일보 동래지국장으로 활동하던 중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피검되었고, 같은 해 동아일보가 강제폐간되자 절필에 들어갔다. 광복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였고, 민주신보 논설위원, 부산대학교 조교수 등 교직과 언론계에서 활동하였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부산대학교를 떠나 부산일보 상임논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65년 부산대에 복직되었다. 1966년 <문학>에 <모래톱이야기>를 발표하며 중앙문단에 다시 등장해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중편 <수라도>(1969)로 제6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김정한은 어느 작가보다도 치열하게 농촌사회의 현실을 현장 속에서 투시하고 있는 작가다. 그는 현실의 모순에 대해 집요하리만큼 직접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결연할 정도로 정직한 분노의 고압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의 문학세계는 특별한 소설시학적 국면을 가지고 있지 않은 대신 현실을 보는 자로서의 대담한 정직성과 고발적인 즉물성을 중시한다. <사하촌>(1936)은 소작농민들의 절대적 빈궁의 참상과 그들의 생존을 위한 집단적인 반격의 필연성을 그리고 있다. 이런 점은 경향파 이후의 소설적 관습과 일치하지만, 권력과 결탁하여 지주계층으로 군림하는 사원의 허위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옥심이>(1936) 역시 가난에 지친 농민의 삶과 지주화된 사원의 횡포한 농민지배를 다루고 있다. <추산당과 곁 사람들>(1940)은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갈등을 제시한 작품이다. 이 몇 편의 작품으로 침묵해버렸던 그는 <모래톱 이야기>(1966)로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축생도>(1968), <수라도>·<뒷기미나무>(1969), <인간단지>(1970) 등을 발표하였는데, 전기나 후기의 현실인식 관점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낙동강 주변의 가난한 농민들을 통해 민족현실의 모순을 파헤치고 민중 속에 잠재된 건강한 생명성을 추구하여 농촌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고 있다는 점이다.
리뷰
(······) <사하촌>이 나오기까지의 젊은 시절의 행적만 살펴보더라도 김정한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세속적인 안락을 추구하는 따위 일체의 순응주의를 배격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생애 전체에 일관된 삶의 자세는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저항이었다. 그것은 일제 시대에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고, 해방 후에는 정치권력의 횡포와 사회적 비리에 대한 비판으로써 나타났다. 물론 이러한 저항과 비판의 근거는 지배와 착취가 없는 사회, 즉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이 땅에 이룩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그대로 그의 문학의 바탕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김정한의 문학은 한마디로 저항적인 민족문학이며 모든 비인간적 불의에 대립하는 진정한 인간주의의 문학이다. (······) 작품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는 지독한 가뭄에 시달리는 가난한 농촌의 광경들을 보게 된다. “타작마당 돌가루 바닥같이 딱딱하게 말라붙은 뜰”, “새까만 개미떼가 물어뗄 때마다 한층 더 모질게 발버둥질하는 지렁이”, “군데군데 좀구멍이 나서 썩어가는 기둥”, “파리똥 앉은 얼굴에 땟물을 조르르 흘리며 울어대는 어린애” - 작품 서두에 묘사되어 있는 이 모든 장면들은 앞으로 전개될 처절한 삶의 양상을 암시적으로 예고하는 듯하다. 이어서 이 성동리라는 마을의 한 가정이 묘사된다. 치삼노인과 그의 아들인 들깨, 그리고 아내와 아이가 소개된다. (······) 이 성동리 마을의 농민들은 거의 대부분 보광사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들로서, 그들 역시 들깨네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 다만 그들이 처한 사회적 모순이 극심한 가뭄이라는 자연재해를 통해서 더욱 적나라하게 노출될 따름이다. 원래는 가물더라도 농사를 못 지을 정도가 아니었으나 가까운 도시의 수돗물을 대기 위해 저수지를 만드는 바람에 지금은 조금만 가물어도 농사에 큰 타격이 오게 되었다. 이 작품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이 마을에 저수지를 만들어 생기는 혜택은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도시로 가는 것인데 이때 도시란 바로 일본인들을 비롯하여 식민지 체제에서 이익을 보고 사는 곳이다. 여기에서도 가뭄에 의한 농민의 고통이 단순한 자연적 재난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의 문제이고 나아가 식민지화의 한 농촌적 표현임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은 가뭄이라는 계기에 의해 하나둘씩 표출되는 식민지 농촌의 제반 현실을 사실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묘사해나간다. (······)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결코 가뭄이라는 자연적인 재해가 아니라 이를 통해 명백히 구체화된 사회적 모순이다. 그러면 그 사회적 모순의 실체는 무엇인가. 한편에는 보광사의 중들로 대표되는 지주가 있다. 그 배후에는 일제의 식민지 권력이 있으며 그 수하에는 쇠다리 주사, 진수, 수동이, 산지기 같은 기생충적 존재들이 둘러싸고 있다. 다른 한편에는 들깨, 철한이, 봉구 같은 소작농들이 있다. 이 양자간의 대결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허서방은 부쳐오던 절 논을 무고히 떼이고 살 길이 막히자 목을 매어 자살을 한다. 나무 한 줌이라도 하려던 상한이는 산지기에게 쫓기다가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져 죽으며, 이 때문에 가동할멈은 실성을 한다.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을 차압당하게 된 고서방은 드디어 야반도주를 한다. 이러한 과정은 바로 식민지 한국 농민의 처절한 좌절의 역사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농민의 패배와 절망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모든 절망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살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끝내 자기 삶의 거점을 튼튼히 붙잡고 일어서려는 강인한 농민들을 보여줌으로써 이 작가는 인간 긍정의 문학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 작품 <사하촌>에서 김정한은 식민지적 조건에 처한 우리 농촌의 내부적 모순을 정확히 보고 이를 농민의 편에 서서 가차없이 묘사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성동리 마을의 농민들 모두이다. 작가는 이 여러 사람들에게로 자유롭게 시점을 이동시켜가면서 식민지 한국 농촌의 붕괴와 농민적 각성의 과정을 서사시적 위엄 속에 형상화한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바로 농민들 자신의 편에 굳게 섬으로써 일체의 순응주의와 허무주의를 타파하고 모순의 극복을 위한 전망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작품의 마지막 대목에 성동리 소작농들이 차압취소와 소작료 면제를 탄원하기 위해 행렬을 지어 마을을 떠나는 장면은 농민적 자각의 감동적인 객관화로서 사회적·민족적 해방을 위해 일어선 이 시대 민중들의 우렁찬 발걸음을 장엄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 ‘김정한의 <사하촌>: 식민지 시대의 농민 현실’, 염무웅, <김정한>, 새미, 2002
작가의 말
호적에 1908년 생으로 되어 있으니까 나란 생물이 이 땅에 태어난 건 우리 연대로 치면 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 2년-그러니까 당시 국권을 틀어쥐고 천하를 호령하던 매국정상배들이 민족의 장래 일일랑 요만치도 염려하지 않고 일신들의 영달(?)만에 눈깔이 뒤집혀서 나라를 몽땅 일제에 팔어 넘긴 바로 이테 전이 되는 셈이다. (……) 나는 출생 때부터 일제와 매국노와 그들의 앞잡이들과 어떤 운명적인 관계를 이미 가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될 때가 있다. 세 살 때 조국을 잃었지만 물론 알 턱이 없었다. 그저 보채거나 억지를 쓸 때, 어머니가 “순사 온데이!” 하면 막연히 일본사람들을 생각하고 겁을 내곤 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겁은 곧 미움으로 바뀌었다. (……) 일본사람들과 그들을 따라다니는 조선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미워하게 된 것은 그들이 소위 밀주단속을 나돌아다닐 때의 일이었다. 농가에서는 여느 집 없이 농주를 빚기 마련이었는데 그 놈이 금지되고부터는 들키면 경찰에 끌려가기가 일쑤고 꼬박꼬박 벌금을 물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순사와 세무서 사람들이 오는 낌새를 채면 마을 사람들은 술동이를 안고 이고 허둥지둥 숨길 곳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 어머니들이나 아버지들의 뺨에 놈들의 손이 철썩하고 닿는 걸 보았을 때 내 속에는 ‘조놈의 새끼들!’이란 말이 연신 맴돌았다. ‘원수를 갚아야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유년시대를 보냈다. (……) 내 고향에는 아직 정규의 소학교(보통학교)가 서지 않았기 때문에 서당을 그만둔 나는 가까운 절간에 있는 사립학교에 들어갔다. (……) 나는 이 절 학교에 이태 동안 다니면서 소위 신학문이란 걸 배운 이외에도 당시의 불교라기보다 절이나 중들에 대한 일들을 직접 눈으로 많이 보았다. (……) <사하촌>이니 <옥심이>니 하는 나의 초기 작품들 속에, 사찰이나 승려들이 좋지 않게 나오는 것은 모두 이상과 같은 나의 소년시절의 인상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동래고보 하면 전국적으로 알려진 반일전통을 가진 학교였다. 내가 그 학교에 적을 둔 것은 나의 반골정신을 더욱 자라게 한 결과가 되었다. 2학년 때부터 학교를 마칠 때까지 소위 스트라이크가 없은 해가 없었다. (……) 스트라이크는 대개가 일본인 교사들의 무능과 군국주의적인 억압, 멸시…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물론 학교를 쫓겨난 희생자도 많았지만 성공한 경우도 있었다. 비록 제국주의 체제 밑이었으나 경찰이 학원에는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다행한 일이었다고 느껴진다. (……) 중학을 나오던 해 가을에는 울산 대현공립보통학교에 교사로 취직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어둠 속에서>라는 소설에서 더러 건드린 바와 같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그 현황은 식민지 청년교사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굴욕적인 데가 많았다. (……) 반년도 채 못 되어 그곳을 떠났다. 예의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낙인이 찍히게 된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화위복이랄까. 집에서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일본유학을 허락했다. (……) 와세다의 자유주의적 학풍이 마음에 들었고 또 거긴 우리 유학생들도 비교적 많았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나와 같은 반골기질을 가진 축들이었다. 나는 곧 독서회에 들어갔다. (……) 문학을 지망하는 문과에 적을 두었지만 나는 그러한 독서회의 멤버가 되고부터는 문학서적보다 사회과학 방면의 서적을 더 많이 읽기 시작하기 전에 사회적인 부조리, 그리고 반사회적인 제국주의 체제, 우리 민족의 운명, 이런 것들이 늘 문제가 되고 관심사가 되었다. 그런 것들을 내용으로 한 단편을 국내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32년 여름 방학에 귀성했을 무렵 양산 농민의거사건에 관련이 되어 다시 경찰에 피검됨으로써 이번에는 직장 아닌 학업을 중단하게 돼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일생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대한 원인의 하나가 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리하여 나란 인간은 세속적으로는 불효한 자식이 되고, 무능한 남편, 무능한 애비가 되고, 반일 불온분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겨우 옛 스승의 도움을 받아 남해란 섬에 가 다시 보통학교 교원노릇을 하며 소설 나부랑이를 끼적거리다가 일제의 최종적인 발악이 심해질 무렵, 절필과 동시에 직장도 그만두고 폐간 직전에 놓인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맡아서 허덕이다가 그것도 몇 달 못가 결국 동아일보와 운명을 같이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나의 반골정신은 나를 다시 실업자로 만들었다. 그러고 가끔 경찰 신세를 지게 했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8·15 해방이 되어도 나의 반골벽은 그대로 나아갔다. (……) 김구선생이 흉탄에 쓰러져도 이승만박사의 독재 정부하의 신문들이 겨우 1, 2단 정도의 눈가림 보도밖에 못하는 것을 보고는 구역질이 나서 신문도 잘 들여다보지 않았다. (……) 문단 복귀 후의 내 작품들 가운데서 간접적으로 신문인들을 빈정거리다가 생각하지 않았던 오해를 받는 것도 이런 반골벽, 저항적인 기질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같은 반골벽이 내 개인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체험을 통해서 뼈에 사무치게 알고 있다. 교수를 해먹다가 두 번이나 목이 달아나고 옥에 갇히고 한 게 다 이런 내 기질의 탓이니 하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조국이나 민족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했다고도 생각하지 않거니와, 크게 죄를 지었다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저 반골인생, 이런 생각이 떠오를 따름이다. 그리고 이것이 누구의 탓일까 하는-. (1974년) - ‘반골 인생’, 김정한, <김정한>, 새미, 2002
관련도서
<김정한: 대쪽 같은 삶과 문학>, 강진호 편, 새미, 2002 <일제말기의 한국소설 연구>, 김종균,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1999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한국문학명작사전>, 임헌영·김재용, 한길사, 1994 <한국근대문인대사전>, 권영민 편, 아세아문화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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