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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생이

작품명
남생이
저자
현덕(玄德)
구분
1930년대
개요
1937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가로서 현덕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신춘당선소설로 발표될 때부터 크게 주목받았던 작품으로서 당시 안회남에 의하여 “우리의 전 문학적 수준을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극찬을 받았다. 일본 제국주의하 농민생활의 붕괴를 배경으로 한 가족의 해체를 노마라는 어린 주인공의 눈과 섬세한 심리를 통하여 뛰어나게 형상화하고 있다.
내용
항구의 언덕, 토담집에 사는 ‘노마’는 기침하며 누워지내는 아버지를 수발하느라 옆집 영이와 맘놓고 놀지도 못한다. 아버지는 원래 농민이었으나 땅을 빼앗기고 항구로 와 소금을 지는 인부가 되었다. 그러나 땅을 마련하기 위해 무리하다가 드러눕게 되었고, 어머니는 선창의 들병장수가 되고 말았는데, 그녀의 곁에는 선창가 마당지기, 앞잡이 노릇을 하는 털보가 따르고 있다. 털보가 노마네에 오면 노마 아버지는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가고 노마는 멀리까지 심부름을 가야 한다. 어느날, 저녁을 지어주곤 하던 영이 할머니가 부적과 남생이를 가지고 와 무병장수에 효력이 있다며 내놓는다. 아버지는 그것을 믿기라도 하듯 남생이를 배에 올려놓고 바라보며 지내고, 노마도 온종일 영이와 놀 수 있게 되었다. 노마는 나무 오르기에 열을 내는데 어른 흉내를 내는 곰보녀석이 올라가는 위치까지는 오르지 못한다. 노마에게 그 높이의 정복이란 어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요, 어머니 없이도 아버지와 잘 살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듯 했다. 드디어 노마가 양버들나무에 올라간 날, 노마 아버지는 세상을 뜨고 남생이도 사라진다. 노마는 울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슬픈 생각을 만들어내려 하지만 자기가 나무 오르기에 성공한 생각이 나자 도리어 기뻐지고, 곧 아버지에 대해 죄스런 마음이 된다. 노마는 영이를 본다. 어찌나 예쁜지 영이의 목을 흔들고 누르다가 그만 울려버리고 만다.
저자
현덕(玄德)
생애(1912~?)
본명은 현경윤(玄敬允). 서울 출생. 1924년 대부공립보통학교를 수료하고 중동학교 속성과 1년을 다녔다. 1925년 제일고보에 입학하였으나 곧바로 중퇴하였다. 192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달에서 떨어진 토끼>가 1등으로 당선되었고, 1932년 동화 <고무신>이 <동아일보>에 가작입선되었다. 이후 <소년조선일보> 등에 동화를 발표하다가 1938년 <남생이>가 <조선일보>에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정식 등단하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울면서 최하층의 삶을 경험하였고, 김유정과 각별한 교우관계를 가졌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였고, 1950년 월북하였으며, 1962년 한설야 일파로 분류되어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현덕이 발표한 작품은 소수이기는 하나 모두 그 내용이나 형식에서 1930년대 소설문학이 도달한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된다. 현덕의 작품들은 거의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인위적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창출된 농민 생활의 붕괴, 노동자계급의 대두 및 그 역사적 의의, 자본주의 자체의 제모순 등을 사실주의적 방법으로 추구함으로써 한국문학의 폭을 넓히는 데 공헌했다. <남생이>·<경칩>·<두꺼비가 먹은 돈>(1938) 등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시선으로 농촌공동체의 와해과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은 연작으로 읽힐 만큼 인물과 사건에 있어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모두 농촌공동체가 해체되고 농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도시 변두리로 이주하여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일제하의 사회적 모순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농촌공동체가 해체되는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의 제시에는 한계적이었음이 지적된다. 한편, 무기력한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도시의 타락상을 그리고 있는 <골목>(1939), <군맹(群盲)>(1940) 등의 작품에서는 1930년대 후반 서울의 가난하고 기형적이며 퇴폐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중편 <군맹>은 일제의 토지조사 등으로 땅을 잃고 도시로 몰린 실향민의 생활을 극명히 드러낸 사실주의의 승리로 평가되었다.
리뷰
현덕형(玄德兄)의 <남생이>가 1937년 조선일보신춘당선소설로 발표되었을 때, 문단이 모두 경이적인 신인의 출현을 여찬(麗讚)으로 환영하였지만, 나는 그와는 다른 의미에서 오랫동안 이 작가에 대해선 경탄을 마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를 적으면 이러하다. 단지 작품수준과 작가의 역량으로 보아 그 전에는 물론, 그 이후에도 현형과 비유할 당선작가는 나오지 않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된다. 매년 몇 사람씩의 신인이 나왔으나 현형 이후에도 또 현형과 같이 역량을 발굴한 분도 없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문학적인 이유에 속하는 것인데, 묘사력이다. 우리 문학의 선배로 누구 누구를 꼽고 또 리알리즘이니, 장편소설이니, 산문본령이니 하여 누구 누구를 그의 완성자로 손에 꼽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 소설문학은 아직 충분한 묘사 정신을 터득치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형이 <남생이> 이후 계속적으로 발표한 <경칩>, <골목> 등 일련의 작품이 표시한 적확하고 정확한 묘사력과 충분한 산문성과 그리고 위태롭지 않은 형상력은 그때 한참 이 방면에다 수련의 중심을 삼아오든 나 자신을 크게 분발시켰었다. 한두 개의 작다란 주관적인 초점을 맹글어 놓고 거기에다 위태롭지만 인형에 옷을 입힌 듯한 인물들을 붙여놓고, 그리고 기술적으로 몇 개의 장경(場景)을 배치하여 구상을 째이게 하고, 또 그 우에 약간의 시미(詩味)와 애매모호한 토속성과 유현미(幽玄味)를 비끼어 냄새를 풍기게 하는 것으로 일부 문학 애독자를 만족시키기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닐는지 몰으나 나오는 인물의 심리와 행동과 사상을 충분히 알고, 그리고 작가가 확실히 부뜰고 있는 이러한 인물들로써 적확한 형상성을 가지게 하여 산문문학이 목적하는 바 궁극의 정신을 완전히 실현하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며 그때 나 자신 이것을 터득하기에 전력을 다하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형을 만나서 내가 바란 것은 형의 일련 작품의 주인공들이 ‘노마’ 등의 소년인 것과 그리고 ‘노마’의 눈을 통하여 세태를 관찰하려는 것과, 그 펼쳐보이는 세계가 소년들이 작난치며 노니는 골목 안인 것, 끝으로 풍부한 묘사에 비하여 주관의 형상화가 빈약한 것, 구성이 이완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이 주관파악의 빈공에 원인한 듯한 것, 때문에 내가 특히 희망한 것은 사람과 눈과 세계를 넓히고 강력한 주관에 의하여 작품의 근간을 이루도록 할 것 등이었다. 그런 의미에선 중단되고 말었지만 <녹성좌(綠星座)>라는 작품을 나는 퍽 주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 태평양전쟁 강행정책에 희생되는 5, 6년 동안 이미 상재(上梓)되어 강호(江湖)의 정평을 받은 <집을 나간 소년>의 소년소설을 남겼지만 형의 그 뒤의 노력은 크게 결실치 못한 채 8·15를 맞이하였다. 요컨대 현형이 문단에 나온 시기가 문학사적으로 또는 사상적으로 보아 카프 해산 이후 중일전쟁·태평양전쟁 기간 중이라는 것이 여러가지로 현형의 문학에 영향하고 있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남생이>에 수록된 작품의 사적(史的) 평가에 대해선 문학사가 뒷날 규정할 것이로되 저자가 많은 지우중(知友中) 특히 나의 글을 발문(跋文)으로 붙이고자 하는 의도가 함께 소설을 공부하는 동시대인인데 있다고도 보여짐으로 주로 이 면에 국한해서 두서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다. 해방은 반다시 현형이 그 문학을 새롭게 묘양(昴陽)시키고 발전시키는 유일한 기반이 된 것을 믿는 바이며 병고를 무릅쓰고 문학운동과 문예공작(文藝工作)에 종사하는 인간으로서 이 성실성이 반다시 문학적으로 결실할 것을 바라마지 않은 바이다. (1947년 7월 26일 문연회관에서) - ‘현덕의 작품세계: 발문’, 김남천, <제삼한국문학>, 수문서관, 1988
작가의 말
출생은 삼청동 지금 세균검사소 뒤 별장에서 하였다는데, 거기 대한 기억이라고는 어느 때 푸른 잔디 위에서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오래오래 울던 것이 머리에 남았을 뿐, 부친이 황하마루 지금 광화문 근처로 신접살이를 나왔을 때는 이미 가세가 기울어진 때여서, 그때부터 사글세집으로 평편이 볼성모양이었다. 어버이 두 분 사이는 서로 성품이 어느 모로 비젓한 분들이셔서, 같은 그것이 도리어 조화를 이루지 못했음인지, 사이가 불화해서 늘 공기가 따뜻지 못했다. 더욱이 부친 그분의 성격이란 패가한 호화 자제의 전형이어서, 사대주의요, 투기적이요, 또 극히 호인이며 낙천가이어서 자기는 매사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사업 사업 하고 사업을 꿈꾸며 경향으로 돌고 가사엔 불고하였다. 그 사이 집안 살림은 오로지 모친 한 분의 손으로 유지해가던 것으로, 그 모양은 비참한 것이어서, 이리저리 집을 옮긴 수가 이십여 회, 살림을 고만두고 식구가 각자도생으로 헤어지길 수삼, 그럴 때마다 나는 조부의 집으로 당숙의 집으로 돌며 몸을 붙였다. 그 중 당숙의 집인 인천 근해의 섬 대부도(大阜島)에서 보내던 삼사 년간의 소년시절이 가장 꽃다운 때여서, 거기서 처음 중산계급의 의식주에 근심이 없는 생활도 맛볼 수 있었고, 학교 교육도 여기서 받은 이년간이 제대로 받은 교육이었다. (……) 거기서 보통학교 삼 년을 수업하고, 상경해 중동학교 속성과 일 년을 거쳐 제일고보에 입학하였으나 년여에 고만두고, 그때부터 생활이 병적이어서 염인증으로 거리를 나가기 두려워하여, 낮이면 방구석에 이불을 쓰고 누웠다가, 밤이 어두우면 일어나 컴컴 골목 뒷길을 걸어보고 하였다. 그때 행색이 아마 심상치 않았던가 싶어 거리를 나가면 순사나 그런 사람에게 불심검문을 받기 일쑤였다. 그 다음 같은 칩거벽으로 도서관엘 다니기 시작한 것은 좋은 일이어서, 아침 일찍이 가 밤이 들어 거리가 어두워질 때까지 들어앉어 있었다. 아마 무슨 얻음이 있었다면 이때가 전부일 것이다. 그 후 뜻한 바 있어, 지금까지의 창백한 병적인 생활을 근저로 뒤엎어 어머니에겐 시골로 학원선생으로 간다고 속이고, 수원 발안 근방의 매립공사장에서 토공생활을 하기도 하고, 이어 현해탄을 건너가 경도 대판 등지로 돌며 신문배달, 자유노동, 벵기공 같은 것을 하며, 최하층의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한번은 대판 와사회사에 품을 팔러 나갔다가, 흙보구니를 지지 못하고 쓰러지고 쓰러지고 하다가 결국 그곳 감독에게 쫓기어나고 말았다. 그날 긴 요도가와(淀川) 뚝을 걸으며 울다 웃었다 탄식하다가는, 마침내는 도저히 그대로 지탱해 갈 수 없는 몸임을 깨달으며, 동시 그 써워질 수 없는 몸으로 할 수 있는 최후의 한 가지 일로 지금까지 추향과 같이 동경해오던 문학의 길을 밟아보겠다는 생각으로 귀경하였다. 그리고, 지기 고 김유정 형을 얻어 더욱 뜻을 굳게 하고 그 길을 밟던 중, 금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으로 적은대로 그 길에 자신 같은 것을 가져보며 현재에 이르렀다. - ‘자서소전’, 현덕, <남생이>, 슬기, 1987
관련도서
‘현덕의 소년등장소설 연구’, 이강언, <대구대 인문예술논총 21>, 2000년 2월호 ‘현덕 소설의 일고찰: 소설 <남생이>를 중심으로’, 전명희, <영남대 국어국문학연구 25>, 1997년 12월호 ‘남생이 구조분석’, 이미림, <강릉대 강릉어문학 7>, 1992년 4월호 ‘현덕의 작품세계’, 박덕은, <금호문화>, 1989년 5월호 ‘현덕소설 연구’, 이미림, <숙명여대 어문논집 1>, 1991년 2월호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한국문학명작사전>, 임헌영·김재용, 한길사, 1994 <한국근대문인대사전>, 권영민 편, 아세아문화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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