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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영남루(嶺南樓)

작품명
밀양영남루(嶺南樓)
소재지
경남 밀양시 내일동
지정종목
보물 제147호
장르구분
누정건축
개요
영남루는 광한루, 한벽루와 더불어 조선 3대 명루에 속하며,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본래 고려시대 영남사에 부속된 사루(寺樓)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시대 밀양도호부의 객사 부속건물로, 손님을 접대하거나 주변 경치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던 건물로 1442년(세종 24)에 루의 서쪽에 소루(召樓, 후에 枕流堂)라는 작은 누각이 덧붙여지고, 연산군 홍치 연간(1448~1505)에는 동북편 모서리에 망호당(望湖堂, 후에 凌波堂)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오늘날 좌우에 부속건물을 거느린 영남루의 모습은 이때부터라고 추정된다. 1365년(고려 공민왕 14)에 누각을 새로 짓고 절의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60년(세조 6)에 중수하면서 규모를 크게 넓혔으며, 선조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37년(인조 15) 다시 지었고 마지막으로 1844년(헌종 10) 불에 탔던 것을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때 경역전체를 밀주관(密州館)이라는 객관으로 만들었고, 영남루는 객관에 부속된 루가 되었다. 이러한 누각은 객사 이외에도 전망이 좋고 경치가 좋은 곳에 지어지며, 대개 지방마다 있어 평소에는 지방관이나 문인들의 유연 장소로 사용되어 왔으나 영남루와 같은 부속 건물을 거느린 누각은 그다지 흔하지 않다. 그 웅대한 규모로 보아 지금 북한 땅에 있는 평양의 부벽루와 6·25동란 때 불타버린 진주 촉석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루로 일컬어 왔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누의 좌우에 침류당과 능파당이라는 부속건물이 남아 있어 조선시대 누각배치의 완결성을 보여준다. 특히 침류당과 누각 사이의 통로를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층층각으로 구성한 것은 탁월한 단면구성과 입면구성으로 인식된다. 본루의 누하 부분은 목재로 된 민흘림 두리기둥인데, 바깥쪽 기둥의 초석들은 모두 팔각형 정평주초이며, 안쪽의 기둥초석은 모두 덤벙주초이다. 루상부분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서 간살이가 넓고 마루가 높아 웅장하게 보인다. 내부에는 2개의 높은 기둥을 사용하여 측면으로 2칸 규모의 중심공간을 두었다. 중심공간에는 반자없이 화려한 구조가 노출되고 측면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여 공간감의 위계를 만들었다. 바깥쪽 기둥머리에서 안쪽기둥 방향으로는 우미량(牛尾樑)을 가설하였고, 우미량의 바깥쪽에는 봉머리를 조각하여 외관의 화려함을 추구하였다. 대규모의 지붕구조를 지탱하기 위해 7개의 도리를 사용한 2고주 7량의 구조방식을 택하였다. 이로써 지붕의 1변 방향으로 3개씩의 서까래가 설치되고, 대들보 위에 중보와 종보 등 3개의 보가 가로지른다. 포작은 익공계 팔작집으로 1출목 3익공을 두어 기둥상부의 비례를 갖추었다. 길게 뻗어 나가는 앙서형 쇠서 위에 연꽃을 초각하였고 보머리는 봉머리를 초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부재도 크고 기둥 간격도 넓으며 중층(重層)으로 되어 우리나라 건축 중에서는 크고 우람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건물 서편에 작은 부속건물이 딸려 있고 지붕이 여러 단으로 낮아지면서 연결되어 독특한 외관을 구성한다. 빼어난 경관과 건축미가 조화를 이룬 건물의 하나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건물을 노래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도면 및 이미지
[자료제공 : 문화재청]
연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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