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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우(李鍾禹)

예술가명
이종우(李鍾禹)
구분
서양화가
생애
황해북도 봉산(鳳山) 출생. 1917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 1923년 귀국했다.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이듬해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추억>이 입상되면서 화단에 나왔다. 1925년 한국인 화가로서는 처음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개랑 및 슈하이에프연구소에서 고전주의적 묘사를 수업하고 1927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 입선했다. 이듬해 귀국하여 개인전을 여는 한편 경신학교 및 평양 소성회(塑星會) 회화연구소 등에서 후진을 지도했으며, 서화협회 간사, 대한미술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50년대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학장을 지내고 목우회와 사실화가회에서 주로 활동했다. <돌아선 나부>, <모부인상>, <누드-남자> 등 파리 체류기 작품에서는 고전적 사실화풍으로 해부학적 표현이 두드러지며, 1945년 이후 작품에서는 정감적이고 자연관조적인 동양적 취향을 보이고 있다. 예술원상과 문화훈장대통령장을 받았다.
약력
1923년 도쿄미술학교 졸업 1924년 선전 입선 1925년 도불 1927년 살롱 도톤느(프랑스 파리) 1928년 귀국개인전 1930년 제1회 동경미술협회전(서울) 1945년 중앙중·고교 교감 / 조선미술건설본부 서양화위원장 1949년~1980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1951년~1961년 홍익대 교수, 학장 및 명예교수 1958년~1967년 제1회~7회 목우회전 1960년~197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및 부회장 1961년 제6회 대한민국예술원상 1962년 문화훈장대통령상 1968년 서울시문화상 1974년 회고전, 신문회관화랑 1983년 제18회 대한민국문화훈장은관
예술활동
동경을 거쳐 서양 미술의 본거지인 파리에서 이종우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유럽 미술양식을 배우게 된다. 이종우의 작품 <누드-남자>에서 그의 인체표현을 잘 보면 골격과 근육을 해부학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럽미술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해부학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풍의 인물화 특히 인체에 대해 크나큰 관심을 가졌던 그는 근대기 한국화단이 일본을 통해 받아들여야 했던 일본화한 유화 즉 인상파적인 분위기 위주의 유화가 아닌 기초가 튼실한 본향의 유화를 이 땅에 소개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파리를 유학한 이종우를 선두로 미국과 독일에서 공부한 화가들은 조금씩 다른 표현법을 선보이면서 우리 화단에 다양한 양식을 선보인다. 특히 색채 구사를 살펴보면 당시의 야수파나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과감한 색이나 구성에 반하여 이종우의 경우 광선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명암과 색채 변화에 충실하면서 채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귀국 후에는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작품 활동이나 화단 활동을 접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는 작가의 민족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1050년대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학장을 지내고 목우회와 사실화가회에서 주로 활동했다.
대표작품
<흰수염의 노인>(1926) <누드(남)>(1927) <인형이 있는 정물>(1927) <우이동의 여름>(1958)
평론
(……) 설초는 일본의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중앙학교의 도화교사로 재직하면서 고려미술원에서 후학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25년 프랑스로 다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즉 인상주의 미술의 본 고향인 프랑스로 유학 길에 오른 것이다. 이는 단지 이종우 개인만의 일이 아닌 한국근대유화의 폭을 더하는 사건이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하여 유화를 배운 이종우는 살롱 도톤느에 출품하여 입상을 하는 등 한국인의 미적 기개를 널리 떨쳤다. 그는 일본의 요코하마를 거쳐 약 한 달간의 기나긴 항해 끝에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에 다다랐다. 처음에는 말이 서툴러 불어를 공부하면서 무슈 갤랑 연구소에서 데생을 배웠고 다시 뮤슈 수하이예프의 화실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약 3년간의 파리시절, 그는 인상주의적인 화풍보다는 사실적이며 자연주의적인 화풍의 구상회화를 완성하였으며 나름의 아카데믹한 화풍을 창안하기에 이른다. 그의 살롱 도톤느에 출품했던 <모 부인상>(연세대도서관 소장)은 파리시절 사귀던 친구의 부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동양 회화에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해부학적인 지식과 야수파적인 다소 격의 없는 붓질, 그리고 이국 여성의 도발적인 눈매 등에서 새롭게 유화를 익혀나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표현방법에 대한 탐구와 그 사이에서 약간은 머뭇거렸던 작가의 모습이 작품과 함께 오버랩되는 작품이다. <인형이 있는 정물>(국립현대미술관 소장)도 야수파적인 작가의 주관적인 표현이 일부 보이기는 하나 아직도 사실적인 형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감하게 생략된 구도와 대상의 묘사보다는 작가의 주관성을 일부 이입시켜 새로운 면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 그러나 1957년 그려진 <아침>은 당시 몇 점 되지 않는 작품 중에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새벽녘 집안의 정원을 그린 이 작품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꾸미거나 정리한 구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실로 자연스럽게 담아낸 그림이다. 정원구석 하얀 백자가 살을 드러내듯 돌 위에 올려져 있고 채송화와 각종 꽃들이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는 이 작품은 푸르른 색조를 바탕으로 하여 새벽의 생경하고 신선한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다. 특히 백자의 흰빛과 식물의 푸르른 색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 작품은 아마도 화단의 새벽을 그리던 작가의 순순한 의지가 반영된 작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설초의 회화사적 의미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유화의 본향에서 그의 눈으로 직접 마주치고 또한 그들의 언어를 습득하여 우리 미술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하고자 노력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유럽에 유학한 화가 또는 프랑스의 살롱 도톤느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입상한 작가라는 명예가 그의 화업을 막은 것일까. 당시 외국에 유학하여 유화를 배웠던 김찬영과 김관호 등 많은 작가들이 붓을 꺾고 다른 일에 종사했던 것처럼, 그의 1930년대 이후의 화가로서의 삶보다는 운둔자적 자세로 세상을 초월하여 안빈낙도하였던 태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으나 치열하고 처절하게 세상을 대면하면서 살아야만 했던 그의 삶의 조건은 그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일제라는 시대의 암울함을 멍에처럼 지고 살아야 했던 당시 선각자들의 굴절된 삶을 역사로 되돌릴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늘 어려운 시절 용기를 주고 학교에서 봉급마저 주지 못하던 시절, 서강변 특주집으로 학생들과 교수들을 데리고 나가 막걸리를 마시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위로하고 인격을 도야할 것을 주문하던 그의 가르침이 아쉬운 시절이 당시가 아니고 오히려 지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유럽미술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해부학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풍의 인물화 특히 인체에 대해 크나큰 관심을 가졌던 그는 근대기 한국화단이 일본을 통해 받아들여야 했던 일본화한 유화, 즉 인상파적인 분위기 위주의 유화가 아닌 기초가 튼실한 본향의 유화를 이 땅에 소개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그리고 이후 은둔자적 삶을 살면서도 후학들의 교육을 통해 자신의 예술의지와 예술관을 구현하려 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가 교육자로서 은퇴를 하고 다시 북한산 밑에 화실을 마련하고 제작했던 풍경화들은 구체적인 형상이나 대상의 묘사보다는 그 몽환적 분위기가 되려 생기를 주는 그림들이다. 그의 젊은 날의 크고 원대했던 미술가로서의 꿈을 노년에 되살린 겔까.
관련도서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이종우>, 문선호 편, 금성출판사, 1977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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