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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李種武)

예술가명
이종무(李種武)
구분
서양화가
생애
당림 이종무는 1916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1941년에 동경동방미술학원을 졸업하고 그때부터 동경미술가협회 및 동광회전 등에 참여하였다. 광복 후 1946년 동아백화점에서 개최한 <양화6인전> 등에 출품을 함으로써 해방 조국의 화단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1955년부터 국전에서 계속 특선을 차지하고 같은 해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서 취임, 1966년 퇴직할 때까지 대학미술 교육에 진력했다. 1955년부터 12회에 걸치는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국전 초대작가·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국전에 연 4회(1955~1958) 특선, 대한민국예술원상, 대한민국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약력
1916년 충남 아산 구온양읍에서 출생 1935년~1936년 춘곡 고희동 선생 사사 1937년~1941년 일본 동경 유학 1955년 제4회 국전 문교부장관상 수상 1955년~1967년 홍익대학 서양화과 교수 역임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 건립 기금조성 전람회 주관 1981년~1983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역임 1982년~1987년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 1985년 대한민국 국전 심사운영위원장 역임 /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1993년 대한민국문화훈장 수장 1998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예술활동
당림의 초기작품은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비교적 자연대상의 묘사적 접근에 가까웠다. 누드나 착의(着衣)인물, 도시풍경이나 고궁일각(古宮一角)의 점경, 그리고 사계(四季)의 자연풍경의 변화를 화폭에 담던 시기이다. 1950년대 후반쯤 서구에서 밀어닥치기 시작한 새로운 미술사조, 즉 추상표현주의의 양식적 흐름의 여파는 당림의 화면에까지 여진(餘震)을 몰고 왔다. 일시나마 추상미술에 몰입했던 기간이다.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약 25년간은 구상적 경향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실험적으로 형태를 파괴하고 색채를 분할 표출하는 추상적인 경향에 빠졌다가 1972년부터는 다시금 구상적인 세계로 돌아와서 자연을 소재로 하는 재구성에 힘을 기울였다. 당림의 근작 작품세계는 산의 연작을 통한 탐미적 자연의 접근에 있다. 옛 선인화가들이 산수(山水)를 선호하며 명승지를 찾아다니던 방랑벽이 어느새 이 화가에게도 전염되었다고나 할까.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의 소재원(素材源)을 찾아 전국의 산하를 누비며 순례의 발길을 끓지 않는다. 작은 화폭에 담아 온 풍경그림은 대형 캔버스에 옮겨지면서 작가의 감성과 밀착되어 세계를 재현시키고 있다.
대표작품
<향원정>(1955) <자화상> (1958) <산>(1982) <무제>(1968)
평론
(……) 이종무 작품의 양식적 고찰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형태와 색채로 나누는 것이 편리하다. 그러나 그것에 앞서서 정리해야 할 것은 그의 작품 전부가 풍기고 있는 전체적인 인상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의 작품양식은 한마디로 표현하여 구상이다. 이 구상이란 말을 사실이란 말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면서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뉘앙스가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구상이라는 것은 사실과 마찬가지로 자연 형태를 긍정하되 액면 그대로 전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다소간 화가의 주관을 가미함으로써 대상의 자연을 부분적으로 자기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구상작품은 사진과 같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고 붓의 움직임과 재료의 효과가 느껴지는 그러한 진실감을 느끼게 한다. 그 결과 구상작품은 사진과 같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고 붓의 움직임과 재료의 효과가 느껴지는 그러한 진실감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구상회화는 사실회화와 추상회화의 중간지대에 서식하며 화가의 주관을 극도로 객관화시키고 있다. 화가 이종무의 작품세계를 구조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형태감각은 수평구도이다. 사람의 시선은 좌우로 운동하기 쉽기 때문에 수평감각은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다. 화가 이종무가 수평구도를 즐겨서 쓴다는 사실은 조형작업이라는 인공을 떠나서 그의 선천적인 인간형까지도 따지고 들어가야 한다. 즉 거만하지 않고 가장 평민적인 마음씨를 지니고 있는지라 웅대한 것과 장엄한 기상보다는 조촐한 것과 소박한 것을 즐기는 마음의 취향이 긴장을 고조하고 화면의 격만을 따지는 수직구도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수직구도의 작품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수직구도일 경우에도 직각적인 것이 아니고 대각적인 흐름으로 화면을 처리하는 것이 특색이다. 그는 황갈색의 색채를 좋아한다. 황갈색이란 말할 것도 없이 난색계통으로서 그것은 인간성의 부드러움이나 감정을 표시하는 데 적합하다고 본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취향에서 오는 황갈색의 취향은 곧 한국민족이 갖고 있는 황토의식에 집결된다. 따라서 화가 이종무가 황갈색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가 곧 선천적으로 한국민족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노경에 이른 화가 이종무는 미의 정체를 찾아 가장 구체적인 사실에서 가장 보편적인 추상의 세계를 왕복한 미의 순례자이며 가장 아름다움에 순응하려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 1950년에 제작한 <전쟁이 지나간 도시>는 6·25동란의 생생한 상처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전쟁의 직접적인 표현은 없어도 도시의 한 구석이 포화로 말미암아 허물어진, 폐허가 된 도시의 어느 공간을 화폭에 실현함으로써 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준 상처를 조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전면에 허물어진 건물을 배치하고 멀리 수평적으로 산을 묘사함으로써 아직도 전쟁의 분위기가 가시지 않은 절박한 감정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1955년에 제작한 <향원정>은 명실공히 그의 대표작이다. 이것은 100호 이상의 대작으로서 향원정을 화면 가득히 채워 놓은 몹시 구축적이고 중량 있는 작품이다. 원래 6각형인 고건물을 정확한 데생과 구상으로써 다룬 이 그림은 이종무의 실력을 여지없이 나타낸 가작이다. 묘사방법도 때로는 치밀하고 때로는 대범하게 처리함으로써 화면효과를 강약으로 처리하고 있다. 회삽한 색감이나 부드러운 붓자국이 온화한 화가의 미의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58년에 제작된 <자화상> 역시 그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빠레트를 손에 들고 한 손에는 붓을 들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 자화상은 거울에 비친 그 자신이기에 형상과는 반대되는 감각이 살아 있다. 캔버스로 향한 깡마른 화가의 모습은 선비의 풍모가 서려 있고, 화면 오른쪽에 그려 넣은 원탁과 그 위에 아무렇게나 놓아진 과일과 꽃병이 왼쪽의 화가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주제이지만 그 속에는 화가의 많은 드라마가 느껴진다. 1962년부터 1971년까지 9년간 추구했던 추상화는 형상은 자연의 어느 부분을 극대화해서 구조와 운동과 리듬을 조형적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색깔은 그가 좋아하는 황갈색을 주조로 하고 있어 역시 향토적인 의식이 서려 있다. ‘심상’이라는 주제보다는 작품 A·B·C로 분류되는 추상작품은 내재하고 있는 화가의 창작충동을 리듬에 따라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상작업은 화가 이종무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것보다는 그가 탐구하여 보고 싶은 또 하나의 세계였기에 1971년 이후는 그것을 떠나서 자기의 세계인 자연으로 돌아오고, 그 자연 속에서 무한대의 가능성을 찾고 그의 구조와 그의 구성을 탐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만년에 그가 몰두한 것은 1975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속 집착하고 있는 <산> 시리즈이다. 산이 갖고 있는 무한한 신비와 아름다움을 찾아서 그는 생애의 마지막 부분을 걸고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그때 동원되는 것은 이제껏 닦아온 기법과 이제껏 훈련해온 시각이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단순화를 시키고 대상을 크게 보는 것과 같이 그의 작품에서도 자질구레한 잔재주와 쓸데없는 군말이 없어지고 꼭 있어야 할 것만이 남게 된다. 이때 색채는 그가 즐겨서 쓰는 황갈색 계통이다. 그러기에 나는 화가 이종무의 작품세계를 향토의식에 집약된 미의 탐구자라고 부르고 싶다. - ‘향토의식에 집약된 美의 탐구자’, 이경성(미술평론가)
관련도서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이종무>, 금성출판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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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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