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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李俊)

예술가명
이준(李俊)
구분
서양화가
생애
남해 출생.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국전, 미협전, 미술대전 등 주로 아카데믹한 미술전에서 활약하였다. 후진 양성에도 힘을 써 중·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대학강단에 서기도 한다. 초기에는 야수파적인 화풍을 구사하면서 구상작품을 제작하였으나 1957년에 ‘창작미술협회’에 참가하면서 비구상 작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기하학적 추상화만 그린 것이 아니라 한때는 붓도 나이프도 쓰지 않은 맨손으로 그린 ‘핑거페인트’로 <피에로>를 선보여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기교를 억제하기 위해 대담한 면을 구성한 롤러기법을 구사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제2회 국전서 <만추>로 대통령상을 받자 부산 피난시절부터 출강했던 이화여대에서 전임을 요청해 30여 년 이화여대에 몸담았으며 6년간 미대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국전 심사위원장·초대작가를 역임하고, 국민훈장동백장, 3·1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미술분과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7년엔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올림픽 세계현대미술제’ 운영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약력
1939년 태평양미술학교 입학 1952년 이화여대 예술대학 미술학부 강사 역임 1953년 제2회 국전 대통령상 1953년 한국현대수채화협회 창립회원 1955년~1984년 이화여대 미술대학 교수 1960년 제9회 국전 귀항 출품 추천작가 1972년 서울특별시 미관지구 조정위원 1976년 3·1문화상 심의위원 1981년 이화여대 미대학장 해임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선 /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위원 1983년 제28회 대한민국예술원상 1984년 이화여대 미술대학 정년퇴임 / ’86아시아 경기대회 문화예술전문위원회 미술분과 위원회위원장 1986년 제2회 서울특별시미술대전 초대출품 추진위원 / 아시아 경기대회 전시분과 위원회 초대작가 선정위원회 위원장 및 총감독 /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 / 한국미술협회 회장 피선 1986년~1989년 예술의전당 이사 1987년 제3회 서울특별시미술대전 초대출품 추진위원장 / 3·1문화상 예술부 심의위원 /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 제36회 서울시문화상, 서울특별시 예술위원회 부위원장 1987년~1991년 홍익대학 미대 대학원 강사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이준 회고전
예술활동
이준(李俊)의 그림은 색채감각이 뛰어나며 그림에서 아름다운 조화와 율동감 그리고 생동하는 삶의 기쁨을 표현한다. 그림마다 즐거움이 가득 찬 색채의 축제와 같다. 자연은 그의 작업에 동기를 부여해 주고 끊임없이 창작의욕을 자극하는 무한한 보고(寶庫)이다. 그의 작품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되 그것을 자신의 직관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기하학적 화면분할에 의해 형성되는 조직적 구성 속에 자율적이고 순수한 색채의 율동을 결합시킴으로써 이지적이면서도 다분히 서정적인 색면추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준은 초기에는 야수파적인 화풍을 구사하면서 구상작품을 제작하였으나 1957년에 '창작미술협회'에 참가하면서 비구상 작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1970년대에는 색면구성적인 작품을 다수 제작하였다. 초기의 추상화가 대상 이미지를 추상화하는 것이었다면, 이 때의 작품은 기하학적 패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회화 공간은 면의 분할과 중첩에 의한 다원적인 것이다. 그의 색채 사용도 다원적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업은 더욱 세분화되고 예민해졌다. 섬세한 시각의 표현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러던 그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어느 정도 대범해지고 필치도 커졌으며, 날카로운 선이 아니라 계산된 점의 묘사가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최근작에 이르러서는 대비와 반복을 통해 더욱 색채의 수를 줄이면서 커다란 톤을 이루는 면의 세계로 전이한다. 결국, 화가 이준의 시작의 변모는 자연형태를 긍정하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구상을 거쳐 추상의 세계로 돌입하는데, 그 때 미학의 원칙인 형태와 선과 색채를 기본으로 모든 조형의 수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대표작품
<나부>(1957) <달무리>(1979)
평론
흔히 말하기를 예술은 인간이요, 인간은 예술이라고 한다. 이 말은 작품을 창조한 사람의 모든 것이 그 작품 속에 담겨진다는 것이다. 화가 이준을 이야기할 때 그의 인간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인간 이준은 온건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니고 있다. 평상시 그의 가라앉은 음성과 마찬가지로 그는 만사에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일을 처리한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그의 타고난 성격 탓도 있겠지만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닦은 수양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화가 이준을 말할 때 나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첫째, 미술교육자로서의 이준이고, 둘째로는 화가로서의 이준이 그것이다. 미술교육자로서의 이준은 일찍이 중·고등학교의 미술교사로 시작해서 이화여대 미술대학에서 다년간 미술교수로서 또한 학장으로서 미술교육의 일선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내가 화가 이준을 처음 만난 것은 1957년 이화여대 재직 당시 교수실에서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화가와 평론가라는 관계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은 있었으나, 한 식구로서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미술교육자로서 또는 미술행정가로서 사무적으로 유능한 그는 늘 보직생활을 병행했으며 드디어 미대 학장이라는 중책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이준에 대한 인간성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 당시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바로 그의 부드러운 인간성과 같이 우아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양식적으로는 사실이었고, 날카로운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 수채화에 능했으며 마찬가지로 유화에 있어서도 그의 예리한 감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그의 그러한 미의 세계였던 것이다. 사실이라기보다는 구상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것은 그의 작품 양식이 자연 형태를 저버리지 않되 자기의 주관적인 의견을 가미시켜 놓은 데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작품은 풍경, 인물 또는 정물이건 간에 인간 이준이 바라다보고 해석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 화가 이준의 활동무대는 국전, 미협전, 미술대전 등 주로 아카데믹한 미술전이었다. 그가 표현의 틀을 깨고 새로운 추상세계로 들어온 것은 1960년대였다. 동일한 미학적 바탕에 서면서도 표현의 방법이 추상적인 개념으로 흐른 것은 그의 연륜을 들 수 있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인생을 크게 바라다보는 그의 달관적 인생관의 작용에 있다. 1960년대 이후 그의 작품 세계에서는 기하학적인 추상으로서의 형태, 색채 등을 다루어서 시각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것은 그의 미학이 바꿔어진 것이 아닌 것 같은 미학의 선상에서도 대상의 표현을 크게 잡고, 감성의 풍요 속에서 새로운 미에 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가 시도한 형태감은 계산된 분할과 공간의 추리로써 모든 형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것이고, 그것에 옷을 입히듯이 색채의 아름다움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점과 선 등을 미학적으로 처리했는데, 곡선보다도 직선을 즐겨 썼고 이것은 마치 프리즘으로 여과된 태양광선과 같이 그곳에는 현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러한 추상의 경향은 1960년대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지고 있는 긴 여정이다. 다만 변화가 있다면 화면을 잘게 분할시키고 그렇게 분할된 화면에다 서정적인 미를 곁들이고 시각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업은 더욱 세분화되고 예민해졌다. 섬세한 시각의 표현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러던 그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어느 정도 대범해지고 필치도 커졌으며, 날카로운 선이 아니라 계산된 점의 묘사가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최근작에 이르러서는 대비와 반복을 통해 더욱 색채의 수를 줄이면서 커다란 톤을 이루는 면의 세계로 전이한다. 결국, 화가 이준의 시작의 변모는 자연형태를 긍정하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구상을 거쳐 추상의 세계로 돌입하는데, 그 때 미학의 원칙인 형태와 선과 색채를 기본으로 모든 조형의 수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화가 이준이 이루어놓은 작품의 세계는 외양적인 변화는 있어도 우등생의 품격을 지니고 있는 인간 이준과 화가 이준이 바탕이 되어서 세상을 보는 눈과 작품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었다. 그는 끝끝내 우등생이었고, 그의 작품은 우등생의 미학이었던 것이다. - ‘우등생의 미학’, 李慶成(미술평론가), 1994년 5월, 예화랑 이준작품전
작가의 글
(……) 현대미술은 바로 이러한 변화와 모순의 반영이었으니 그것은 인간이 현대라는 상황 속에 살면서 자기의 존재를 지키려 하는 구체적인 표현과 다름없는 것이며 따라서 현대미술은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반문명적·반사회적 방향을 취하는가 하면, 과학과 기술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와의 협조를 모색하기로 한다. 어느 경우이건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지 않고 생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려는 점에서 일치하며 이는 고전적인 미술관의 종언일 뿐 아니라 미술의 개념이나 기능마저 완전히 변화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예술이 현대라는 상황에 처한 인간의 존재양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때 그것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창조적 미술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 창조적 예술교육의 주창자인 미국의 앤드류스의 말을 빌어보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대의 위기는 인간성의 붕괴에 기인된다고 경고하고 이것은 정치적 억압이나 경제적인 빈곤 혹은 과학적 성과의 결핍 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확대된 인간성의 붕괴에 의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그의 극복은 정신적·미적인 성취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구체안으로서의 창조적 예술 교육을 내세우고 그것이 획일성·활거성·모방성·중후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일반 교육의 아카데믹한 성격과 명백히 대립시켰다. 참으로 창조적 예술교육은 교수가 없고 학생을 어떠한 구속도 받음없이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게 하며 사실이나 규칙을 가르치는 대신 예술은 개인을 해방하고 그것을 인간성의 일정한 발전법칙에 따라나가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이 주장은 개성교육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개성교육론은 불신과 회의 그리고 자아와 세계가 서로 대결하지 않을 수 없는 현대적 상황아래서 개인이 현존을 자각하고 세계에 있어서의 자기 정의를 옳게 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와의 화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위한 실마리를 예술에서 찾으려는 입장이다. 이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선 사람이 허버드 리드이다. 리드는 인간이 자기 정의를 도모하는 데 교육은 중요한 구실을 하며 더욱이 미적 감수성이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교육은 단순한 미술교육이 아니라 개개인의 지식이나 판단의 기초가 되는 지각능력과 자기표현의 방식을 길러주는 미적 교육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각국의 권위 있는 미술교육론의 공통점은 그 나라마다의 특수한 전통과 현실 그리고 국가적 역량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맹목적인 수용은 있을 수 없으며 우리나라의 전통과 현실 역량에 맞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조선일보>, 1976년 10월 2일, ‘생활에세이-변혁에 잃어버린 자아’
관련도서
<이준 畵集>, 이준, 국립현대미술관, 1994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이준>, 문선호 편, 금성출판사, 1977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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