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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동진(孫東鎭)

예술가명
손동진(孫東鎭)
구분
서양화가
생애
경북 출생으로 1952년 동경예대 미술학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경예술대학 미술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다. 동 대학원 1년을 마치고 1954년 파리로 가 국립예술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59년 파리 국립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그 후 귀국하기까지 파리, 칸느, 도빌의 국제미술전 출품, 그르노블 개인전, 스텔로, 잘라마다, 파사와의 4인전 등 눈부신 화력을 보였다. 1960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대 미대, 세종대 교수로 있으면서 1976년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기까지, 유영국, 이준, 이대원 등과 ‘新象會’ 동인 활동(1962∼1964)을 하기도 했고 거의 매년 국내 개인전 및 국제미술전 출품을 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손동진의 작품은 서구적 고전과 동양적 감성의 탁월한 조화를 성취했으며 특히 구상에서 비구상에 이르는 과정을 필연적 연관성을 가지고 보여주고 있다.
약력
1943년~1944년 제22회~23회 조선미전 입선 1952년 국립동경 예술대학 미술학부 및 동 대학원 졸업 / 동경예술대학미술콩쿠르 대상(일본 동경예대) 1954년 프랑스 파리 국립미술대학 졸업 / 6·25 4주년기념 미협전 대통령상 1955년 파리국제미술전(프랑스 파리) 1956년 파리앙데팡당전(프랑스 파리) 1957년 까뉴국제회화제(프랑스 까뉴) 1958년 DEAUVILLE국제전(프랑스) 1959년 귀국개인전: 도불작품전, 중앙공보관 1959년~1981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1960년~1977년 서울대, 이화여대, 세종대 미대 교수 1962년 뉴욕현대미술전 1969년 상파울루비엔날레(브라질 상파울루) 1972년 동경국제미술전(일본 동경) 1982년 Exposition d'Art 콩쿠르대상(프랑스 파리) 1983년 제7회 조형미술전 대상(프랑스 파리) 1986년 제39회 파리 Salon de la Societe D'Art 대상 수상 1997년~1998년 한국근대미술: 유화-근대를 보는 눈, 국립현대미술관
예술활동
손동진의 회화사는 외견상, 1950년대 파리 시절을 제1기로, 1960년~70년대 서울 시절을 제2기로, 그리고 오늘날의 그의 두 번째 파리 시절을 제3기로 하면서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양식적 변천을 기준 삼으면 손동진의 회화세계는 크게 보아 두 단계로 나뉘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1957년∼1959년에 그려진 <탈춤> 연작을 기점으로 하여 1970년 신세계미술관에서의 탈춤을 주제로 한 개인전을 거쳐 1976년의 <기마상>, <우월성>을 정점으로 하는 그의 한국적인 것에의 아케이즘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재차 도불 이후 주로 1980년대에 그려진 <誕>, <尙>, <吾>에서 볼 수 있는 정상적인 것의 문양에 대한 명징한 구성주의라 할 수 있다.
대표작품
<게>(1984) <무제>(연도미상)
평론
화가 孫東鎭은 지금 파리에서 살고 있고, 거기서 그 곳의 화가로서 활약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在佛화가이고, 파리의 예술적 세계성에 의해 능히 ‘세계적’이라 일컬을 수 있는 한국인 작가이다. 사실 그가 프랑스에서 이룩한 畵業의 위력은 자랑할 만하다. (……) “한국인 화가 손동진의 그림들은 기하학적이고 상징적인 모티브에 의해 구성된, 다채로운 광채를 띤 면 직물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각 부분들 하나 하나가 조화를 이루며 변천해가는 모습은, 자주색과 붉은 색의 물고기들이 청색, 녹색 아라베스크 무늬에 녹아 있는 양식의 통일성을 창조하고 있다. 기이하게 생긴 이방의 새들은 장식적 곡선의 리듬에 의해 들어 올려진 탈춤꾼(danseurs masques)을 따라가고 있다.” (……) 어린 시절 그는 달밤을 아주 좋아했다. 그의 고향, 이 천년 古都의 상공에 연등처럼 떠있는 만월은 그를 만월성의 고고학적 시간성 속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그는 괜히 신이 나서 아무도 없는 데서 춤을 추었다. 물에 잠긴 듯 희푸른 일색으로 물든 풍경 속에서 그림자만은 짙은 감색으로 약동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에게 이상한 생명감을 주었으며, 이를 표현해보고 싶은 충동을 건드렸다. 대낮에 드러난 현실이 아니라 달빛에 착색된 과거가, 그리고 ‘지금, 이곳’이 아닌 천년 세월의 고대에 반영된 자신의 그림자 춤이 그의 예술 충동을 자극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 1959년 서울의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손동진 귀국작품전>이 열렸다. 오로지 미술수업을 위하여 붓 한자루로 현해탄과 대서양을 노저어갔던 손동진은 그의 파리의 성공작들을 만재하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의 귀국전은 해방 이후 처음 있는 대성황이라고 그때의 신문들은 말하고 있다. 파리의 ‘에콜 나쇼날 쉬페리에데 보자르(파리 미술대학)’를 다닌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국내 화단의 관심은 온통 그에게 집중되었는데, 그 관심에는 한편에 부러움과 다른 한편엔 “어디 한번 보자”는 경쟁적인 호기심이 조금씩 섞여 있었던 것 같다. <시실리의 回想>, <오달리스끄>, <인공낙원>과 같은 손동진의 작품은 서구적 고전과 동양적 감성의 탁월한 조화를 성취했으며 특히 구상에서 비구상에 이르는 과정을 필연적 연관성을 가지고 보여주고 있다고 평한 사람도 있었고, 손씨의 詩情어린 동양적 여운은 스스로 만든 기계문명에 피로해진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동경에 상응하며 그가 다른 작가의 직접적 영향을 기탄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의 화가적 성실성에서 기인한다는 좀 심드렁한 평을 단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손동진은, 앵포르멜의 유치한 모방에 급급했던 1950년대 우리 화단의 맹목적인 서구 추수주의 경향에 비하면 향후 우리 한국 현대 회화가 나아갈 보다 주체적인 방향을 향하여 훨씬 앞질러 나가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적어도 그는 현대추상회화의 최고덕목으로 떠받들어지던 그 몽매한 ‘모데르니테(modernite)’를 “멀리 서양에서 찾을 것도 없이 우리의 武烈王陵의 石龜像에서도 그 승화된 표현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 그 당시에는 몇 안 되는, 선취적인 예술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 - ‘정신적인 것과 고요함의 세계’, 황지우(詩人), 1987년 봄
관련도서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손동진>, 금성출판사, 1977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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