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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승(金仁承)

예술가명
김인승(金仁承)
구분
서양화가
생애
1910년 개성에서 태어나 도쿄미술학교를 수학하였다. 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으면서 화가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어 4번 연속 특선한 뒤, 선전 추천작가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 이화여대 미대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1949) 및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이사장, 국제조형미술협회 한국위원장(1967) 등을 지내면서 한국 서양화의 구상 계열을 주도하였다. 1974년 이후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이전의 인물화에서 그 대상이 장미와 모란으로 바뀌면서 장미화가, 모란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2001년 6월 사망할 때까지 대한민국미술대전과 각종 초대전 등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한국 화단에 있어서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일찍부터 사실주의의 정신과 기법을 고수하였다. 그의 특징은 인물화로 중산층의 세계, 특히 소녀나 여인을 심미적 시각에서 그렸는데 그것이 하나의 전형으로서 한때 국전에서 유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전의 친일 행각으로 인해 한국 현대사에서의 입장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며 그럼에도 한국 근대화단에서 전형적 화풍을 구축한 대표적 작가라는 의미가 있다.
약력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 덕수궁상 1937년~1940년 조선미술전람회 연4회 특선 1939년 개인전, 삼원화랑 1947년~1972년 이화여대 미대 교수 및 학장 1949년~1981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 1953년 제3회 국전 대통령상 1955년~1958년 대한미술협회 부이사장 1957년~198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3년 제5회 대한민국문화훈장 1965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66년 이화여대 명예 문학박사학위 취득 1967년~1970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위원 1967년 국제조형미술 한국위원장, 국제미전(브라질 상파울루) 1967년 제5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1968년 3·1문화상 1969년 대한민국문화훈장동백장 1971년 개인전, 현대화랑 1973년 개인전, 아넥스갤러리(일본 동경) 1976년 개인전(미국 로스앤젤레스) 1990년 개인전, Simmonson Gallery (미국 로스앤젤레스)
예술활동
1932년 미술공부를 위해 동경으로 떠나 학생신분으로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皇紀) 2000년(1940) 봉축기념전’에 출품,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화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는 제16회 선전(鮮展)에 <나부(裸婦)>를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고 그 후 연속 4회 특선으로 선전의 추천작가로 활동하였다. 대상을 면밀하게 관찰한 후 정확하게 화면 위에 표현하였으며 객관적인 사실과 함께 주관이 가미된 새로운 리얼리즘의 표현을 시도하였다. 작품에 대한 김인승의 태도는 정확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대상을 면밀하고 정확하게 관찰한 후, 주제를 어떻게 화면 위에 작품화할 것인가를 고심했다. 따라서 그는 주제의 표현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게 되었는데, 그 재현은 결국 객관적인 진실보다 주관을 충분히 가미한 새로운 리얼리즘의 표현이었다. 대상에 대한 관찰과 아울러 김인승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뛰어난 소묘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구성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김인승은 작품에 완벽성을 기했다. 굉장히 철두철미했으며 구성, 터치 등 모든 조형적 요소를 완전하게 이해해 나갔다. 김인승의 작품 세계 저변에 깔려있는 바탕은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서양의 사실적인 미술기법을 이용하였으며 아주 모범적인 화풍에 기초하고 있다. 초기에는 여인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으며 이국적인 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주를 이루었고 완벽한 표현과 마무리를 특징으로 한다. 그의 <장미>시리즈는 최근의 경향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 장미라는 물체를 꿰뚫는 정확한 관찰력과 그것을 부각시키는 수준 높은 솜씨에 의해 작품이 형성되고 있다. 초기의 나부시대든, 그 후의 풍경 내지 정물시대 건간에 자연을 보는 정확한 관찰과 그것을 박진감있게 다루는 뛰어난 기술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작품활동은 86세 때인 1996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열아홉 번째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중단했다.
대표작품
<풍경>(1951) <홍선>(1954) <청>(1966)
작품 리뷰
<봄의 가락(春調)>, 1942, 1473X2070mm 한국은행 소장품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은 <춘조(春調)>, <첼로> 등의 별칭을 붙이고 있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1942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김인승이 제21회 선전에 추천작가로서 출품했던 작품이다. 동경미술대학 재학시절인 1936년부터 선전에 입선하여 제16회 선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인승은 30대 초반의 나이에 추천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자신감을 반영하듯 이 작품은 대형 캔버스 두 폭을 사용해 작가의 기량을 총동원하여 완성시킨 걸작 중 하나이다. 작품의 제목인 <봄의 가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봄을 그리는 사람들의 설렘과 희망을 첼로연주가와 그의 연주를 듣는 청년군상들의 초상에 빗대어 형상화한 것이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구도의 치밀성과 인체의 해부학적 묘사, 세심한 채색, 의자, 첼로, 바이올린, 보면대, 슬리퍼, 외투 등 소품의 적절한 활용이 작품의 완성도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평론
화가 김인승은 유채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캔버스 위에 정착시키는 기법을 추구한 전형적인 유화 화가이다. 그것은 화가 김인승이 우리나라 근대회화사상 회화의 본질문제를 누구보다도 잘 다루고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태도는 정확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면밀하고 정확하게 살펴보고, 그 다음에 그 주제를 어떻게 화면 위에 작품화하느냐에 고심한다. 따라서 주제를 눈에 비치는 대로 재현하게 되는데, 그 재현이 객관주의적인 진실보다는 그것에다 주관을 다분히 섞은, 그러한 새로운 리얼리즘이다. 이러한 사실계통의 작품은 사실상 오랜 세월 미술사의 주류를 이루어 왔으며 자연의 연장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왔던 것이다. 이들의 예술 이념은 어디까지나 자연을 창조의 모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자연보다 더 심오한 리얼리티를 표출하는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방이나 집안이라는 인조공간 속에 풍경화, 인물화 또는 정물화 같은 자연재현의 작품을 도입함으로써 자연의 아름다움을 실내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부드러운 붓의 움직임과 조화를 이룬 색감의 세계는 김인승 작품의 본질이 되고 있지만, 그것보다도 본질적인 것은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뛰어난 데생력에 있다. 자연을 형태와 색채로 나눌 수 있다면, 곧 형태는 사람의 몸과 같은 것이고 색채는 옷과 같은 것이다. 화가 김인승은 이 두 가지 일을 다 잘 다루는 우수한 화가이다. (……) 그의 예술의 바탕은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인 서양의 사실적인 미술기법이지만, 그의 조화로운 정신구조는 휘몰아치는 유행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존속하는 고전적인 조화와 균형의 세계를 나름대로 창조해온 데에 있다. 그의 유화작품은 뛰어난 기술의 표현으로서 작가의 우수한 능력을 드러낸다. 일상생활 중의 태도가 그러하듯이 단정한 마음가짐은 질서와 조화를 작품 내에서도 이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화가 김인승은 한국 근대미술의 올바른 길을 걸어 왔으며 70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그 길을 꾸준히 걷고 있다. 비록 몸은 이역 땅인 미국에 있지만 조국을 향한 마음과도 같이 꾸준히 예술의 길을 걷고 있다. 천생 화가로 태어났고, 화가로 살아가는 노대가의 화업은 그의 생애를 수놓은 개인의 역정이지만, 또한 그것은 우리의 근대 회화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金仁承의 人間과 作品世界’, 李慶成(미술평론가)
관련도서
<韓國近代繪畵選集: 洋畵>, 李龜烈 편, 금성출판사, 1990 <김인승 화집>, 동아일보사, 1987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김인승>, 금성출판사, 1979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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