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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호(張民虎)

예술가명
장민호(張民虎)
전공
연기
개요
장민호와 연극의 인연은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에서 시작된다. 1946년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고향인 황해도에서 서울로 내려오던 중 명신중학교 졸업장을 분실하면서 대학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는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당시 한국 신극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던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에 찾아간 것이다. 현철은 이미 191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시마무라 호오게쓰(島村抱月) 밑에서 연극의 기본을 배웠고 후지나미 후요오한테서 분장술과 화장품 제조기술까지 익힌 인물이다. 따라서 장민호는 현철의 문하에서 6개월 동안 연극사, 배우술, 연출, 심지어 분장술에 이르기까지 연극창조의 기본을 익힐 수가 있었다. 장민호의 연극인생은 기독교 계통의 한 소인극단과 인연을 맺으면서 전기를 맞이한다. 당시 을지로4가 국도극장 뒤에서 이보라라는 사람이 원예술좌라는 극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모세>라는 공연으로 지방 순회공연을 나설 계획이었으나 마침 모세 역의 주인공이 지방공연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장민호가 대타로 출연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생애 첫 무대였으며, 이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비록 아마추어 극단이긴 했지만 원예술좌에서 모세 역으로 자신감을 얻은 그는 생계를 위해 KBS라디오 성우로 입사하게 된다. 이는 그가 오랜 방황과 불안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 박학(朴學) 등 좌익계열 연극인들과도 함께 일하게 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스타니슬랍스키라든가 메이어홀드의 연기술도 간접적으로 익힐 수가 있었다. 특히 장민호는 그들에게서 철저한 연습과 연습의 반복, 그리고 발성법 등을 배우게 된 것이다. 또한 외모에 있어서나 발성법 등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방송과 극단을 오가면서 연기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즉 이광래 주도의 제3무대에 참여하여 <젊은 그들>(김동인 원작), <민족의 전야>(이광래 작) 등에 주연급으로 출연했고, 1949년에는 한운사, 조남사, 최무룡 등과 직접 청막극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6·25 전쟁 중에는 이광래, 박경주, 최무룡, 김경옥, 최창봉, 이해랑 등과 신협 재건에 힘썼다. 이해랑과의 만남은 1962년 1월 국립극단이 정식으로 출범할 때까지 이어져, 그와 함께 단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협이 잠시 재건되었을 때는 다시 그 단체에 가담하여 주역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곧바로 국립극단에 복귀하여, 1967년 1월 국립극단장에 취임하게 된다. 당시 이해랑은 정치에 한 발을 걸쳐놓고 이동극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민호는 잠시 이해랑과 노선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단장에 임명된 그는 그간 극장측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던 것을 거부하고 레퍼토리선정에서부터 연출가 초빙, 배역선정 등을 반드시 극단 측과 협의하도록 했다. 또한 프롬프터를 없애는 것은 물론 낮 공연을 없애고 공연 기간을 10일로 정해진 것을 20일로 늘임으로써 장기공연 체제를 갖추겠다는 계획도 추진했다. 극단에도 유능한 신인들을 끊임없이 수혈했고, 특히 장기공연 체제 구축과 세계명작극장시리즈 공연은 순전히 그의 아이디어와 집념의 산물이었다. 그는 국립극단장을 넘어 연극계, 더 나아가 문화예술계의 지도자로서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로서의 활동을 왕성하게 펼쳐나갔다. 단체장을 은퇴한 뒤에는 지도위원으로 있으면서 국립극단과 외부의 사설극단 출연도 쉬지 않았다. 1960년을 전후하여 신협의 <안네의 일기>와 국립극단의 <대수양>에 출연하여 이해랑과 이진순으로부터 극찬을 받으면서 한국 연극의 대배우로서 우뚝 서기 시작한 그는 2001년 자전적인 연극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이근삼 작)를 비롯하여, 최근에는 국립극단의 <인생차압>에 출연하여 1957년 이후 47년만에 주인공을 맡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 참고: ‘장민호 론’, 유민영, <연극분석과 공연예술사>, 한국연극사학회, 1999
생애와 약력
1945년 재령명신학교 졸업 1947년 조선배우학교 연수 1949년 청막극회조직 1966년 한국성우협회 이사장 1967년 국립극단 단장 1968년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 / 중앙국립극장 부단장 1970년 한국연극협회 이사 1977년 한국텔레비전 연기자협회 명예회장 1986년~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95년 현 국립극단 원로단원 / 연극배우협회이사, 이해랑 연극재단 이사
상훈
1958년 제1회 방송문화상 1963년 서울시문화상 198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82년 국민훈장 목련장 1988년 대한민국예술원상 / 예총 예술문화상 1996년 문화훈장(보관문화훈장) / 제23회 한국방송대상 남자연기자상 1997년 97 올해의 배우상
작품활동
1947년 성극 <모세> 출연 1951년 <햄릿> <오델로> <붉은 장갑> 1955년 <금삼의 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60년 <안네프랑크의 일기> <죄와 벌> <빌헬름 텔> 1964년 <학의 다리로 서다> <무지개> 1968년 <북간도> <환절기> 1969년 <환상살인> <한산섬 달 밝은 밤에> 1973년 <성웅 이순신> 1977년 <고랑포의 신화> <광야> <파우스트> 1983년 <제3의 신> <나래의 섬> 1985년 <내일 그리고 또 내일> 1988년 <말괄량이 길들이기> <팔곡병풍> 1989년 <간계와 사랑> 1990년 <외로운 도시> <남한산성> <오이디푸스왕> 1994년 <맹진사댁 경사> <노부인의 방문> 1995년 <허생전> <눈꽃> 1996년 <리차드 3세>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997년 <파우스트>(연기생활 50주년 기념공연) <태> 1998년 <햄릿> <십이야> <대한국인 안중근> <천명> 2001년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이근삼 작, 김영수 연출, 극단 신화) 2003년 <보이체크>(뷔히너 작, 유리 부드소프 연출, 국립극단) 2004년 <인생차압>(오영진 작, 강영걸 연출, 국립극단)
대표작품
<성웅 이순신> <파우스트> <맹진사댁 경사> <태> <햄릿>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 <인생차압>
리뷰
생애 네 번째로 <파우스트>에 도전하는 남자가 있다. 연극계의 원로배우 장민호 씨다. 국립극단(예술감독 정상철)이 97 세계명작무대로 마련한 <파우스트>(17~24일 국립극장대극장)는 고참 단원인 장민호 씨의 연기생활 50주년 기념공연을 겸하고 있다. “아마 파우스트 역을 평생 네 번씩이나 하는 행운의 사내는 나 밖에 없을 겁니다. 후배들이 50돌을 축하하는 무대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딱 떠오른 작품이 <파우스트>였어요. 1966년 서항석, 1974년 이해랑 그리고 1984년 독일 연출가의 무대에 섰으니까 10년쯤 마다 <파우스트>를 한 셈입니다. 이제 저도 괴테가 극에 썼던 파우스트의 나이에 얼추 다다랐습니다. 칠순의 파우스트, 평생을 학문에 바쳤으나 지식과 삶의 허망함에 전율하며 새롭게 정염을 불태우는 파우스트. 나 또한 생을 송두리째 던져넣은 연극무대에서 파우스트의 그 처절한 마음을 되새겨 볼 작정입니다.” 1924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장민호 씨는 1945년 월남해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하면서 연극인의 길로 들어섰다. 1950년 극단 신협의 단원으로 본격 배우생활을 시작했고, 1953년 신협이 국립극단의 전속 단체가 된 뒤 한번도 옮기지 않았으니 국립극단의 산 증인인 셈이다.1969년과 1979년 두 차례 극단장을 지낸 그는 “모든 예술의 근본인 연극계에서 후배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는 게 꿈이었다”고 말했다. 떠들썩한 기념공연보다 알맹이 있는 50주년 무대를 보여주고 싶다는 장민호 씨의 뜻은, 평소 그를 존경하는 선배로 따르던 연극인들을 불러모았다. 메피스토 역의 신구 씨, 주 역의 김성원 씨 등이 한걸음에 달려왔고, 연출가 이윤택 씨가 70대부터 20대까지 50여 명의 배우들을 다듬는 조율사로 합류했다. (……) - <한겨레신문>, 정재숙, 1997년 11월 3일 국립극단이 1950년대의 대표 레퍼토리로 선정해 다시 무대에 올리는 <인생차압>(4월 13∼19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악질적인 친일사업가 이중생 역을 맡은 원로배우 장민호 씨. 1957년에 초연한 <인생차압>에서 31살 나이로 출연한 뒤 47년만에 다시 주인공을 맡아 화제다. “당시엔 30대라 이중생을 하기에 너무 어렸고 지금은 또 너무 늙어버린 것 같아요. 20년은 젊게 보여야 되는데, 걱정이야. 젊을 땐 분장으로 나이들게 보일 수 있지만 늙어서 나이를 감추는 건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장씨는 50대 후반으로 설정된 이중생 역을 맡은 자신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모르겠다고 겸손해 했지만 연습실 밖으로 울리는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이런 걱정을 날리고도 남는다. 연출을 맡은 강영걸 씨 역시 장씨의 연기가 나이를 의심스럽게 만든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오영진 선생의 희곡이 정말 좋아요. 치밀한 내용과 구성 그리고 개성 있는 등장인물 등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명작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풍조가 외제 선호도가 심했어요. 연극도 외국 작품만 좋은 줄 알았는데, 이 작품이 그런 편견을 깼죠. 이런 작품은 썩힐 것이 아니라 국립극단의 레퍼토리로 계속 해야 됩니다.” 극작가 오영진의 첫 희곡 <살아있는 이중생각하>는 1949년 발표 당시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1957년 <인생차압>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국립극단 제5회 공연으로 오르면서 큰 인기를 끈 작품. 일제시대와 해방 후의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사기, 배임, 횡령, 공문서 조작, 탈세 등으로 축재를 일삼다가 재산을 잃기 싫어 위장자살 쇼를 벌이는 이중생의 이야기다. 워낙 연극이 인기를 끌어 다음해 유현목 감독이 영화화했으며 장씨는 영화에서 이중생의 아들 역으로 출연했다. (……) 국립극단 이윤택 예술감독의 적극적인 권유로 이 역을 다시 하게 됐다는 장씨는 이번에 자신의 이미지를 확 바꿔놓겠단다. 나이든 이후 주로 진지하고 심각한 역할을 해왔던 터라 이번에는 비열하고 웃긴 캐릭터로 관객들과 만나겠다는 것. “당시 연출을 맡았던 이해랑 선생이 원작에 충실하게 했다면 이번엔 좀더 코믹하게 만듭니다. 완력도 없으면서 허풍떠는 이중생 역할을 위해 권투글러브를 끼는 장면이 나오는 등 훨씬 캐릭터가 부각될 거에요.” 백성희 씨와 함께 국립극단 최고령 단원이지만 여전히 젊은 배우들 못지않은 연기 열정을 보여주는 장씨. “나는 배우에겐 죽음이 은퇴라고 생각해요. 생명이 있는 한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나야죠.” - <국민일보>, 장지영, 2004년 4월 9일
창작노트
장민호 : 화가는 그림을 남깁니다. 소설가는 책을 남기지요. 다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극은 그렇지 못해요. 현장예술이기 때문에 지나면 그만입니다. 제 배우 인생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때 그 무대’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온 세월이었지요. 여담 하나 하지요. 지난번 <파우스트> 공연 때 주님의 교회 이기철 목사가 자신의 설교를 담은 테이프를 주고 갑디다. 저로서는 난생 처음 만나는 분이었는데, 내용인즉 ‘참다운 프로 정신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어요. 전에 <파우스트>를 본 그가 프로 정신의 산 증인처럼 저를 설교에 인용했더군요. 이처럼 배우 인생이란 작품을 통해 그때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동고동락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정재왈 : 정확한 수치는 아니겠습니다만, 대략 연극 출연작이 1백70여 편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장민호 : 대표작으로 꼽으라면 여럿이 있지요. 김동인 작, 박진 연출로 1957년 당시 국산영화 붐에 맞서 악극파와 신극파가 합류해 만든 <대수양>이 우선 기억납니다. 역시 주인공 수양 역을 맡았는데, 얼마나 목소리가 낭랑하고 컸던지 주변에서 말이 많았어요. 당시 목소리 크기로는 안평대군 역의 황해가 유명했는데, “황해보다 더 큰 목소리 들어봤냐”며 제 목소리가 주변의 화제거리가 됐던 적이 있습니다. 이진순은 “그곳에 군계일학이 있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 ‘다시, 세월을 넘어 무대 위의 자존으로 선다’, 정재왈 정리, <한국연극>, 1998년 9월
관련도서
<장민호 론>, 유민영, 한국연극사학회, 1999 <한국예술총집>, 대한민국예술원, 2000 <우리 시대의 연극인>, 서연호, 연극과인간, 2001
연계정보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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