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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래(李光來)

예술가명
이광래(李光來)
전공
극작
개요
이광래의 본명은 흥근(興根)이며 호는 온제(溫齋), 필명은 광래(光來)이다. 그는 사회사업가인 이순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부족함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본에 유학까지 가게 된다. 어릴 적 그는 동네에 소문난 개구쟁이였다고 하며 이러한 행동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결코 얌전하지 않은 생활을 했다. 결국 이러한 고집과 자신감은 훗날 그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색채를 분명히 하는 연극을 이어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는 와세다대학 영문과 재학 중 입센과 체홉의 작품을 읽으면서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귀국을 하게 되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인의 길을 걷게 된다. 처음 소속되었던 단체는 유치진, 서항석 등이 주도하고 있던 극예술연구회였으며, 일제에 의해 해체된 후에는 동양극장에서 활동하던 이들과 연합하여 중앙무대를 창단하고 연학년, 신재현 등과 함께 공연하며 극작, 연출, 제작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극 경험을 쌓는다. 1940년대에는 황금좌에 관여하면서 국민연극경연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좌익계열의 단체였던 조선연극동맹에 대항, 옛 중앙무대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민족예술무대(민예)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한다. 이후 신극협의회 간사장, 극단 신협 초대 대표 등을 거치면서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 중 각지를 순회하면서 공연을 했고, 1958년에는 소극장 운동 단체인 원방각을 설립하여 그에게 처음으로 연극에 대한 동기부여를 했던 입센의 <유령>을 공연했다. 극작가, 연출가로서 뿐만 아니라, 연극학자로서의 이광래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는데, 일찍이 대학연극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학연극경연대회(1948)를 실시했으며 드라마센터 개관 작업에 참가하고 서라벌예술대학, 동국대 연극학과 등에서 강의를 하며 수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는 연극 이론에 대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이미 1960년대 초반에 아리스토텔레스와 브레히트에 관해 논하였으며 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이론과 실기 양면에서 고르게 활약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참여했던 극단의 흐름을 살피자면 극예술연구회(1935)에서 중앙무대(1938), 황금좌(1940), 민족예술무대(1945), 신극협의회(1950), 신협(1950), 극협(1951), 원방각(1958)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광래는 ‘뛰어난 연극 실험가이자 교육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수십 편의 창작 및 각색 희곡과 논문을 쓰고 여러 개의 작품을 연출하는 동안 당대로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이론을 터득했으며 이를 후학들에게 전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등장인물의 내면 의식을 중시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당시의 희곡들이 인물과 인물 또는 인물과 집단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관계를 주로 다루었는데 비해 이광래는 자신의 창작 희곡은 물론이고 특히 각색 작품에서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다음으로는 음악극에서 노래의 사용을 꼽을 수 있다. 다른 작가들도 노래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작품에서는 노래를 해야 하는 필연성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으나 이광래는 필연성보다는 오히려 작품의 생동하는 인물들의 행동 전개에 추진제 구실을 한다. 다시 말하면, 다른 작품의 인물들은 원래 노래를 하게 되어 있는 장면에서만 노래를 했지만, 이광래의 인물은 대사로 처리해도 될 것을 노래로 했다는 차이점을 보인다. 이상에서 나타난 것처럼 파격적이고도 자신 있는 행동은 풍부한 실전 경력과 다양한 이론적 지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만일 그가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표현주의나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을 몰랐다면 위와 같은 방법, 즉 인물의 심리 묘사라든지 노래를 통한 이화 효과 등은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사실주의 연극의 정확한 이해, 각색 작품의 수준 향상 등 많은 업적들이 있는데 이들 역시 탄탄한 지식과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이다.
생애와 약력
1928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1930년 일본 동경고등학교 영문학과 졸업 1933년 일본 와세다대 영문학부 중퇴, 귀국. 조선일보, 중앙일보 기자 입사 1935년 극예술연구회, 조선연극협회 입회. 동아일보 신춘문예 <촌선생> 당선 1936년 중앙무대 조직 1943년 제2회 국민연극경연대회 황금좌 <북해안의 흑호> 참가 1945년 극단 민예 조직. 서울시 문화위원 1947년 한국무대예술원 조직. 예술국장 1948년 서라벌예술학원 강사 1949년 한국연극학회 간사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1950년 신극협의회 간사장. 극단 신협 대표 1951년 극단 극협 대표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장 1955년 한국문학가협회 이사, 희곡분과위원장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58년 국제극예술협회 한국지부 이사 1960년 한국연극연구소 상무이사 1962년 동국대학교 연극학과 강사. 한국연극협회 이사 1968년 타계
상훈
1963년 대한민국문화포장 1965년 오월문예상 연극본상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공로상 1969년 3·1연극상 특별상
작품활동
1934년 <지는 해> 1935년 <촌선생> 3막 1937년 <석류나무집> 장막 / <해 질 무렵> 장막 / <태양의 집> 장막 1938년 <항구의 노래> 장막 / <아베마리아의 만종> 단막 1939년 <지새우는 뒷골목> 장막 1940년 <지하도> 장막 1941년 <청계천 풍경> 장막 1943년 <북해안의 흑호> 장막 / <아리랑 처녀> 장막 1944년 <동상(銅賞)> 장막 1945년 <독립군> 장막 / <백일홍 피는 집> 장막 1946년 <최후의 밤> 장막 / <구원의 모상(母像)> 장막 / <청춘의 열정> 장막 1947년 <청춘산맥> 장막 1948년 <들국화> 장막 / <민족의 전야> 장막 / <탈곡(脫穀)하는 미이라> 단막 1952년 <낙조> 장막 1953년 <다시 피는 꽃> 장막 1954년 <이상(裡像)> 장막 / <견우와 직녀> 3막 음악극 1955년 <집> 2막 3장 1956년 <해와 달과 별과> 단막 / <반달이 떠 있는 새벽> 단막 1957년 <기류의 음계> 단막 1962년 <고도 있는 인간광장> 2막 음악극 1964년 <한낮에 등불 아래 나비들> 단막 / <여명기> 3막 음악극 1965년 <붉은 손들 가운데서> 단막 / <남모랑과 준정랑> 3막 4장 음악극 1966년 <지옥문을 열어라> 2막
대표작품
<촌선생> <천변야화> <북해안의 흑호> <구원의 모상(母像)> <지는 해> <석류나무집> <견우와 직녀> <대수양> <지옥문을 열어라>
저서
<촌선생>, 이광래, 현대문학사, 1972
리뷰
(……) 그는 한국 반사실주의 희곡문학의 개척자인 점과 연극운동을 위한 희곡작가로 대표되며 현대연극에 있어 그동안 내려오던 통념인 연극은 종합예술이란 점을 깨고 연극은 연극나름의 고차원적 예술임을 확립시킨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희곡에 있어 정제어린 고어의 부활 또는 변형이입과 창과 시의 활용, 의식의 흐름의 새로운 시도 등은 문학사적으로 볼 때나 그의 실험적 태도로 볼 때 대단한 실험극작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뮤지컬의 새로운 시도는 한국연극의 한국적 정립에 큰 영향이 미치리라 믿는다. 또 스테이지·테크닉의 대담한 이용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점이 그의 수다한 작품이 보여준 온제의 문학사적 위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희곡은 어디까지나 문학에서는 완성된 일개 작품이지만 연극으로서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개소의 입장에 선다. 그러므로 연극사적으로 볼 때 작가로서의 온제는 그 의미가 다르다. 즉 그는 최초의 반사실주의적 연극을 완성, 형상화시킨 작가이며 동시에 연출가로서의 선각자라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보여준 각색극들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런 점은 그가 작가이면서 일방 연출가라는 장점에서 비롯된 소치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보여준 신표현, 현대상징주의 등의 반사실적 경향의 작품집필 또는 형상화에 덧붙여 새로이 시도, 실험된 심포닉 드라마가 어느 정도 체계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는 한국 심포닉 드라마의 창시자이며 동시에 현대한국연극의 방향감각을 제시한 연극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다 그의 연극에 대한 본질적 연구로 비롯된 연극미학에 대한 이론은 연극의 본질을 최초로 체계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한국연극계에 공헌했다고 봐야 한다. 이 점은 가장 큰 그의 개척적 공적이라고 여겨진다. (……) - <온제 이광래연구>, 김흥우, 동국대 대학원 석사논문, 1977 (……) 1930년대 연극계에서 소극장운동이 시작된 것은 1931년 7월 8일 극예술연구회가 발족된 뒤부터의 일이다. 극예술연구회의 모체는 극영동호회라 할 수 있는데 홍해성, 윤백남, 이헌구 등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이 극예술연구회의 제10회 공연(1936년 4월, 부민관)에서 이광래의 <촌선생>(3막)이 이서향의 <어머니>(1막)와 함께 신인의 작품으로 첫 공연이 되었다. 일제시대의 이광래의 마지막 작품은 1945년 3월 정비석의 각색인 <청춘의 속리>(4막)이었다. 특히 광복직후 민족예술무대, 약칭 민예를 조직하여 좌익 극단의 통합체인 조선연극동맹과 대결하여 민족예술을 지킨 공적이 크게 인정되는 바이다. 연출가로서도 그 활약이 컸으니 그는 1938년 입센의 <헬게란드의 해적>을 중앙무대에서 공연한 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담배내기>(드라마센터, 1966)를 끝 작품으로 44편을 연출했다. 그의 극작가로서의 데뷔는 장막극 <촌선생>(동아일보, 1935년 1월 1일)이 신춘문예 당선되면서부터이다. 그의 극작가로서의 작품경향은 다분히 표현파적이라고 하겠다. 특히 인간의 의식세계를 지(知)·정(情)·의(意)로 분석하여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수법은 독창적이었다. 그리고 춤과 노래로 종합한 심포닉 플레이에 대한 시도도 그의 극작 경향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 - <이광래 희곡 연구-작품집 <촌선생>에 나타난 윤리의식>, 오선근, 한국외국어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89
관련도서
<온제 이광래 연구>, 김흥우, 동국대 대학원 석사논문, 1977 <이광래 희곡 연구-작품집 <촌선생>에 나타난 윤리의식>, 오선근, 한국외국어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89
연계정보
-촌선생
-극예술연구회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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