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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섭 (1933.5.30~)

예술가명
강준섭 (1933.5.30~)
구분
전통연극
문화재관련정보
1985.2.1 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 진도다시래기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80. 진도다시래기 회원 가입 1959.~1980. 효춘악 극단 단원
생애(약력)
1983.10 제1회 전국국악제 장려상 수상 순회공연 1985.6. 유럽 5개국 1987. 진도영등제 3회 출연 1987.9. 한강고수부지 야외놀이마당 공연 1993.5. 중앙발표회 참가, 지방발표회 10회 참가 1993.5. KBS, MBC 방송국 출연
리뷰
재인- 전통예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68 시골 장날 가설 무대 위에서 30년 닷새 만에 한번씩 서는 시골 장날. 우시장 뒤켠이나 널찍한 냇가 백사장 등 사람이 모일 만한 곳에는 으레 약장수가 즉석 가설 무대를 차려 놓고 약을 팔던 시절이 있었다. 이름하여 ‘나이롱 극장.’ 둥그렇게 모여 선 장꾼들은 약장수의 말재간과 예인들의 공짜 묘기에 정신 팔려 해지는 줄 몰랐다. 이 때 골목길에서 포장쳐 놓고 팔던 뜨근뜨근한 뚝배기 장국밥과 선지국수 맛을 아직도 못 잊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말 잘하는 사람을 ‘약장수 같다’고 한다. 그 당시 팔던 약품은 기억에도 생생한 ‘동동구르무’와 상표조차 제대로 알 수 없던 구충약, 안치수(이 아픈데 먹는 약), 소화제 등이었다. 그러나 몰려든 장꾼들은 남녀 예인들이 분장하고 나와 목청껏 내지르는 춘향가와 심청가가 더 좋았고 그들의 익살에 넋을 잃었다. 우리의 전통 민속 예술을 운위하며 이른바 ‘나이롱 극장’(약장수) 무대의 공로를 지나쳐선 안 된다. 현재 맹활약하고 있는 창악 명인 중에도 이 무대 출신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는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명인들도 여러 명 있다. 당시 창악인들이 설 무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도다시래기(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기능 보유자 강준섭(姜俊燮60)씨는 자신이 지난날 ‘약장수 무대’ 출신이었다는 걸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 않는다. 오히려 인간문화재로 지정(1985년 2월 1일)되며 30여년 동안 정든 ‘포장 무대’ 생활을 작파하게 된 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앗다, ‘속옷’ 뒤집어 냄새 안 나는 사람 있간디. 약장수 쫓아다니다 인간문화재까지 됐으면 그걸 성공으로 알아야지, 과거를 숨기며 점잖은 체하면 뭘 한다요. 뱃속에 든 진짜 예술이 문제지…….” 어정(굿)판에서 강준섭씨 구음과 겹징에 넌실(춤)을 제대로 풀지 못하면 그 지무(무당)는 새김질을 다시 해야한다고 진도, 전남 지방에선 말한다. 그만큼 강씨 한 몸은 예술의 덩어리다. 진도(임해면 석교리 771)에서 나고 자라 전국을 유랑한 뒤 다시 진도에서 살고(진도읍 성내리 28의 5) 있는 강씨는 동분서주하며 지나온 60년 세월의 길이가 반 뼘도 안 되는 것 같다며 “갈 길도 바쁘고 할 일도 많다.”고 한다. 할아버지(강용성)때부터 어정판 무악 뒷바라지로 날려 온 집안 내력, 다섯 살 때부터는 아버지(강보문)의 상청 놀음판을 쫓아다니며 “사람이 죽었는데도 산 사람들은 신나게 놀며 웃는구나.”를 생각했다고 떠올린다. 호상(제 명을 다한 죽음) 집에서 애통해 하는 상주를 웃기고 위로하며 문상객들과 한판 어우러져 신명나게 노는 놀음청, 이것이 진도다시래기다. 초상집에서 상주를 웃기고 노는 ‘다시래기’는 전국에서도 오직 진도에만 있는 민속놀이다. 전통 민속 예술의 보고인 진도에는 다시래기 외에도 강강술래(제8호, 기능 보유자 최소심김길임), 남도 들노래(제52호, 기능 보유자 조공례이해룡), 진도씻김굿(제72호, 기능 보유자 채계만박병천김대례) 등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삼천갑자 동방삭은 삼천갑자 살았는데 초로 같은 우리 인생 한번 가면 다시 못 와 북망산이 멀다더니 저 건너 안산이 북망이로구나. 허망하고 허망하다 살아서 많이 먹고 입고 놀아보세 ……. 상주보다 더 슬픈듯이 상청에 들어서며 읊는 강씨의 사설에 상주는 통곡하고 온 집안 식구와 문상객들도 눈물을 훔친다. 바로 내 심중을 그려내고 내 앞날을 일러주는 것 같아서다. “앗다 옛날 어르신들 말씀도 안 들어 봤소. 흉년에 논마지기나 팔지 말고 입하나 덜라고 안했소. 방안에서 맨당 밥만 축내고 있는 당신 아버지가 죽었으니 얼마나 얼시구 절시구 할 일이오…….” 바깥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 위에서 가(假)상주를 세워놓고 을러 대는 강씨 재담에 모여든 문상객들은 다시 혀를 끌끌 찬다. 이 때 동네 어린애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들이다. 이렇게 해서 진도다시래기는 명맥을 끊이지 않고 잘 보전돼 온다. 이 후 상주의 요청에 따라 벌어지는 강씨와 그의 제자 김광수(전수자), 김천두씨가 엮어내는 즉석 <심청전>은 상청놀음의 절정이다. 가는 자 후히 보내고 남은 자 맘 편하자는 삼국 시대 이후의 전래 민속 가무극이다. 슬퍼하되 상하도록 슬퍼 말고(哀而不傷), 즐기되 음란하게 놀지마라(樂而不淫)는 사대부 전통이 깃든 것이며 ‘다시래기’의 어원은 다 함께 즐거워한다는 ‘다시락(多侍樂)이’에서 찾고 있다. 긴염불, 상여소리, 가래소리, 가상제놀이(여흥포함), 거사사당놀이로 진행되는 다시래기는 남자는 여자로 분장, 남자끼리만 어우러지는 것이 특색이다. 강씨는 그만의 독특한 잽이 장단이 집안에서 경영하던 대장간 쇠달굼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풍로불에 달궈진 시뻘건 쇠뭉치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후려 패며 척척 맞춰 내던 그 장단을 못 잊는다는 것이다. 할머니(박씨)와 어머니(박석화)도 진도 제일의 예술가 집안인 박종기(대금 명인) 가문에서 시집 와 천부적 목구성을 타고났었다고 한다. 강씨는 상청놀음을 따라다니면서 8세 때 채기선(해남 출신)씨를 만나 육자배기 등 잡가를 학습하고 석교공립학교를 졸업했다. 가난이 죄이런가, 진학이 좌절되자 여수로 가출해 선창가에서 얻어 먹으며 잠을 자던 시절도 있었다. 여기서 박병두(박종기씨 손자)씨를 만나 <흥부가>, <심청가>를 배워 목구성을 다듬게 된 것이다. 이때가 열 세 살이었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다시 진도에 와 4~5년간 논두렁 밭두렁을 매다 625때 10일 훈련 받고 전투단에 배치되어 속초 전투에 참가했다. 몇 차례를 까무라친 끝에 살아 남은 것만도 천지신명께 감사한다고 했다. 인민군 따발총에 맞아 왼손가락이 절단되고 지금도 오른팔에는 빼지 않은 총알이 집히고 있다. 강씨는 국가 보훈 유공자로 등록돼 있다. 제대 후 무업에 종사하다 20세부터 뛰어든 ‘나이롱 극장’ 예술단 인생 30여년. 제주도, 울릉도는 물론 전국 방방곡곡 안 다녀 본 곳 없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세계 일주도 해 보았다. 모두가 남들이 천시하던 예술 재능 덕이다. 요즘은 경상도 진주, 강원도 속초, 충청도 공주 등지에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무대 생활 중 만나 김애선(삼천포 출신, 창무용연극)씨와 진도에 살며 외지서 오는 선후배 예술인 뒷바라지하는 게 낙이다. 외동아들 강민수(진도국교 6)의 쇠잡이(꽹과리) 솜씨가 특출나 4대째 예술 대를 이어갈 생각이다. <세계일보>, 이규원, 1992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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