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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진룡신제(伽倻津龍神祭)

작품/자료명
가야진룡신제(伽倻津龍神祭)
전승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院洞面) 용당리(龍塘里) 비석골
지정여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1997년 1월 30일 지정)
구분
무속의례
개요
가야진룡신제는 경상남도 양산시 가야진사(伽倻津祠)의 제례를 바탕으로 형상화한 용신제(龍神祭)이다. 가야진 용신제는 삼국시대부터 국가의식으로 전해져 오던 제의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묘를 세우면서 용신제가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용신제는 여러 지방에서 행하여졌으나 지금은 가야진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가야진사는 예부터 나라에서 장병의 무운을 빌며 제사를 올리던 사당이다. 이 지역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오래 전부터 주민들에 의해서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던 것을 근년에 와서 연중행사로서 정착되었다고 한다. 제례는 고을수령이 모시는데, 가야진사에 모시는 신은 용신이다. 제물로 사용한 희생(犧牲)을 용소에 통째로 던짐으로써 배와 선원의 안전 및 풍어를 기원한다. 용신제(龍神祭) 수리시설이 거의 없었던 옛날에는 하늘만 쳐다보며 농사를 지었기에 기후와 관련된 천재지변, 자연재해에 대한 농경의례 및 제천의식이 많았다.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 50년 조에 보면, 가뭄이 들면 용그림을 그려 놓고 용신에게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여름에 크게 가물어 시장을 옮기고 용 그림을 그려 비오기를 빌었다"라는 기록은 <태종실록>이나 <세종실록>에도 보인다. 우리 민속에서 용은 물을 관장하는 농업의 신으로 여겨왔다. 용에는 성격이 다른 아홉 아들이 있다는데, 이 중에 날아다니는 응룡(應龍 또는 청룡)이 구름과 비바람을 몰고 다닌다고 믿어 날이 가물면 용이 깃들어 있다는 용소(龍沼)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이를 용신제(龍神祭)라고 한다. 부안에서도 날이 가물면 곰소와 직소폭포에서 용신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옛 <부안읍지>에 보인다. 용신제를 지낼 때는 용그림(용당기)을 세우고 그 아래에서 지낸다. 옛날 농촌에는 서너 마을을 단위로 하여 그 중심마을에 용당기가 하나씩 있었는데, 용당기가 있는 마을이 어른 마을이요, 중심 마을이었다. 정초에 이 용당기를 밖에 내어 꽂으면 이웃마을의 농기들이 용당기에게 기세배(旗歲拜)를 하러 온다. 아무리 양반이 많이 사는 반촌(班村)이라도 마을의 좌상(座上)이 풍물굿패를 이끌고 용당기가 있는 마을로 기세배를 드리러 간다. 그리고 백중날은 농사일이 끝난 "호미씻기 날"이어서 용당기를 세워 놓고 풍년을 구가하는 놀이판을 벌인다. 가야진사(伽倻津祠,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7호,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용당나루) 가야진사는 삼국사기 권32 제사조에 보면 대·중·소사 중 중사에 속하는 사독(四瀆)의 하나로 나라에서 연 3회 이상 독(川,水)신께 기풍제(祈豊祭)를 지내던 사당이다. <양산군읍지>에 의하면, 가야진은 ‘신라가 가야국을 정벌할 때 내왕하던 나루터’라 하였으므로 가야시대에 제당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집에는 가야진 지신(地神)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공주의 웅진사(熊津祠)와 함께 중사(中祠)로 춘·추에 치제를 모시는데, 나라에서 향축을 하사했다고 한다. 제일이 정해지면 3일 전에 주민들이 사당 주변을 정화하고 나라에서 하사하는 향과 축문을 가져오는 칙사를 맞이한다. 수령이 헌관(獻官)이 되어 제례를 모신다. 그런데 가야진사에 모시는 신은 전설에 따라 용신으로 믿고 있다. 따라서 제수로 사용한 희생(犧牲)을 용신이 있다고 믿는 용소에 통채로 던짐으로써 우순풍조(雨順風調)하여 선박과 선원의 안전 및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내던 제사를 ‘가야진제’라 한다. 1997년 1월 30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흐름
요즘 용신제는 매년 2월, 8월 정일(丁日)에 지내던 ‘시제(時祭)’와 가뭄에 지내던 기우제를 같이 지내고, 양산군 일원에서 가을에 개최되는 ‘삽량문화제’때 시연한다.
내용
전해오던 제향이나 놀이가 그렇듯이 이 놀이도 그동안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처음에는 그저 제물을 차려놓고, 천신과 지신, 용신에게 절하고 빌며 노래와 춤으로써 한바탕잔치를 벌였다. 이것이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 제를 지내는 과정은 부정굿-칙사영접-강신굿-용신제-용소풀이-사신풀이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①부정굿 : 부정굿은 준비 과정이다. 제사지낼 날짜가 정해지면 3일 전에 주민들이 사당 주변과 마을을 깨끗이 청소하고 금줄을 친다. 황토를 뿌리고 용신제단(가야진사) 주위에 풍물을 치며 돌면서 부정을 물리친다. ②칙사영접 : 제를 지내는 당일, 나라에서 하사하는 향과 축문을 가져오는 칙사를 맞이할 때 제주와 풍물패는 칙사가 당도하는 길목까지 나아가서 영접한다. 선창자가 길을 밟는 지신풀이를 하고 나머지 일행들은 길을 고루면서 뒤따라 간다. 칙사를 만나 절을 올리고 풍물을 친 후 제단으로 돌아온다. ③강신굿 : 용신제 과정에서는 사신을 맞아 가야진사로 돌아온 일행이 제단을 돌며 용신을 맞아 신을 내리는 굿을 한다. 제단에 도착한 후 제단을 한발로 돌고 신(神)을 내리는 굿을 한다. 알자, 칙사 등은 무릎을 꿇고, 잡색들은 두 팔을 벌려 하늘로 쳐들고 좌우로 흔든다. ④용신제 : 세례관이 칙사의 입지를 고하고 집례관의 집전 하에 용신제례를 올린다. ⑤용소풀이 과정에서 제관들은 배에 희생돈(생돼지)을 싣는다. 용소로 출발하기 전에 강변에 지어 놓은 불집에 가서 풍물을 치며 불을 놓는다. 모든 부정을 사르는 과정인데, 이때 풍물패는 자기의 신발(짚신)을 벗어 태우며 용의 승천(昇天)을 기원한다. 풍물을 치며 용소(龍沼)로 가서 생돼지를 뱃머리에 두고 술 한잔을 부어 놓고 헌관이 두 번 절하며, "용신님, 이 희생을 바치오니 부디 흠향하소서" 라고 큰소리로 외친다. 그리고 생돼지를 던지면서 "침하돈 침하돈 침하돈"을 고하며 용왕께 바치는 의식을 치른다. 이 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비가 온다. 풍년이 온다"고 외치면서 한바탕 풍물놀이를 벌이는데, 이는 벽사진경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그 뒤 용소를 한바퀴 돌고 오는데, 이때 모든 참례자들은 강가에서 합장기도한다. ⑥사신풀이 : 마지막으로 사신풀이 과정에서는 참례자 모두 제향소로 돌아와 제단을 향하여 제를 마쳤음을 아뢴 다음 모두 어울려서 가무하고 끝맺는다.
연계정보
· 관련도서 <한국의 당제>, 국립민속박물관, 1995 <한국의 전통예술>, 심우성 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7 <한국 농경세시의 연구>, 김택규, 영남대학교출판부, 1985 · 관련사이트
용어해설
용신제(龍神祭) : 용왕제(龍王祭), 용왕굿(龍王굿). 용은 상상의 동물로, 기린·봉황·거북과 함께 4대 영물 중 하나이다. 동서양 모두 뱀을 원형으로 하여 다른 동물을 혼합시킨 모습이다. 용왕은 용신·용왕할머니·수신이라고도 하며, 특히 비를 내리게 한다고 하여 예로부터 민간신앙으로 자리잡았다. 음력 6월 15일에 지내는 용신제나 용왕굿은 대표적인 민간신앙이다. 불교에 수용되면서 법을 수호하는 천룡팔부(天龍八部)의 하나가 되었다. 기우제(祈雨祭): 한국은 옛날부터 3, 4년에 한 번씩 한재(旱災)를 당했으므로 삼국시대 이래 조정 ·지방관청 ·민간을 막론하고 가뭄에 대한 기우제가 성행하였다. 나라에서는 왕이 정사를 잘못해 내리는 천벌이라 하여 왕 스스로가 몸을 정결히 하고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식음을 폐하고 거처를 초가에 옮기고,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민간에서는 산상 ·냇가 등에 제단을 만들고 신역(神域)으로 정하여 정결히 하고, 마을 전체의 공동 행사로 제사를 지냈다. 제주(祭主)는 마을의 장이나 지방관청의 장이 맡았으며, 돼지 ·닭 ·술 ·과실 ·떡 ·밥 ·포 등을 제물로 올렸으며, 경우에 따라 무녀의 가무도 곁들였다. 고려시대에는 종묘(宗廟) ·사직(社稷) ·구월산(九月山) ·신사(神祠) ·북교(北郊) ·남교(南郊) ·임해원(臨海院:典德) 등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대개는 무당이 의식을 거행하였다. 가뭄이 심할 때는 왕이 직접 백관을 거느리고 남교에 나와 기우제를 올렸고, 일반에서는 시장을 옮기고, 부채질을 하거나 양산을 받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양반도 관(冠)을 쓰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종묘 ·사직과 흥인(興仁) ·돈의(敦義) ·숭례(崇禮) ·숙정(肅靖)의 4대문, 동 ·서 ·남 ·북의 4교(郊)와 중앙인 종각 앞, 또는 모화관 ·경회루 ·춘당대(春塘臺) ·선농단(先農壇) ·한강변 등에서 지냈으며, 심할 때는 나라에서 12차(次)까지 3품 이상의 관원을 파견하여 기우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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