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홍도야 우지마라

작품/자료명
홍도야 우지마라
초연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작/연출
임선규 / 김상열
장르구분
1990년대 이후
출연 / 스태프
출연 김영감/최주봉,박인환 홍도/권소정,박홍진 영호/태민영 중실/윤문식 철수/양재성 최사장/김진태 영호모/박승태 춘홍/김성애 노복/최연식 김군/박종상,박상종 하남/김재권 봉옥/허희명 해정/홍지영 수련/박은희 순사/심태선 행상/유승복 급사/홍성범,김성진,정종훈,김종선,홍광표 기생/김소정,오자인,차미라,박소영,조진,이지은,김진영,강지연,곽현석,이성희 스태프 원작/김선규 각색·연출/김상열 제작/김용현 편곡/엄토미 안무/설도윤 무대/최연호 무대감독/이영주 의상/안정훈 조명/최형오 분장/윤경남
예술가
임선규
충남 논산 출생의 극작가. 강경상고를 졸업하였다. 고교 재학 중 개벽지의 현상 문예에 희곡 <수풍령>을 써서 당선되었다. 고교 졸업 후 상경한 그는 조선연극사에 입단하여 작가와 배우로 활동하였다. 이때 여배우 문예봉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폐결핵을 얻어 고생하는 와중에 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동양극장의 공연으로 대성공을 거두자 임선규는 동양극장의 인기작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의 극작 데뷔작인 <수풍령>이 민족주의 작품으로 상연중지 명령을 받자 이후로는 <유랑삼천리>, <북두칠성> 등의 오락적, 가정적 작품에만 전념하였다. 이후 극단 아랑의 전속작가로 <청춘극장>, <김옥균>, <어머니를 찾아서>, <동학당> 등의 작품을 남겼고, 한참 명성을 날리고 있던 이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보클럽 극장 연수실에서 1년간 일본의 우수작가들과 함께 극작법을 공부했다. 귀국 후 <바람부는 시절>, <거리의 목가>, <신생활설계> 등을 발표하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해방 이후 다시 도진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임선규는 먼저 월북한 부인 문예봉을 따라 월북하였으나 별다른 활동은 하지 못하고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타계하였다.
김상열 (1941~1998)
1941년 경기도 개풍 출생의 극작가이며 연출가. 1966년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여, 1967년 극단가교의 초기 멤버로 시작, 추후 상임연출과 대표를 역임하였다. 풍부한 무대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까치교의 우화>(1975,문공부 공모 희곡 당선), <길>(1978,삼성도의문학상)을 시작으로 현장성 있는 극작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또한 TV극 <수사반장>을 3년간 집필하였으며, 1977년부터는 현대극장 상임연출로 일하였다. 1981년 미국 뉴욕 ‘라마다극단’에서 1년간 연수를 받고 돌아온 후 1984년에는 ‘마당’ 세실극장 대표를 역임하였고 1988년 극단 ‘신시’를 창단하여 10여 년 동안 정통 창작극, 창작 뮤지컬, 마당놀이, 악극 등 다양한 무대를 만들어 냈다. 연극 무대 이외에 TV 극본을 비롯 88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대전 엑스포, 세계 잼버리대회 등 국제적인 문화행사의 구성과 연출을 맡기도 하였다. 백상예술대상 희곡상(1981), 백상예술대상 TV극본상(1987), 서울연극제 작품상 및 희곡상 등 다수 수상하였다. 대표작품 <언챙이 곡마단>, <로미오 20>, <우린 나발을 불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평론
요즘 연극계 일각에서 신파나 악극에 대한 공연이 심심치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연극사의 시각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연극예술의 관점에서는 비판적으로 보는 실정이다. 그러나 정작 악극이나 신파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젊은이는 횡설수설하거나 정확한 전체규명도 못하는 형편이다. 굳이 말하자면 연극진행 과정에서 적절한 장면이나 막 사이에 대중가요를 삽입시키는 연극 정도로 밖에 모른다. 게다가 같은 악극인데도 어떤 것은 가극(歌劇)이라고 그 호칭을 달리하는 경우도 연극사에서는 찾아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악극(樂劇)의 정체란 무엇인가. 1940년 12월 <조선연극협회>가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조선총독부가 그 당시의 전시체제에 발맞추어 이른바 신체제 실시의 일환으로 연극계에다 하나의 통제와 어용의 도구로 쓰기위한 의도적인 계획에서였다. 그리고 그들이 요구하는 연극은 이른바 <국민연극>이요 연극인도 전쟁완수를 위하여 헌신하자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조선연극협회> 산하단체로 9개 극단이 가입되었는데도 악극단이나 가극단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즉 아랑, 청춘좌, 호화선, 황금좌, 연극호, 예원좌, 노동좌, 고협 그리고 유일하게 판소리 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가 그것이다. 그리고 2년 후인 1942년 조선연극협회가 해산되고 <조선연극문화협회>가 발족되어 2회에 걸친 연극경연대회에도 악극은 배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악극은 연극에 비하여 예술성이나 연극성이 낮으며 그것이 이른바 오락성 또는 눈요기감으로 여겼다는 하나의 반증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연극인들 자신도 순극단체와 악극단체를 엄격히 차별하여 악극인은 자기들보다 낮은 수준에 있다고 자부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 연극도 이른바 신극과 신파로 나누어졌으며 그러한 자부심을 강하게 풍긴 측은 신극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악극이 왜 그렇게 천대받았을까라는 문제가 남게 된다. 그 첫째는 작품(희곡, 연기, 연출, 미술)의 문학성 및 예술성의 저질이나 천편일률적인 인정비극이나 화류계 비화에다가 권선징악이나 계몽주의적인 것이 태반이며 비현실적인 표현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삽입된 노래 역시 유행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곡이고 보면 지식인들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악극의 기세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비예술적이건 비문학적이건 악극을 사랑하는 대중은 엄연히 있었고 그것은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 각지까지도 순회공연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어느 의미로는 악극이 순극보다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연극계 일각에서는 언제까지 저질이라고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악극의 질적향상으로 대중을 끌어올리자는 의식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그 지도자급 인사가 언론인 설의식, 서창석 그리고 작곡가 안기영 등이다. 그리고 단체이름도 악극단이라고 하지 않고 가극단이라 불렀다. 서창석 작인 <콩쥐팥쥐>, <견우직녀>는 안기영이 작곡하고 테너 송진혁과 김백희가 발탁되어 수준 높은 무대를 보이기도 했다. '라미라'나 '반도가극단'이 그 예이다. 이런 현상을 그 당시 극장 황금좌 직영으로 '성좌가극단'과 약초극장(지금의 스카라극장) 전속으로 '약초가극단'이 탄생하여 동가에서 연출, 작곡가, 안무가를 영입하여 질 높은 악극을 보여주는데까지 이르렀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극단이 우후죽순처럼 생긴데 힘입어 악극단의 기세도 날로 번져갔다, 연극인과 악극인의 대립이나 적대관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살펴보면 결국 악극이란 순수연극하고는 또 다른 장르이자 대중성과 오락성을 위주로 하는 상업주의 연극이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한국영화산업계에는 이상하게도 악극계의 연기자가 대거 진출하였다. 황해, 허장강, 이예춘, 이경희, 도금봉, 전옥, 장동희, 김희갑, 구봉서 등 황금스타는 거의가 악극출신이었고 연극계로는 김동원, 김승호, 황정순, 최남현, 주선채, 장민호 등 주로 극단 신협 출신이 대중을 이루었다. 이 영향으로 극단도 악극단도 사양길로 접어들고 서울공연보다는 유랑극단으로, 그리고 써커스단의 일부로 합류하여 시골장터나 가설극장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게 악극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 악극을 한다는 소리가 높다. 옛날의 감개와 환상과 향수를 올드팬들에게 안겨준다는 소박한 기획정신은 어느 의미로 봐서는 값진 시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제대로 된 악극무대라야 한다는 점이다. 아니 악극이 아닌 굳이 ‘가극’이라고 간판을 바꾸었던 순구자의 유지를 잇는다면 새로운 극본에 새로운 작곡으로 창의성에서 출발할 이 시대의 악극이 필요하다. 단순한 재생이 아닌 진정한 창조적 악극이기를 바란다. 참고 : (<홍도야 우지마라> 프로그램, 차범석, '악극에 관하여') 우리 나라에서 ‘신파조’란 질 낮음, 촌스러움, 싸구려, 무식함 등의 가치평가에 해당하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신파와는 별 관계가 없는 측면도 신파조라는 말로 욕을 먹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20세기 이래 우리 나라의 가장 대중적인 극양식인 신파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1910년대 일본에서 이식되어 30년대 동양극장 연극들에서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우고, 1950년대 악극과 유랑극단 연극으로 공연예술로는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그 성과가 영화와 방송드라마로 옮겨가 1960,70년대까지 그 위세를 떨쳤던 신파양식은, 이제 (신파가요라고 할 수 있는 트로트 가요와 함께) 확실한 쇠락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제 신파를 이해하는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사람들은 50대 이상의 노인들뿐이다. 90년대 한국인들에게 신파는 더이상 눈물과 통곡을 수반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스꽝스러움으로 받아들여진다. 오락 시간에 촌극을 한답시고 “수일씨이!”, “놔라, 놓으라니까! 바지 찢어진다.” 하는 대사를 과장된 일본식 억양으로 읊어대는 것을 보면서 깔깔댔던 기억을, 장년층인 30대와 40대 초반들조차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신파극은 우스운 것이다. 1년여 전 93년 극단 가교에서 스타 배우들을 내세워 중년·노년층 대상의 흥행에 성공했던 <번지 없는 주막> 역시 그 재미는 ‘우스꽝스러운 신파조’였다. 50,60년 전이었다면 어김 없이 흑흑거리는 눈물 짜는 소리가 들렸을 법한 장면마다, 배우들은 신파조를 더 과장하여 관객을 웃겼고 90년대의 관객은 폭소를 터뜨렸다. 신파로서는 비참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공연한 <홍도야 우지마라>는 우스꽝스러움을 가능한 한 제거하고 원래 신파의 비애감을 되살려 내었다. 다소 지루한 듯한 전반부를 지나서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관객은 신파적 갈등에 빨려갔다. 마지막 부분 노복(老僕)이 홍도의 무죄를 밝히는 장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박수는, 60년대 영화관에서 들은, 죄 없는 주인공이 처형되기 직전 특사가 “어명이오!”를 외치고 달려오는 장면에서 쏟아지는 박수 이래 얼마나 오래간만에 듣는 것이었던가. 이렇게 신파적 비애감을 관객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하게 된 데에는, 한편으로는 30년대의 최고 흥행작에 속하는 원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임선규 작)가 가진 잘 짜여진 구성력 덕분이다. 돈 없는 집안의 딸로 태어난 죄로 기생이 되고, 기생이 된 죄로 미움 받고 모함 받고 쫓겨난다는, 굽이굽이 기구한 전형적인 신파 줄거리로 잘 짜여진 구성은 여전히 슬펐다. 90년대와 30년대의 긴장을 유지하며 현재의 관객 앞에서 이를 잘 살려낸 연출도 이러한 신파극의 부활에 큰 몫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박수를 칠 정도로 신파적 비애감이 관객에게 전달된 것은,그 관객의 주류가 여전히 50대 이상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화려한 대중적 흥행물로서의 신파 악극의 생명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혹시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신파가 가진 자학적이고 패배주의적인 눈물의 정서가, 이렇게 아무런 변용과 극복 노력도 없이 부활되고 재생산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신파의 생명력이 끝나가는 시대에, 우리가 한국의 연극사를 생각하면서 해야 하는 신파에 대해 해 놓아야 하는 일은, 신파의 소멸을 애닯아하며 이를 부활하려는 노력을 하는 게 아니라, 20세기 전반의 중요한 대중연극 양식으로서의 신파를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단지 촌스럽다는 취향적 판단에 의해 폄하하는 선입견을 버리고 연극사적인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려한 대중적 흥행물로의 부활이나 우스꽝스러운 희극으로의 퇴락이 아닌, 학문적인 고증과 연구에 입각하여 제대로 만든 신파극을 한두 극단이 계승·보존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수천 년 떨어진 희랍의 비극도 끙끙거리며 그 본질적 재미를 감상하는 오늘날의 관객이, 제대로 만들어진 신파극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지 못할 리 없다. 이제 신파극을 이렇게 좀더 객관적으로 다루어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뉴스메이커>, 이영미, 1995년 1월 2일, '90년대 신파극의 존재에 대하여')
이미지
관련사이트
김상열 연극사랑
관련멀티미디어(전체9건)
이미지 9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