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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없는 주막

작품/자료명
번지없는 주막
초연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작/연출
김상열
장르구분
1990년대 이후
출연 / 스태프
출연 춘뱅이/최주봉 단장/박인환 덕환/양재성 사월/박승태 자발이/윤문식 춘홍/김성녀 덕대/김진태 경리/최연식 윤사장/최일화 형사/박상종 경찰/심태선 악극단원/유승목 제작부장/김성효 금산/오지혜 경실/김영아 선영/홍지영 노파/박은희 땡깡/이석우,김종선 댄서/이을경,오자인,최은영,임선희,배혜선 연주 단장/황희수 클라리넷/엄재욱 기타/박정서 테너섹스폰/박영춘 드럼/이용재 베이스기타/정순만 트럼본/엄남익 트럼펫/김인주 알토섹스폰/김경애 트럼펫/신인식,안서치 트럼본/박영선 스태프 연출/김상열 무대미술/최연호 기획/김용현 음악/임태성 무대감독/이영주 조연출/박종상,김희명 의상/최순화 안무/남경주
내용
악극 <번지없는 주막>은 극중극의 형태로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하는 악극단의 희노애락을 그린 작품이다. 제1장 승천 그 옛날 악극단의 연주음악 ‘번지없는 주막’이 연주되면서 막이 오른다. 도심의 변두리. 석회물로 얼룩진 대형교각 밑에서 변사체가 발견되고 악극단의 막간배우였던 70초로의 노인(자발이)은 적막한 가로등 밑에 낡은 담요에 덮여 뉘여져 있는 사람이 유랑극단에서 '홍금산'이란 예명으로 동거동락하던 지춘심임을 알고 그녀의 한 많은 일생을 부평조에 비유하며 슬퍼한다. 제2장 가출 자신이 광대의 팔자를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금산은 노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출하여 악극단을 찾는다. 막간배우 자발이와 단장은 금산의 배우를 행한 열정을 인정하고 입단을 결정한다. 제3장 개막 드디어 악극 <번지없는 주막>이 막이 오르고 경기도 두렁마을에서 일찍이 사랑을 꽃피워온 정삼봉과 박순애는 양가 부모의 철저한 반대에 부딪혀 이른 새벽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어린 남매를 이끌고 삭막한 도시에 어느 한 곳 발붙일 데 없던 젊은 부부는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부인은 화류계의 여성으로 전락하고 이 사실을 알게된 남편은 어린 딸과 함께 부인과 헤어지게 된다. 제4장 사나이의 길 고향산천을 떠난 지 십년이 지났음에도 매일 저녁에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노모앞에 남루한 차림의 삼봉은 강보에 싸인 어린 딸을 안고 고행에 나타난다. 먼훗날 어린 딸이 숙성한 처녀로 자라거든 오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딸이 품속에 두 남매의 정표를 남기고 불효자식 삼봉은 또 다시 노모와 생이별하게 된다. 제5장 유랑극단 계속되는 공연과 이동으로 피곤하지만 서로를 위하여 애환을 함께 겪는 유랑극단의 단원들. 악극 <번지없는 주막>에서 정삼봉의 딸 금녀역을 맡던 경실이 아버님의 병환 소식을 듣고 극단의 돈을 훔쳐 도망치게 되고, 유랑극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금산은 경실의 뒤를 이어 금녀역을 맡게된다. 제6장 세월 두렁마을의 주막에서 노모의 품에 맡겨진 삼봉의 딸 금녀는 어엿한 처녀로 자라게 되고 같은 마을의 달수라는 청년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사랑을 고백하며 추근거리지만 금녀는 달수에게 전혀 마음을 주지 않는다. 그 즈음 동경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등문관 시험을 준비하는 한 청년이 마을에 나타난다. 제7장 밤의 꽃 삼봉과 헤어진 순애는 어린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공장, 노동판을 전전하다가 밤의 여인으로 전락하게 되고 어린 딸을 고향의 부모에게 맡기고 갖은 역경을 겪은 삼봉과 홍등가에서 마주친다. 둘은 그런 곳에서 그런 모습으로 만난 서로의 운명을 슬퍼하며 순애는 자신을 강물에 떠내려가는 부평초처럼 밤거리의 한 여인으로 생각하고 잊어달라고 한다. 제8장 해후 금녀와 현철의 운명적인 만남. 부모없는 주막집 손녀딸로 자라난 금녀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현철과 첫대면을 하게 되고…. 둘은 첫 만남에서 왠지 오래 사귄 사람처럼 낯이 익음을 느끼고 가까워지게 된다. 제9장 시련 순회공연을 위해 원산극장을 찾은 유랑극단은 신극단원들에게 밀리면서 잠시 시련을 맞게 되지만 서로를 격려하면서 흥겨운 가락에 맞춰 노래하는 악극을 계속할 것을 다짐한다. 제10장 사랑 동경유학에서 돌아온 현철은 찔레꽃 피는 두렁마을에서 아름다운 시골처녀 금녀와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으니 이것은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사랑의 시작인가? 금녀의 가슴속에는 현철을 향한 애틋한 사랑만은 변함이 없으니 이 두 청춘남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제11장 죽음의 그림자 악극 <번지없는 주막>에서 주인공 순애역을 맡은 춘홍이는 점점 더 병세가 심해지고 주인공 삼봉과 순애가 병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순애는 숨을 거두게 되고, 그 장면에서 배우 춘홍의 목숨도 무대위에서 끝마친다. 만신창이 불구자가 되어 아내마저 잃고 고향땅을 찾은 삼봉은 나무뒤에 숨어서 부모님과 딸이 있는 주막을 바라보고 있다. 현철을 따라 고향을 떠나겠다는 금녀를 사이에 두고 현철과 동네청년 달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급기야 현철은 달수를 죽이게 된다. 그 장면을 숨어서 지켜보던 삼봉은 그들이 친남매임을 밝혀주고 아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일본순사에게 잡혀간다. 제12장 부평초 자신들의 인생을 부평초에 비유하며 살아가는 악극단원들은 단원의 병사등 여러 시련을 겪으며 늙게 되지만 서로를 위로하며 또 길을 떠난다. 그들이 떠난 무대 위에는 주제곡 <부평초>가 들려오며 천천히 막을 내린다.
뮤지컬 넘버
1. 번지없는 주막 (서막곡) 2. 부평초 (합창) 3. 대지의 항구 4. 청춘고백 (사월) 5. 향수 (삼봉) 6. 꼬집힌 풋사랑 (삼봉) 7. 알뜰한 당신 (삼봉) 8. 고향초 (삼봉) 9. 아주까리 등불 (노모) 10. 불효자는 웁니다 (삼봉) 11. 삼천리 강산 에라 좋구나 12. 나는 열일곱살이예요 (금녀) 13.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14. 외로운 가로등 (순애) 15. 가는봄 오는봄 (금녀) 16. 꿈이여 다시 한번 (현철) 17. 세동무 18. 하늘의 황금마차 19. 타향살이 (삼봉) 20. 나 하나의 사랑 (현철) 21. 찔레꽃 (선영) 22. 고향만리 (삼봉) 23. 청춘 블루스 (순애) 24. 고향에 찾아와도 (삼봉) 25. 비내리는 고모령 (삼봉) 26. 감격시대
김상열(1941~1998)
1941년 경기도 개풍 출생의 극작가이며 연출가. 1966년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여, 1967년 극단가교의 초기 멤버로 시작, 추후 상임연출과 대표를 역임하였다. 풍부한 무대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까치교의 우화>(1975년,문공부 공모 희곡 당선), <길>(1978년,삼성도의문학상)을 시작으로 현장성 있는 극작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또한 TV극 <수사반장>을 3년간 집필하였으며, 1977년부터는 현대극장 상임연출로 일하였다. 1981년 미국 뉴욕 ‘라마다극단’에서 1년간 연수를 받고 돌아온 후 1984년에는 ‘마당’ 세실극장 대표를 역임하였고 1988년 극단 ‘신시’를 창단하여 10여년 동안 정통 창작극, 창작 뮤지컬, 마당놀이, 악극 등 다양한 무대를 만들어 냈다. 연극무대 이외에 TV극본을 비롯 88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대전 엑스포, 세계 잼버리대회 등 국제적인 문화행사의 구성과 연출을 맡기도 하였다. 백상예술대상 희곡상(1981년), 백상예술대상 TV극본상(1987년), 서울연극제 작품상 및 희곡상 등 다수 수상하였다. 대표작품 <언챙이 곡마단>, <로미오 20>, <우린 나발을 불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재공연
1999년 1월 31일 ~ 2월 2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극단 가교, 김상열 연출
평론
우리 연극사에서 음악극의 양식을 찾자면 판소리가 으뜸일 것이다. 판소리는 20세기에 들어서 극장무대에 적합한 창극으로 분화,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판소리와 창극에 이어 1930년대부터는 악극이라는 새로운 음악극 양식이 태동하였다. 악극이란 ‘대사와 동작과 노래와 무용과 경음악으로 엮어가는 연극’이었다. 막간극으로부터 출발한 악극은 삽입되는 노래가 연극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았으며 버라이어티쇼의 일부로 삽입되는 정도였기 때문에 서양 연극에 있어 뮤지컬의 전단계인 레뷰(Revue)나 북쇼(Book Show), 민스트렐 쇼(Minstrel Show) 등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악극의 성립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처음에는 1920년대에 들어와 신파극이 널리 유행하면서 공연 도중에 막간을 이용하여 출연 배우들이 짤막한 코미디나 만담, 대중가요 등의 숨은 장기를 보여주는 막간무대로 출발하였다. 이 시대에 ‘동방예술단’은 김문필의 마술과 곡예와 노래와 춤을 곁들인 쇼를 공연한 단체였다. 1928년 6월에는 김소량이 주관하던 ‘취성좌’가 가극 <극락조>를 조선극장에서 상연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가극’이란 명칭이 사용되었다. ‘취성좌’의 가극이란 연극속에 노래 몇 개를 삽입하는 정도였지만 종래 막간에서 노래, 춤, 코메디가 아무 연관없이 나열되던 것에 비하면 노래의 선택이나 배열을 드라마틱하게 구성했다는 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본격적인 가극과 쇼를 전문으로 공연하기 시작한 단체는 1929년에 조직된 ‘삼천가극단’이었다. 이 단체의 레퍼터리를 살펴보면 1부에서는 희가극이라 불리우는 코믹터치의 가벼운 연극에 노래를 끼워 넣어 음악적 효과를 가미했고, 2부에서는 여성들의 라인댄스팀이 등장했다. 일본에서 조직된 ‘배구자 무용단’은 소녀가극을 주로했는데 1930년에 귀국하여 촌극과 노래, 춤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무대를 보여주었다. 1930년대 초반에는 신파극을 비롯한 대중극이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많은 연극단체들이 가극을 공연하였다. ‘연극시작’, ‘태양극장’, ‘협동무대’, ‘랑랑좌’ 등이 대표적이다. 이 당시 무대에서는 한때 일명 ‘꼼막춤’이라는 것이 유행했는데 이는 무용수들이 러시아 민속의상인 루바사카를 입고 하트 모양의 배경 속에서 뛰어나와 호파르크(Hopark:소러시아 지방의 2박자로 된 쾌활한 무곡)을 추는 것이었다. 1937년 9월에는 ‘경성 오페라 스튜디오’가 창립되어 악극 <춘향전>(9.22~23, 부민관)을 상연하였다. 이때부터 가극 대신 ‘악극’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종래의 가극보다 음악적인 표현이나 전체적인 구성에 있어 규모가 크고 수준있는 내용을 취급했다해서 ‘악극’으로 구별하여 부른 것이다. ‘조선 고전의 오페라화’라는 거창한 취지를 내걸었던 <춘향전>은 그 규모가 자못 거대했으나 창작 음악이 아닌 기존 오페라의 유명 아리아에다 스토리에 맞는 가사를 붙인 정도였다. 1938년 4월에는 단성사 직속의 ‘화랑 악극단’이, 동년 8월에는 악극단 ‘비원장’이 창립되었다. 악극은 철저히 흥미본위의 상업주의를 지향하면서 유수한 극작가, 작곡가들에게 폭넓은 활동무대를 제공했고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친숙한 유명 배우와 가수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악극은 한 작품에 평균 20여곡의 노래가 나왔는데 극의 실마리가 풀려나갈 때 필요에 따라 노래를 삽입시키는 것이 기본적인 형식이었다. 기존의 대중가요를 그대로 부르거나 극의 내용에 따라 가사를 바꾸기도 했고 창작 가요가 작곡되기도 하였다. 악극은 그 형식의 성숙 정도에 따라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짤막한 코메디를 하는 가운데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둘째는 극중의 의미있는 부분에서 노래로 정서에 호소하는 것이다. 셋째는 작품 내에서 극적인 대화를 극의 내용과 일치하는 노래로써 주고 받는 것이다. 넷째는 극적인 대화를 극의 내용과 일치하는 노래로 주고받는 동시에 음악과 무용이 극속에서 어울리는 것이다. 이 네번째 형태가 현대의 뮤지컬과 가장 흡사한 것인데 이때는 노래가 40곡 이상 60곡까지 동원되었다. 1930년대 후반의 악극 무대를 변화시킨 특징적인 현상 중의 하나는 레코드 회사에서 자체 선전을 겸하여 연주회라는 이름으로 전속가수들의 실연무대를 마련한 것이다. 레코드 취입으로 유명해진 가수들의 노래를 실제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매력이 흥행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노래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어 짤막한 코메디나 간단한 극적 내용을 집어넣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단체들이 후에 전문적인 악극단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OK레코드사가 조직한 ‘OK연주회’(1937.6)는 ‘OK 그랜드 쇼단’(1938.10)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조선 악극단’으로 개명하였다. 빅타 레코드사가 조직한 ‘빅타 대연주회’(1938.4)는 ‘빅타 스피링 콘서트’로, 다시 ‘빅타 가극단’으로 개명했다가 1940년대에는 ‘반도 가극단’이 되었다. 악극의 음악담당자들은 대개 악사로 불리웠는데 이들이 우수한 악단들을 조직하기도 했다. 당시 유명 악단으로는 ‘CMC악단’(OK그랜드 쇼단), ‘임정박과 그의 악단’(박타 스프링콘서트), ‘서울악단’(반도악극좌) 등을 들 수 있다. 악극단의 번성일로에서 1940년 4월에 일본의 ‘다카라즈카 쇼단’이 내한하여 공연한 가극 <춘향전>은 악극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장혁주가 일본어로 쓴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가극 <춘향전>은 본격 뮤지컬 드라마로서의 구성과 음악, 무대 등을 갖추고 있어 우리 악극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부터 우리의 고전을 가극화하려는 움직임과 더불어 그때까지의 경망스러운 희가극이나 어설픈 버라이어티 쇼를 지양하고 악극다운 악극을 꾸며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런 맥락에서 1941년 3월에 ‘아세아 악극단’이 평양의 금천대좌극장에서 공연한 김용환 주연의 <심청전>은 성공적인 무대였다. 1940년대로 넘어오면서 악극단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악극은 신파극과 더불어 대중극의 가장 인기있는 양식이 되었다. 수많은 악극단들 가운데서도 ‘라미라 악극단’, ‘반도 악극단’, ‘조선 악극단’이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라미라 악극단’은 동아일보가 폐간되면서 언론계의 중진이었던 설의식이 ‘콜롬비아 악극단’을 인수하여 명칭을 바꾼 것이다. ‘라미라 악극단’은 본격적인 창작 오페레타 운동을 표방하면서 <콩쥐팥쥐>, <견우직녀>, <은하수 천산편> 등을 공연하였다. 김윤주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면서는 흥행의 거장인 최일이 기획을 맡아 <아리랑>, <방아타령>, <오동나무>, <북두칠성> 등을 공연하였다. 일제 치하에서도 이 단체는 우리의 향토색이 강한 작품들을 꾸준히 무대에 올렸는데 여기에는 작가 박노홍의 집념이 크게 기여하였다. ‘반도가극단’은 서민호, 박구 등이 경영을 맡았으며 많은 작품들이 성태삼에 의해 연출되었다. 역시 한국적이고 고전적인 설화를 제재로한 창작악극을 주로 공연하였다. <장화홍련전>, <심청전>, <화랑도> 등이 대표작이다. ‘조선 악극단’은 OK레코드사 사장 이철이 직접 운영하였는데 ‘OK 음악 무용 연구소’를 두고 악극에 필요한 배우들을 자체 양성하기도 했다. <노래하는 춘향전>, <홍장미의 꿈>, <이수일과 심순애>, <선화공주>, <왕소군>, <만리장성> 등이 인기를 누렸다. 특히 이 단체에서는 악극이 끝난 후에 2부 순서로 버라이어티 쇼가 공식화되어 가수들의 노래와 무용단의 춤, 짤막한 코메디가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일제 말기에 총독부는 ‘조선연극문화협회’를 결성하였고 연예인들에게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격을 시험하여 ‘기예증’을 발급하는 등 우리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더 이상의 악극단 설립이 불허되었고 대신 ‘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농어촌, 탄광촌, 공장지대, 일선부대 등에 위문공연을 강요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악극도 다시 활기를 얻었다.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결성된 악극단들의 수는 이루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다. 우후죽순으로 속출한 악극단과 더불어 해방 후의 악극은 질적, 양적으로 풍부해졌으나 다시 전쟁을 겪으면서 큰 손실을 입게 된다. 전쟁의 와중에서 1952년경부터는 여성들만으로 창극을 공연하는 여성국극이 크게 유행하면서 악극은 그만 시들해지고 말았다. 1957년경부터는 국산 영화의 붐을 타고 악극 배우들이 대거 영화계로 진출하면서 악극은 더욱 세력을 잃었다. 1960년 4.19 이후로는 우리 무대에서 거의 악극의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때까지 활동한 대표적인 악극 작가로는 서항석, 박노홍, 김석민 등이 있다. 대표적 작곡가로는 김용환, 박시춘, 안기영, 송희선, 김해성, 손목인, 형석기, 홍순일, 황문평, 김희조 등이 있다. 또 연출가로는 서항석, 박진, 김화랑, 이진순, 이서향 등이 활약했다. 악극무대가 쓰러진 후, 우리 음악극은 별로 자생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1962년에 창단되었던 ‘예그린 악단’이 한국적 뮤지컬의 정착을 모토로 공연했던 <살짜기 옵서예> 정도를 상기할 수 있을 뿐이다. 이후로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급격히 유입되어 현재는 철저히 서양식 뮤지컬만이 유행하고 있다. 우리는 판소리나 창극을 감상할 때 자연스러운 감흥과 자발적 추임새가 우러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오페라 무대를 대할 때는 그 고급스런 격조와 음악성에 감탄하면서도 절실한 공감을 얻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양식 뮤지컬의 화려한 스펙타클과 주옥 같은 노래들에 매료되면서도 서양식 멜로디와 창법이 갖고 있는 본지적인 낯설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뮤지컬이 대중적인 연극의 대표격이라고 할 때 평범한 대중관객들이 연극을 감상하면서 저절로 흥이 나고 박수가 터지고 때로 눈물이 나는 ‘한국적 뮤지컬’을 가질 수는 없는가? 그것은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정서를 우리의 노래로 표현해주는 방식을 통해 가능하리라 본다. 그런 맥락에서 트롯풍의 노래를 비롯한 대중가요의 멜로디를 활용하는 악극의 양식은 ‘한국적 뮤지컬’을 모색하는 중요한 출구가 될 수 있다. 악극은 당대에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신파극 이상의 저질 연극 정도로 폄하되면서 전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악극이 갖고 있는 부정적 측면, 이를테면 단순한 오락거리로서의 버라이어티쇼 같은 성격이 농후하다거나 지나친 흥미본위의 상업주의로 흐른 점 등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나 악극이 지니고 있었던 긍정적 측면들은 연극사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하고 창조적으로 계승될 필요가 있다. 즉 우리 대중들이 즐겨 애창하던 대중가요의 선율에 연극의 내용을 담아 친밀한 대중적 공감을 획득한 점, 향토적이고 민속적인 소재들을 통해 우리의 민족 정서에 절실히 부응한 점 등은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연 프로그램, 김미도, '한국적 뮤지컬의 모태 악극') 사적으로는 나의 친구요 사회적으로는 대표적인 연극인이었던 김상열형은 지난해 10월 26일 우리를 남겨놓고 먼저 이승을 떠났다. 이승에서 형이 아끼고 사랑하고 창조해 놓은 것은 무수히 많지만, 그 중에서도 형은 특히 악극에 남다른 애착과 정열을 보였다. 그리고 악극과 극단 가교와 형의 삼각관계는 우리시대 연극사의 한 장을 기술할 만큼 깊고, 그 자료는 방대한 분량에 이른다. 이번 공연을 앞두고 형을 떠나보낸 아쉬움과 그리움이 더욱 커지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20년전, 1978년의 가교공연에서 형은 원로배우 고설봉 선생의 증언을 토대로 <이수일과 심순애>를 재구성하여 무대에 올렸다. 하유선씨가 편곡을 맡았다. 본격적인 악극이기보다는 노래를 곁들인 신파극이었다. 가뭄 속의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당시 극장은 연일 초만원을 이루었고, 신파극에 대한 관객들의 높은 애착과 젊은 세대들의 관심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를 분명하게 느낀 고정시킨 공연이었다. 열렬한 대중의 반응은 아직도 신파적인 정서가 사라져가기는 커녕 오히려 대중이 원하는 연극양식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바로 이런 정서와 반응이 형으로 하여금 악극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동기로 여겨진다. 형은 극단 신시의 대표이면서도, 1993년부터 가교의 악극을 주도해왔다. <번지없는 주막>의 작·연출을 시작으로 1994년에는 <홍도야 울지마라>의 작·연출, 1995년 <굳세어라 금순아>의 작(연출, 강영걸), 1997년에는 <울고넘는 박달재>의 작·연출, 1998년에는 <눈물젖은 두만강>의 작·연출을 맡았다. 그동안 가교의 악극이 얼마나 폭발적인 관객호응을 얻었는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연극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는 게 아니라, 흘러간 역사의 수레바퀴를 지금의 우리 앞으로 앞당겨와 지금 우리들의 연극이 악극시대로부터 얼마나 달라졌는가 하는 자성의 거울로 삼아보고자 한다." "악극은 퇴화된 우리들의 굿판의 정서, 신명의 놀이, 그리고 한 시대의 환상을 되살려 보는 의미가 있다. <번지>에서 <홍도>까지 두 번 맨 총대로 인해 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가 즐기는 청승기. 그것을 신파적이라고 말해도 좋다. 신파나 악극에서 그 청승기를 살려내면서 새로운 소재와 주제를 설정하고, 트롯트적 악상을 도입한다면, 새로운 민중의 음악극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굳세어라>는 방향의 화살표를 무리하지 않게 돌려보는 작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남북문제나 이산가족의 문제를 멜로드라마의 범주 안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급선회가 아니라 유연하게 방향모색을 해보는 것이다. 주제나 소재의 지평을 얼마나 확대할 수 있는가와 기존의 트롯가요에서 어떻게 작곡음악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악극 자체에 성급하게 서양식 뮤지컬 기법을 도입하면, 악극의 매력인 대중적 청승기가 사라진다." <광대와 시인>은 김상열형의 유고수상록이다. 악극에 관한 형의 강한 집념과 원대한 모색이 군데군데 나타나 있다. 뒤늦게서야 안 일이지만 형의 이러한 집념과 모색이 있었기에 가교는 그처럼 재미있는 무대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아울러 많은 관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형이야말로 관객이 있는 연극을 만들어냈다. 가교 악극의 발전과 더불어 형의 명복을 빈다. (서연호, 1999년 1월 12일, '악극과 김상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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