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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작품/자료명
키스
작/연출
윤영선 / 박상현
장르구분
마임
출연 / 스태프
출연 남긍호 스태프 작/윤영선 연출/박상현 무대미술부/박문환 무대감독/최영길 조명/박남석,이태훈 음향/윤경석,정지숙
내용
<키스Ⅰ>은 <키스>의 대본을 쓴 윤영선이 직접 연출하였다. 때문에 극본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기도 하다. 윤영선의 <키스>는 남녀간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분리감과 그로 인한 고독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말한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그들이 말을 하면 할수록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분리감은 점점 더 심해지고, 그들의 목소리는 점차 외침으로 바뀌어 간다. "나도 여기 있어." "거기?" "아니, 거기가 아니라 여기란 말이야." "그러니까 거기지." "아니, 여기, 여기, 여기. 나, 여기 있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은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점점 둘은 멀어져 가고, 갈등은 심화된다. 그리고 괴로워한다. 얼핏 보면 유치한 말장난 같아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하고도 명확한 진실이 있다. 흔히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상대방의 말을 경청한다. 또한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열심히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언어의 발설과정을 통해 우리는 친구를 좀더 이해하게 되었고, 그가 나를 좀더 잘 알게 되었다고 자부하는가? 아니다. 아마도 오해와 불신, 허탈, 꺼림칙함만이 남는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말하지마." "응." "말하지 말라고." "그럼, 너도 말하지마." "응." 무대 위의 두 남녀는 자꾸만 쌓여 가는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키스라는 해결책을 도출해 낸다. 하지만 <키스>에서 키스의 횟수는 겨우 두 번이다. 즉 키스보다 말의 횟수가 무성한 무대를 보여주며, 키스로 말을 잠재우라고 관객에게 역설적으로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키스Ⅱ>홀로 키스함도 그대에 대한 사랑이다. 적막한 어둠이 깔려있는 무대. 조명은 무대 위에 펼쳐져 있는 하얀 사각천만을 비추고 있다. 그때 누군가가 그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온다. 그는 다비드 조각상이 움직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완벽한 황금비율과 멋진 몸매를 지니고 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현란한 근육들이 요동친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공허감과 왠지 모를 고독이 깃들여 있다. 그는 어둠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갑자기 누군가 그를 부르는 모양이다. 무언가 들은 듯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어디에서 나는 것이지? 외부에서인가? 그러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다. 그때 그는 어둠 속에 또다른 공간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곳은 어디지? 또다시 그 소리가 들린다. 바로 그 안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불현듯 그는 깨닫는다. 그 곳은 바로 자기 안이라고,결국 그는 자기 안에서 소리를 찾는다. <키스Ⅱ>는 마임극이다. 오직 한 사람의 연기자가 아무 말 없이 몸짓으로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다.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연출자는 과연 무엇을 나타내고 싶었을까? 그는 몸으로만 키스를 보여주는데도 갈등이 존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자신만의 공간 속을 찾아간 인물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것을 사랑이라고 명하고 그와 키스한다. 그러나 긴 키스가 숨통을 조여 오자 사랑을 죽이고 만다. 단절, 고독, 증오, 사랑, 이 모든 감정을 전달하고자 하는 몸짓. 이는 사랑이란 잠시의 고독을 달래주는 것이며, 아무리 외롭더라도 나는 그저 나로 숨쉬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키스Ⅲ> 즐거운 그 무엇 키스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술을 내밀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키스가 사람과 사람(이는 동성이 될 수도 있고, 이성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이 만들어낸 형상일 수도 있다.)간에 이루어지는 활동이라고 인지하고 있다. 이번 무대에서는 키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키스하고 싶은 욕망과 키스를 거부하는 냉정한 세상이 대비되고 있다. 즉 여기서 키스는 사회의 벽 인습을 벽을 뛰어넘는 힘, 더불어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나타나 있다. 영화감독 지망자인 어느 주방용품 세일즈맨은 민생고에 얽매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접어두고 있다. 외판원인 그는 사회 곳곳에서 소외와 좌절을 경험한다. 이런 인간적 고독과 단절로 인해 그는 점점 자신이 무력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폭력으로 분출한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미쳐간다.
남긍호 (1963년 ~ )
현 Homoludens 남긍호 company 대표. 마임협의회 사무국장. 한국종합예술학교 연극원 교수 1987년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1992년 파리 마르쎌마르소 국제 마임학교, 1995년 파리 코퍼럴 신체마임학교, 1997년 파리 8대학 연극과 실기석사를 졸업했다. 1990년에는 파리에서 코메디아 델 아르떼 공연에 참가했으며, 1993년 마임극단 Theatre de I'ange fou (미친천사)에 입단했다. 귀국 후에는 마임극단 ‘Homoludens 남긍호 company’를 만들어 <프랑켄슈타인>, <4-59번지> 등의 독특하면서도 풍자적 요소가 많은 작품들을 공연해오고 있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재직 중이다. 대표작품 <나는 꿈속에서 춤을 추었네>(1997), <키스>(1997), <프랑켄슈타인>
기사
연출자는 차례로 김동현, 박상현, 이성렬. '키스'는 97년 희곡을 쓴 윤영선 연출작품과 별도로 윤영선 보다 10년 아래 연배인 이성열이 다른 방식으로 무대에 올린 것이 계기가 돼 옴니버스 형식으로 탄생했다. 여기에 박상현이 언어를 배제한 1인 마임극 '혼자하는 키스'를 덧붙여 지금의 형식이 됐다. 첫번째 무대는 '둘이 하는 키스'. 짧고 함축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윤영선 원작에 가장 충실한 형태다. 극은 동떨어진 공간에 놓여진 두 남녀의 대사로 시작 한다. 그 말들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기보다 키스로 다가서기 위한 장치이다. 두번째 무대로 마임배우 남긍호를 등장시킨 '혼자하는 키스'는 키스의 의미를 인간의 고독과 소외로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의 열띤 반응을 얻었던 이성열의 '여럿이 하는 키스'에는 11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안혜리, <중앙일보>, 1999년 5월 31일)
평론
5월 한 달간 대학로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되었던 <키스>는, 이 새로운 발상만으로도 우선 주의를 끌었다. 주목되는 젋은 연출가 윤영선, 박상현, 이성열 등의 3인이 모여서 시도했던 실험극 <키스>는, 극장주의에 입각한 탄탄한 무대언어를 재확인시켰다. 대본은 간단하다. 남과 여의 대화로 지극히 단편적인 일상어를 쓰고 있어서 구체적인 의미는 드러나지 않으나, 엇갈림과 의사불통의 대화이다. 무심히 뱉은 욕의 언어 폭력이나 힘의 폭력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이 전해오고, 진실한 사랑을 하려는 안타까움과 덧없음은 물론 인간의 본질적인 소외와 고독이 다가온다. 공연순으로 살펴보면, 우선 윤영선은 이 대본을 둘이서 하는 키스로 해석했다. 남과 여(이용구, 박미현 분)가 등장하여 엇갈림과 소외를 보여준다. 말은 반복되고 의미는 점점 더 불분명해지며 궁극적으로 단절만을 더한다. 서로를 안타깝게 맴돌던 이들의 키스는, 결국 만남과 화해를 제시하며 끝난다. 이러한 연기에서는 대사와 대사 및 행동과 행동간의 타이밍이 결정적이라고 하겠는데, 연출은 그 리듬감을 잘 살리고 있었다. 박상현은 혼자하는 키스로 해석하고 마임으로 연출했다. 마임이스트 남긍호는 실로 탁월한 연기를 보여 주었다. 몸짓이나 움직임은 물론 전신의 훈련된 근육까지 조화되어, 사랑과 증오 및 그 외로움과 단절이 전달되어 왔다. 이제 우리 연극계도 세계에서 겨룰 수 있는 마임이스트를 가지게 되었다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성열은 대본을 불특정 다수의 다발적 키스로 설정하여 독창적인 해석이 돋보였다. 앞선 윤영선의 공연과 동일한 대사가 전혀 다른 상황에서 재현되기에 무엇보다도 보는 재미가 컸다. 외판원 주인공이 겪는 다발적인 키스는 소외와 좌절을 통해서 역시 인간적 고독과 단절이 그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무력함과 폭력은 교묘하게 대조되면서 궁극적으로 상통하는 것이라는 아이러니도 잘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공연은 세 연출가에 의해 일종의 반복 공연이었으면서도,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번 공연은 배우의 몸과 연기위주의 무대언어를 재확인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연극에서 언어가 얼마나 부차적일 수 있나를 새삼 보여준 것이다. 다만 아쉬움이라면 이 실험이 새로운 무대언어의 출발이라기보다는 이미 기성화된 방법의 산뜻한 재현이었다는 점이다. 이 아쉬움은 젊은 세 연출가의 실험극에 거는 기대가 너무 큰 탓에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전환기의 우리 연극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주역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훌륭한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지 않은 객석의 관객을 주시하면서, 역시 21세기의 연극은 진정 새로운 무대언어와 감각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미원, <월간 에세이>, 1997년 7월)
관련도서
한국연극평론가협회, <90년대 연극평론 자료집(Ⅴ)>, 평민사, 199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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