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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춘향전

작품/자료명
창극 춘향전
초연장소
예동
작/연출
박황 / 김연수
장르구분
1961년~1970년대
출연
춘향/김소희,박봉선 이몽룡/장영창,김정희(여) 월매/박초월,임유앵 향단/남해성 방자/김준섭,김계희 변학도/안태식 후배사령/김재선 김번수/한승호 박번수/정필진
내용
1막 광한루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에 산책을 나왔다가 퇴기 월매의 딸 춘향을 만나 그 미모에 정신을 팔면서 사랑의 불길이 타올라 가슴 둘 곳을 모르게 된다. 2막 부흥당 그 길로 춘향의 어머니를 찾아가 결혼하겠다고 간청을 하여 성공한다. 이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불타고 날로 즐거움에 묻혀가던 어느 날 뜻밖에도 몽룡의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승격돼 서울에 가는 것을 계기로 슬픔에 찬 이별을 하게 된다. 3막 동헌 남원부사로 부임한 변학도는 천성이 호탕하여 수청 들 기생을 마구 잡아들이던 중 춘향의 소문을 듣고 그녀를 불러들인다. 권력으로 춘향에게 수청 들 것을 강요하나 춘향은 거절한다. 이에 격분한 변학도는 춘향을 하옥시킨다. 4막 아야고개(농촌 풍경) 한편 서울에 간 몽룡이 등과급제하여 암행어사의 중책을 띄고 남원으로 오다가 방자를 만나 춘향의 소식을 듣고, 같이 오던 역졸들에게 변학도의 비행을 힐책하기 위한 명령을 한다. 마을에 오는 길가에서 변학도의 학정에 시달린 백성들의 원성을 듣고 더욱 아연해한다. 5막 춘향의 집, 옥중 춘향의 집에 도착한 몽룡은 월매의 기도 소리에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남루한 옷차림의 몽룡을 보고 탐탁히 생각지 않는 월매의 태도를 위로하고 옥으로 간다. 수척한 춘향을 옥에서 재회하고 경솔한 행동은 금물임을 당부하며 돌아간다. 6막 동헌 신임 변사또의 생일날 각읍 수령들을 불러 호화한 잔치를 벌이고, 춘향의 사형을 집행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착착 진행될 때 몽룡이 나타나 사형직전에서 춘향을 구출한다. 헤어진 채 그리워하던 춘향이 몽룡을 만나 목숨을 구원받고 아름다운 재회와 백년가약의 꿈을 이루게 된다.
김연수 (1907~1974)
전남 고흥에서 출생했다. 1935년 유성준, 송만갑 문하에서, 1936년 정정열 문학에서 창악 수업을 받았다. 1935년 조선성악연구회 회원이었으며, 1937년 조선성악연구회 직영 창극좌 대표를 역임한 이후 1940년 조선창극단, 1945년 김연수창극단, 1950년 우리국극단 대표를 잇달아 맡았다. 1954년 대한국악원 이사를 역임했으며, 1957년에는 대한국악원 원장을 맡았고, 1961년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1964년 ‘춘향가’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받았다. 1967년 동아방송국에서 판소리 5바탕 전판녹음(140회)했으며, 1967년 <창본 춘향가>를 출간했다. 1962년~1974년까지 국립국극단 초대 단장 역임한 바 있다. <심청가>(국립창극단 14회 정기공연)의 심봉사 역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김소희 (1917~1995)
본명은 순옥이고, 호는 만정. 전북 고창군 흥덕면에서 태어나 열 세 살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15세에 흥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부터 송만갑에게 심청가와 흥보가를 배웠으며, 명창 정정렬에게 춘향가와 수궁가를 배웠다. 송만갑으로부터 동편제 판소리의 장대한 가풍을 이어받고, 정정렬으로부터 서편제 판소리의 섬세한 가풍을 두루 섭렵한 것이다. 또한 김소희는 김종기에게 가야금 산조도 배웠다. 만정 김소희는 판소리뿐 아니라 창극과 국극, 가야금, 무용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 매김 했다. 1937년 창극좌에 입단했고, 1939년 화랑창극단에 가입했다가 1942년 화랑창극단이 해산되자 잠시 창극계를 떠난다. 광복이 되자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고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창설하여 후진 육성에 힘을 쏟았다. 1964년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1957년~1958년 대한국악원 부원장, 1962년~1963년 국립국극단 부단장, 1962년~1963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1974년~1975년 국악예술학교 이사를 지냈다. 1972년 판소리 그룹단장으로 미국 18개주의 35개 대학과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한 바 있다. <춘향가>(국립극장 1회 공연)에서 춘향역, <심청가>(13회)에서 장승상부인 역을 비롯, <수궁가>(19회), <배비장전>(22회), <대업>(23회), <춘향전>(24회) 등에서는 도창으로 출연했다. 신영희, 안숙선, 유수정, 이명희, 오정해 등의 스승이다.
리뷰
<춘향전>은 국립극장 산하 국립국극단의 창단 기념 공연(1962년 3월 23일~29일)이다. 전쟁 중 거의 설자리를 잃은 창극은 ‘국극 정립’ 즉 전통 예술의 현대화를 이루려는 의지에 의해 국립극장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국립국극단은 명창 김연수를 단장으로 하여 김소희(부단장), 박귀희, 박초월, 강자원, 김준섭, 임유앵, 김경애, 김경희, 김득수, 장영찬, 강종철, 정권진, 남해성, 박봉선, 박초선, 김정희, 한승호, 한일섭, 안태식 등 21명으로 구성됐다. 6막 11장으로 이뤄진 <춘향전>은 약 80여 명의 명창이 대거 출현하여 과거의 재래적 창극과는 다른, 해방 후 바람직한 창극 방향 모색을 의도한 국립극장의 의욕적 시도였다. 하지만 국립국극단의 초대 단장이면서 연출을 맡은 김연수가 “썩은 가지는 도려내야 새 가지에 피는 꽃이 탐스럽고 열매가 큰 법인데, 내가 춘향전의 연출을 맡는다는 것부터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의 하나라 볼 수가 있다. 우선 후진이 올라올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신통한 묘를 얻지 못하는 것이 큰 괴로움”(<춘향전> 팜플렛 중)이라고 고백한 데서 드러나듯 큰 새로움은 주지 못했던 공연이었다. 국악계의 대부 성경린은 “3시간 반에 걸친 6막 10여장의 각색은 먼저 지루한 구성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김연수 단장의 말을 빌면 창을 위주로 한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고, 그건 또 너무 당연한 이야긴데 춘향가 속의 주요한 창을 많이 거세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할 것인가.… 한 말로 말하여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리라. 단원 전원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전날의 무대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창극 <춘향전>은 극보다는 소리에 중심을 두었던 공연이다.
평론
국립국극단의 창립공연이 김연수의 고루한 연출 감각으로 인해 해방 전후의 창극에서 단 한 걸음도 진전되지 못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도창(導唱)의 적절한 활용만은 호응을 얻었다. 실제로 과거부터 창극을 해온 사람들에 의해서는 새로워지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판소리 명창인 김연수는 연출에 대해서는 문외한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극적인 구성보다는 소리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략)… 김연수는 명창답게 판소리의 정통적 계승을 실천하려 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한국연극운동사>, 유민영, 태학사, 2001)
관련도서
<한국연극운동사>, 유민영, 태학사, 2001
연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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