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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1910년대의 시문학

우리의 근대문학, 즉 신문학은 유교적인 세계관과 형식주의에 바탕을 둔 전통문학의 질서가 해체되면서 새롭게 형성되었다. 임진·병자 양란 이후 18세기에 들어 실학이 대두하고 그에 따라 실사구시 정신이 발흥되면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그 본격적인 문학적 형상은 서구 열강들의 침탈이 본격화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루어진다. 내용상으로는 당시 사회적 상황에 맞선 반외세·반봉건투쟁과 부르주아 계몽주의를 중심영역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문학사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무엇보다 양식적 측면에서 근대적 틀이 어떻게 정립되는지가 더 중요한 관심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한마디로 개화가사, 창가, 신체시, 자유시로의 변화과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척사론을 중심으로 하여 적어도 갑오경장 이전까지는 한시문학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강위, 이건초, 김택영, 김윤식, 이건창 등이 대표적 시인으로 특히 황현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를 쓰고 자결하기도 했다. (1) 개화가사(開化歌辭) 개화가사는 한마디로 전통 시가의 한 형식인 가사체에다 개화기의 새로운 사상을 실은 것이다. 주로 4·4조 2행의 대구에다 후렴을 붙이는 형식으로, 전통가사에 비해 길이가 현저히 짧아진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의 천주교 가사나, 동학 가사인 최제우의 <용담유사(龍潭遺詞)>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개화가사는 크게 일본의 침략성과 친일 세력의 비리를 폭로, 규탄하는 ‘우국경세가류(憂國警世歌類)’, 자주 독립과 애국, 신문명 신교육의 도입, 부국 강병, 국위선양 등을 주제로 한 ‘애국가류(愛國歌類)’, 의병들의 항쟁을 찬양, 고무한 ‘항일의병가사(抗日義兵歌詞)’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주요작품으로 최제우의 <교훈가>, 이필균의 <애국하는 노래>를 들 수 있다. (2) 창가(唱歌) 창가는 기독교 찬송가나 신교육 기관을 통해서 보급된 서양 음악과 결합하여 형성된 것으로, 1896년 <독립신문>에서 처음 쓰였다. 전통적 율조(3·4조, 4·4조)에서 벗어나 6·5조, 7·5조, 8·5조 등의 다양한 율조를 취했다. 처음에는 애국사상, 신문명의 찬양 등을 노래하다가 점차 개인의 서정 세계를 표현하면서 문학성을 의식하게 되었다. 당시 국민 모두의 노래로 보급되었고, 뒤에 유행 가요로 변해갔다. 대표적 작품으로 최남선이 지은 <경부철도가>, <한양가> 등을 들 수 있다. (3) 신체시(新體詩) 1908년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시로 신시(新詩)라고도 한다. 6·5, 7·5, 8·5조 등의 외형률에서 탈피하여 좀더 자유시에 접근한 형태의 시이다. 즉 전통시가와는 판이한 형식의 자율성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다분히 산문적이며 무엇보다 가창(歌唱)에서 벗어난 변모를 보여준다.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최초의 작품이다. 그 외에 최남선의 <신대한소년>, 이광수의 <우리 영웅> 등이 대표작이다. (4) 자유시(自由詩) 신체시를 계승하고 서구의 시를 수용하면서 1918년 무렵부터 현대적 자유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지배적이었던 외형률의 형식적 규칙성에서 탈피하여 내재율이 지배하는 형식으로 바뀌어졌다. 1918년 <태서문예신보>에 김억의 <봄은 간다>·<무덤>과 황석우의 <은자(隱者)노래> 등이, 같은 해에 불교 잡지 <유심(惟心)>에 한용운의 <심(心)>이, 그리고 1919년 <학우>지에 주요한의 <봄>·<시내> 등의 작품이 발표되어 자유시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자유시는 김억, 황석우, 주요한 등이 일본 유학시절에 <학지광>(1914. 4), <태서문예신보>(1918. 9), <학우>(1919. 1), <창조>(1919. 2) 등의 문예지를 통해 그 출구를 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김억의 주도로 간행된 <태서문예신보>를 통하여 서구 문예 사조가 소개되기 시작하였고, 무엇보다 상징주의 시를 통해 자유시의 한 경향이 정립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규찬(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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