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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극 형성의 시기: 1970년대

마당극의 형성: 1970년대 1970년대, 마당극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는 정치사적으로 유신시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삼선개헌으로 세 번째 연임까지 밀어붙인 박정희의 공화당 정권은, 1970년대 초반 세계적인 냉전체제의 이완과 데탕트 체제로 정권의 근거인 반공이데올로기가 약화되고 1960년대의 급작스런 경제성장의 후유증으로 계층적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하자, 일반 민주주의의 원칙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몰아가기 시작한다. 1972년 10월유신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킴으로써 거의 영구적인 장기집권을 기도하는데, 특히 이 유신헌법은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삼권분립을 무너뜨리고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허용하며, 계엄과 흡사한 긴급조치라는 초헌법적인 조치를 국회의 승인 없이 선포·유지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하는 비민주적인 법적 장치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1974년 이후 긴급조치는 남발되었고, 베트남 전쟁이 종결된 1975년 이후 국민들은 기본적인 집회결사의 자유나 언론출판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으며, 모든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학생회가 해산되고 군대식 체제인 학도호국단으로 개편되었다. 이와 함께 이 시기에는, 대학의 학생운동이 양적으로 축소되면서 질적으로 심화되는 계기를 맞았고, 1960년대 이후 이농하여 도시에 정착한 노동자와 도시빈민들의 기본적인 생존권 투쟁이 전태일 평화시장 노동자의 분신이나 광주 대단지 사건 등 민란적 양상을 띠는 극한적인 투쟁의 양상을 보이며 솟아올랐다. 또한 기본적인 인권이 침해되는 상황에서 종교인, 교수, 예술인 들의 인권수호 차원의 저항이 생겨난 시기이기도 하다. 마당극사의 본격적인 시작은 1973년 김지하 작, 연출의 <진오귀굿>으로부터이다. 서구 근대연극에서 기반한 신극으로부터 출발하여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과 민족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진 한 맥과, 전통민속연희 부흥운동의 맥이, 바로 이 작품을 계기로 결합되기 시작하였고, 이 지점에서 마당극은 탄생한다. 전통민속연희에 대한 관심은 1970년부터 각 대학의 탈춤반의 결성으로 조직화 양상을 띠게 된다. 1970년 부산대, 1971년 서울대를 출발로 하여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탈춤 붐은 1970년대의 문화적 사건으로, 후에 탈춤부흥운동이라고 칭해졌다. 당시로서는 엄숙한 지식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대학생, 게다가 서양식 교육의 최고학부를 다니는 학생들이, 일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장구 장단에 맞추어 몸을 격렬하게 흔들면서 춤을 추고 대사를 하는 모습은 매우 파격적이고 신선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당사자들에게도 강렬한 경험이었다. 이들은 잔존하고 있거나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탈춤을 직접 찾아가 그 원형을 전수 받고 연습하여 대학에서 공연함으로써, 그 작품이 지닌 조선 후기의 민중성과 민족적 미의식을 체험하고 연구하는 것을 주요한 활동으로 삼았다. 이러한 민중성과 민족적 미의식의 체험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현재적인 역사적·사회적 관심의 소산이었고, 따라서 이들이 탈춤의 민중성과 민족적 미의식 등이 특성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대와 접목시키고자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마당극은 기존 연극의 서양연극 중심성과 순수주의에 대한 반성이라는 한 축과, 민족적 역사의식과 민중지향성을 구심으로 하고 있었던 탈춤부흥운동의 현재적 지향이, 당대 민중현실을 향한 구체적인 연극실천 의지와 만나면서 만들어졌다. <진오귀굿>은 서양연극으로부터 배워온 구성력과 탈춤과 판소리 등 전통민속연희로부터 배워온 표현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계몽극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앞선 김지하의 다른 희곡(<나폴레옹 꼬냑>, <금관의 예수> 등)과 달리 이 작품이 독특하게 전통민속연희의 표현법을 과감하게 도입하고 열려진 판의 외향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는 것은, 당시의 농민들을 관중 대상으로 삼아 그들이 이해하고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도의 소산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즉, 이전 작품이 내용적으로는 민중지향적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양식적 특질 때문에 당시 농민들에게 친근하게 수용되기 힘들었던 작품임을 생각하면, <진오귀굿>은 양식의 변화를 통해 농민들에게 좀더 쉽고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의도가 읽히는 작품인 것이다. 구체적 민중 대상을 향한 실천의지가 전통민속연희의 어법과 질감 속의 민중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 셈이다. 이 연극에 중심적으로 참여했던 임진택과 채희완은 이후 마당극운동을 이끄는 쌍두마차가 되었다. 한편 이보다 한 해 뒤인 1974년 ‘민예극장’에서 공연된 <서울 말뚝이>는 기성연극계 마당극의 출발이었다. 대학연극으로부터 연극을 시작하여 1960년대 대표적인 동인제 극단인 ‘실험극장’의 창단멤버이기도 했던 허규가 1973년에 창단한 이 극단은, 서구식 연극에 대한 기본 소양을 바탕으로 전통민속연희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지속해 왔으며, 결국 이 작품으로 첫 결실을 보게 된다. 말뚝이라는 탈춤 양반과장의 인물형을 현재로 끌어내어 당시 세태를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이후 <물도리동> 등 다른 스타일의 전통민속연희의 무대화의 실험과 함께 전통민속예술의 미의식과 표현법, 연극적 어법이 어떻게 현대화될 수 있는지를 정리해가는 중요한 실험이었다. <진오귀굿> 이후 민족극 계열의 마당극운동은 김지하의 영향을 받은 임진택, 채희완 등의 68·69·70학번 세대에 의해 주도된다. 1974년 <소리굿 아구>는 이들의 힘으로 만든 첫 작품으로 이 작품을 계기로 최초의 마당극운동 조직인 ‘한두레’를 결성하게 된다. 당국에 등록한 극단이 아니었으므로 정부의 논법으로는 당연히 불법집단임이 분명한 ‘한두레’는, 공연과 연구 등을 포괄하는 마당극·연행예술운동 집단이었다. 암울했던 시기인 유신 말기, 1975년 이후에도 마당극은 다양한 형태로 꾸준히 공연되면서 확실한 양식 형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새롭게 생성되어가는 양식이 지닌 활력이란 게 이처럼 대단한 것인지 새삼 감탄하게 될 정도로, 이 시기에는 다양하면서도 우수한 마당극 작품들이 생산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뛰어난 작품들은, 당시의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여 사건의 진상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작품들이다. 1974년의 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운동을 다룬 <진동아굿>(1975년), 1978년 세칭 ‘동일방직 똥물사건’을 다룬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1978년), 1년 여에 걸친 함평 농민들의 고구마 수매싸움을 다룬 <함평고구마>(1978년, 광주 놀이패 ‘광대’), 세칭 ‘무등산 타잔 사건’을 다룬 <덕산골 이야기>(1978년, ‘한두레’) 등이다. 이 작품들은 당시 가장 첨예한 사회적 사건이지만 억압된 상황에서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던 사건이었으므로, 공연의 내용 자체가 가지는 사회적 긴장감이 매우 높았다는 점, 실제 사건의 실상을 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리얼리즘적인 태도로 실제 사건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형상화하고 있는 동시에 자연발생적인 서사극적 장치들이 고안되고 충실히 기능하고 있는 마당극이라는 점 등의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덕산골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세 작품은 모두 강한 집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진동아굿>은 이후 즉석 모금운동과 사건보고대회로 이어졌고,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는 공연 막바지가 예기치 않은 시위로 발전하여 출연자 모두와 관객들까지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으며, <함평 고구마>는 농민대회장과 함평 마을에서 투쟁의 승리를 보고하는 자축적인 분위기에서 공연이 됨으로써, 마당극다운 공동체적인 관극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들 작품이 실제 사건의 요약적이고 효과적인 전달과 그에 대한 정서의 공유를 목표로 함으로써, 이러한 의도에 따라 형식이나 기법적 장치들이 그에 따라오는 감이 강했다면, 이와 반대로 양식에 대한 고민이 돋보이면서 허구적 설정을 통해 당시 사회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내용의 형상화가 이루어지는 작품들도 있다. 임진택의 작품은 서양 근대연극에서와 같은 현실적 개연성을 지닌 인물과 사건을 설정하면서 이를 마당극적 양식으로 풀어내는 실험의 결과물들이다. 황석영 원작의 <돼지꿈>(1977년, 서울여대 연극반), 윤대성 원작의 <마스게임>(1978년, 이화여대 연극반, 원제목 <출세기>)와 <노비문서>(1979년 이화여대 연극반)이 그러한데, 이 작품들은 애초에 마당극 양식으로 쓰여지지 않은 희곡을 바탕으로 하여 마당극을 만듦으로써, 원작 희곡을 과감하게 개작하여 새로운 마당극 극본을 만들고 마당극적인 연출과 연기로 공연이 이루어진 작품이다. <돼지꿈>, <마스게임>, <노비문서>는, 각기 도시 빈민 한 가족의 역설적인 희망, 매스컴에 의한 인간의 물신화로 몰락하는 한 탄광 노동자의 이야기, 피지배자들에 대한 지배자들의 기만과 억압 등을 다룬 작품으로, 당시로서는 꽤나 강도 높은 사회비판성과 민중의식을 지닌 작품인 동시에, 작품의 민중적 역동성을 새로운 형식과 기법으로 소화해냄으로써 독특한 마당극의 양식 원리를 정리해보고자 하는 의욕이 넘치는 작품이다. 이에 비해 채희완과 탈춤반 출신들이 만든 작품들은, 훨씬 춤적인 상징성이 강한 인물과 사건 설정으로 탈춤의 형식과 기법들, 미의식과 질감을 적극적으로 현대화하고자 노력한 작품들이다. 앞서 언급한, 남사당 덧뵈기의 틀을 이용하여 노장을 일본인 사장으로, 취발이를 이에 맞서는 한국 청년 아구로, 두 소무(小巫)를 일본인 사장에게 농락당하는 여공과 여대생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일본의 경제침략에 대해 비판한 <소리굿 아구>를 비롯하여, 전통탈춤의 대표적인 여성상인 미얄을 현대로 가져와 이농, 공장 취업, 악덕기업주에 항의한 싸움과 해고, 창녀로 전락하여 비참한 최후로 이어지는 당시 기층민중 여성의 전형으로 형상화한 <미얄>(1978년), 예수의 생애를 현대 한국의 밑바닥 민중의 이야기로 바꾸어놓은 <예수전>(1978년)과 <예수의 생애>(1977년)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탈춤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을 창작탈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의 활동으로 노동자를 비롯한 기층민중에 대한 연극교육, 예술교육이 시작되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여성사업장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1970년대 노동운동은,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유신체제의 강압적 분위기에서 적지 않은 사건을 남길 정도로 격앙되었다. 당시 마당극운동의 담당자들은 민주노조 안의 연극반과 탈춤반의 지도강사로 나가 이들에게 연극과 탈춤을 가르치고 이를 바탕으로 마당극 창작을 시도하였다. 이때까지 이들은 비전문인과 생산직 근로대중들에 대한 연극교육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돈된 인식을 가지지 못한 채 전통탈춤을 가르치는 등 대학 동아리에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활동하였지만, 바로 이러한 경험을 통해 기층민중들이 지니고 있는 자기표현 욕구와 역동성 등을 생생하게 체험함으로써 1980년대 노동자·농민 대상의 공연과 교육이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 외에 노동자들의 투쟁과 해고의 과정을 노래와 춤으로 엮어 만든 <공장의 불빛>(김민기 작사·작곡·연출, 채희완 안무)은 이후 노래운동과 춤에 큰 영향을 미쳤고, 유신체제에 항거하여 할복자살한 김상진의 장례식을 공연적 이벤트로 연출하여 시도한 <김상진 장례식>(1975년, 서울대 탈춤반·문학반 등)은 이후 1980년대에 수없이 치러졌던 공연적인 대규모 의례의 시조(始祖)격이 된다. 한편 ‘민예극장’은 1974년 <서울 말뚝이>, <일설호질> 등으로 출발하여, 1975년 <덜덜다리>, 1979년 <놀부뎐>, <가로지기> 등으로 이어지는 마당극 실험을 계속해 옴으로써, 나름대로의 마당극 양식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물도리동>과 <한네의 승천> 등 전통민속연희의 요소들을 비교적 닫힌 무대에 올려놓는 실험과, 국립창극단에서의 창극 연출 등으로 현대의 한국연극과 전통민속연희의 습합 실험이, 본격적인 마당극의 양식 실험과 수반되어 진행되고 있었다. 요컨대 이 시기는 연극계 바깥에 있던 민족극 계열에서나 연극계 안의 민예극장에서나, 마당극의 양식이 형성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마당극 양식 형성의 활력은, 1980년대 민족극 계열 마당극의 양적 발전과 대형 마당놀이가 대중적으로 공연될 바탕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영미(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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