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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연극시대의 개막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서울 대학로가 연극의 메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1981년 개관한 문예회관(현 문예진흥원 예술극장)이 그 동력 구실을 했다. 7백석 규모의 대극장과 2백석 규모의 소극장과 연습실을 갖춘 이곳이 문을 열어 연극을 포함한 공연예술의 새로운 중심지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여타의 소극장, 이를테면 바탕골소극장, 연우소극장, 성좌소극장, 대학로극장 등이 하나둘씩 인근에 모였고 90년대를 거치면서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수십 개의 소극장이 이처럼 한 지역에 옹기종기 둥지를 틀고 키재기를 하는 곳은 세계 연극계에도 유래가 없는 일이다. 문예회관은 개관 기념 공연으로 실험극장의 <강릉매화전>(이재현 작·유흥렬 연출)을 선보였다. 여러 소극장 가운데 혜화동 연우소극장은 극단 연우무대의 주무대로 1980년대를 빛낸 가장 주목받는 공간이었다. 당초 연우소극장은 1985년 신촌역 부근에 문을 열고 <한씨연대기>(황석영 작·김석만 연출), <칠수와 만수>(오종우·이상우 작, 이상우 연출) 등 서사 풍자극을 공연하면서 젊은 대학생 관객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주로 서울대 출신 동인들로 구성된 연우무대는 1987년 활동 근거지를 혜화동 지금의 자리로 옮긴 뒤에도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등의 풍자극을 거푸 올리며 이름값을 높였다. 이런 풍자극의 인기는 이 집단이 추구한 진보적 연극 형식 못지않게 민주화열기로 들끓던 1980년 당시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1980년대 생긴 대학로 밖 공연장으로는 신촌의 산울림소극장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연출가 임영웅이 사재를 털어 만든 이 소극장(1985년 개관)은 2백석 남짓의 아담한 공연장으로 돌출무대다. 임씨는 개관 기념작으로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자기 연출로 선보였다. 임씨는 이 작품을 1969년 국내 초연했으며 오늘날까지 갈고 닦아 자신의 명 레퍼토리로 정착시킨 인물이다. 산울림소극장은 1986년 박정자의 <위기의 여자>를 선보여 뭇 여성관객을 사로잡아 이후 ‘여성연극의 산실’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공연장의 다변화 못지않게 1980년대는 연극 전문 인력이 곳곳에서 제목소리를 내던 시기다. 그동안 큰 물줄기를 형성해 오던 주류적 사실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몸짓도 활발했으며, 1970년대부터 발화한 전통의 재발견과 실험 등 한국적 연극 문법에 대한 탐색도 더욱 심화하기 시작했다. 전라도 씻김굿의 형식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이현화의 <산씻기>(유덕형 연출, 1981년) 등이 1970년대와 1980년대 이런 움직임을 잇는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연극이 제도화 과정으로 편입된 것 또한 1980년대 빼놓을 수 없는 양상이었다. 축제가 제도화를 추동했는데, 1977년부터 열리기 시작한 ‘대한민국연극제’가 대표성을 확보했다. 이 축제는 1987년 서울연극제로 명칭이 바뀌면서 내용과 형식면에서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 행사를 중심으로 문제작과 문제적 연극인들이 탄생했다. 이런 행사를 통해 전문 연극 인력의 자부심은 커져갔다. 김상열의 <언챙이 곡마단>, 황석영의 <한씨연대기>, 이강백의 <봄날>, 정복근의 <지킴이>와 <실비명>, 오태석의 <부자유친> 등이 이 연극제를 통해 각광받은 대표적인 창작 희곡들이다. 이밖에 김정옥은 총체극을 내세운 <바람 부는 날에도 꽃이 피네>(1984년) 등을 가지고 해외 무대로 눈을 돌려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채윤일·기국서 등은 파격적인 실험무대로 자기 세계를 확보했다.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강영걸 연출)를 쓴 극작가 이만희, <오구-죽음의 형식>을 선보인 이윤택 등도 1980년대 후반부터 각각의 영역에서 성과를 높이기 시작했다. 정재왈(연극평론가·LG아트센터 운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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