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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장 운동 시기

1960년대 동인제 극단의 활약은 1970년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힘을 얻었다. 그들의 지향점은 서로 달랐지만, 연극의 규모와 형태는 비슷했다. 소극장을 중심으로 한 연극운동은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지금도 대학로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소극장 연극은 이런 전통의 맥을 잇는 연장선상에 있다. 1970년대 소극장 운동의 진원지는 카페 떼아뜨르, 3·1로 창고극장(에저또 소극장), 실험소극장, 세실극장, 공간사랑 등이었다. 대부분 극단을 기반으로 엮였으며 지역적으로는 명동(카페 떼아뜨르, 엘칸토예술극장 등), 안국동(실험소극장, 공간사랑), 신촌(민예소극장 등) 등으로 구분됐다. 카페 떼아뜨르는 자유극장의 전용은 아니었지만 이 극단의 작품을 가장 많이 올렸다. 1960년대 말부터 추송웅 등이 출연하는 모노드라마 혹은 2인극으로 명성을 높였다. 이곳에서는 관심을 끌만한 전통의 현대적 재창조 작업도 활발했다. 극단 민예가 전통 탈놀이를 응용한 연극 <서울 말뚝이>를 이곳에서 선보였다. 카페 떼아뜨르의 성공은 유사한 형태의 공연장 설립을 부추기기도 했다. 이화여대 앞의 ‘카페 파리’가 일례이다. 방태수가 이끄는 극단 에저또의 본거지였던 3·1로 창고극장은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빨간 피이터의 고백>을 공연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카프카의 소설 <어느 학술원에 제출된 보고서>를 각색한 것인데, 추씨는 이 작품을 통해 제작·연출·연기 등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다. 총 1백63회 공연에 8만5천여 명의 관객이 몰려 이 시기 흥행 신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소극장으로서 안국동(이후 운니동)의 실험극장이야말로 이 시대의 전설이었다. 피터 쉐퍼 원작·김영렬 연출의 <에쿠우스>(신정옥 옮김), 아돌 후가드 원작·윤호진 연출의 <아일랜드>(구히서 옮김) 등 해외의 문제작들이 연속적으로 무대에 올려져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전통은 1980년대 <신의 아그네스>(윤호진 연출·윤석화 주연)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밖에 정동 세실극장은 1981년 대학로에 문예회관이 문을 열 때까지 대한민국 연극제를 여는 등 중요 행사의 거점이 되었다. 김상열 연출의 <멀고 긴 터널>(이재현 작), 김정옥 연출의 <무엇이 될고 하니>(박우춘 작) 등 주목할만한 작품이 공연됐다. 건축가 김수근이 1977년 개설한 ‘공간소극장’은 김덕수의 사물놀이를 잉태하는 등 전통연희의 실험공간으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연극의 규모에 따른 소극장 운동이라는 가치 이외에 1970년대 연극은 시대적 격변을 온몸으로 체험하기도 했다.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연극적인 반작용으로 마당극·마당굿 운동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했다. 김지하의 <나폴레옹 꼬냑>(1970년)과 <구리 이순신>(1971년), <금관의 예수>(1973년) 등은 당대 민중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이 계열의 원조들이다. 이런 ‘민중극’에 대한 관심은 대학가의 ‘탈춤 부흥 운동’으로 이어졌다. 1973년 대학 극회와 탈춤반이 함께 공연한 <진오귀>는 최초의 마당극으로 기록됐다. 또한 전남 함평 농민들이 정부의 고구마 수매정책에 항의하며 피해보상을 벌인 끝에 승리한 실화를 다룬 <함평 고구마>(박효선 작, 1978년, 광주)는 고구마탈을 이용한 이채로운 마당극이었다. 극단 한두레가 공연한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서울제일교회, 1979년)은 동일방직의 노조탄압사건을 극화한 것으로, 나중 뮤지컬 작업으로 이어지는 김민기 음악극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이런 사회풍자극은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더욱 격렬한 형태로 전개된다. 정재왈(연극평론가·LG아트센터 운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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