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개요

자세히보기

동인제 극단의 활성화 시기

한국 연극사 서술에서 이른바 ‘현대극’의 기점으로 삼는 시기다. <우리연극 100년>(2000년 현암사)의 저자인 서연호·이상우는 1960년대를 ‘근대극’의 기점으로 잡는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뚜렷한 ‘탈사실주의’ 경향이다. 1960년 공연한 이근삼 작 <원고지>를 필두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서사극, 부조리극, 전위극 등 다양한 실험이 본격화했다. 두 번째는 오늘날 연극과의 ‘동시대성’을 든다. 현재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연극인들 대부분이 이 시절에 연극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연극 운동과 세계사 속 ‘탈근대의 몸짓-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적 고찰과 반전운동’ 등과의 연관성이다. 아무튼 이런 문화사적 기반 위에 서있는 이 시대의 연극사적 특징은 동인제 극단의 탄생이다.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당 수의 극단들이 이 시기부터 동인제 형태로 출발했다. 비온 뒤 생기는 죽순, 말 그대로 우후죽순 같은 기세였다. 실험극장(1960년), 산하(1963년), 민중극장(1963년), 드라마센터(1964년), 가교(1965년), 자유극장(1966년), 광장(1966년), 여인극장(1966년), 성좌(1969년), 산울림(1969년) 등. 이 무렵 뜻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돈을 갹출하고 공연도 함께 하며 극단을 꾸려나가는 동지애로 뭉쳐 탄생한 극단들이다. 단체가 다양한 만큼 각기 지향하는 연극의 무늬도 다채로웠다. 서울대, 고려대, 연대 극회 출신들로 진용을 갖춘 동인제 극단의 원조 격인 실험극장은 부조리극인 이오네스코의 <수업>(허규 연출)을 창단 작품으로 선보였다. 극단의 이름에 걸맞는 패기찬 도전이었다. 민중극장은 이근삼, 김정옥 등 해외 유학파를 주축으로 탄생했다. 부조리극과 창작극을 두루 선보였는데, 이근삼의 <국물 있사옵니다>(1966년)가 이 시기를 대표했다. 차범석이 참여한 산하는 손창섭 작·이기하 연출의 <잉여인간>을 창단 작품으로 공연했다. 이 단체는 차범석의 사실주의극을 표재순이 연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극단 드라마센터는 1962년 남산의 소극장 드라마센터가 개관하면서 그 부설 단체로 만들어졌다. 실질적인 소유주인 유치진의 우산 아래에서 성장했다. <전위극 시리즈> 등 화제 무대를 많이 만들었다. 가교는 김진태, 이승규, 최주봉, 윤문식 등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생들이 주력 부대였다. 극단 최초로 해수욕장 등을 돌며 ‘천막극장’을 운영하는 등 극성스런 모습을 보였다. 이진순이 이끈 광장은 국내외의 사실주의극을 많이 소개했다. 이범선의 <학마을 사람들>은 연출가 이진순의 취향이 잘 드러난 작품이었다. 여성 연극인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다. 백성희, 강유정 등이 창단한 여인극장은 이름처럼 여성들만으로 이뤄진 단체였다. 서구의 명작을 주로 공연했는데, 체홉의 <갈매기>,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밖에 자유극장은 민중극단의 일부 멤버(김정옥, 이병복)들이, 성좌와 산울림은 각각 권오일과 임영웅이 만들었다. 동인제 극단의 융성은 1950년대 후반부터 전개된 소극장 운동의 덕택이다. 이런 흐름은 1970년대 뚜렷한 결실을 맺게 되는데 이 ‘두 10년’이야말로 한국연극의 르네상스 시기가 아니었나 한다. 1960년대 극장 분야의 사건으로는 드라마센터의 개관이다. 김중업이 설계한 4백70석 규모의 이 극장은 당시 최첨단의 시설을 갖춘 고급 공연장이자 동양극장 이후 두 번째의 연극전용극장이었다. 더불어 자유극장의 동인인 이병복이 운영한 명동의 다방극장 ‘까페 떼아뜨르’는 1975년 폐관할 때까지 살롱드라마 공연의 산실 역할을 하며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오태석의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김동훈 출연)가 여기에서 초연되었다. 정재왈(연극평론가·LG아트센터 운영부장)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