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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연희 개량 운동과 신파극 전성 시기

예나 지금이나 극장은 공연예술의 중심이다. 한국 연극의 기점도 이 극장의 탄생에서 출발한다. 1902년 문을 연 협률사(현 충정로 새문안교회 자리)는 황실에서 설립한 한국 최초의 실내극장이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지 40주년을 맞아 국내외의 귀빈을 접대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지어놓고도 유행병과 흉년, 전쟁(노일전쟁) 등 국가적인 불운이 연속적으로 닥쳐 1904년 음력 8월 6일에야 겨우 간단한 개관의식을 치를 수 있었다. 출발이 좋지 않았던 터였을까. 협률사의 수명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극장을 풍기문란 등의 주범으로 간주한 당시 보수층에게 미운털이 박힌 나머지 1906년 4월 17일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보수 세력이 보기에 협률사의 연극이란 음란한 목소리와 난잡한 몸짓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천한 것에 불과했다. 이런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한, 최초 관립극장의 조기 폐지는 곧 한국 연극과 극장 발달의 지체를 가져온 큰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연희에 맛을 들인 관객들의 입맛을 쉽게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후 등장한 광무대(1907∼1930)와 원각사(1908∼1914)가 협률사를 대신하면서 한국 연극 발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여론을 선도하던 언론(신문)은 연극을 신파극과 구파극 등으로 나누어 부르면서 시대의 변화를 이끌었다. 판소리 등이 구파극이었다면, 이와 다른 ‘새로운 연극’을 신파극(신연극)으로 통칭했다. 새로움을 뜻하는 ‘신(新)’자는 당대의 화두이기도 했다. 신소설·신사상·신문명 등 ‘신’자는 곧 당대 진보의 상징어이자 유행어였다. 그런 변화에 맞춰 연극도 변화를 모색해야 했다. 판소리를 비롯한 구파극을 연희 개량의 대상으로 놓고 그 대안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신파극이었다. 신파극의 원조격은 임성구가 창단한 ‘혁신단’이다. 혁신단 연극의 목표는 당대 ‘신’자 문화운동의 목표와 일맥상통했다. 권선징악·풍속개량 등이 바로 이들의 목표였다. 단체의 이름을 혁신(革新)으로 칭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어 등장한 문수성, 유일단 등의 활동도 이런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910년대는 이런 신파극단의 창설이 부지기수로 이루어진 신파극 전성시대였다. 신파극은 다양한 전개과정을 거쳐 발전했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는 일본 작품의 번안(飜案)이었다. 원작의 구조와 인물을 가능하면 살리면서 토착성을 가미한 현지화 작업의 수준이었다. 혁신단의 <불여귀> <육혈포강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음은 신소설의 각색 단계다. 일본의 신소설 <금색야차(金色夜叉)>를 각색한 역시 혁신단의 <장한몽> 등이 그 예이다. 이어 신파극은 현실 소재를 응용한 ‘시사 구성극’, 신파극과 영화를 결합한 ‘연쇄극(連鎖劇)’을 거쳐 급기야 ‘창작극’의 단계에 이르렀다. 불행히도 1910년대 신파극은 대본으로 남아 있지 않다. 때문에 당시 신문 등의 기록을 통해서나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그 내용은 권선징악 등 계몽적인 성격이 강했다. 일례로 <육혈포강도>는 인민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강도와 싸우는 순사의 이야기로 ‘잘못을 뉘우쳐 새 사람이 되라’는 충고를 담았다. 신파극은 문명개화를 명목으로 한 일본 식민시대의 정략(政略)과 은연 중 관계가 있지만 동시대의 대표 문화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1912년 최초 희곡인 조일제의 <병자삼인>을 비롯해 이광수의 <규한> 등이 발표되면서 희곡 문학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정재왈(연극평론가·LG아트센터 운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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