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개요

자세히보기

한국연극의 배우

‘연극의 꽃은 배우’라고 불릴 만큼, 배우는 연극의 핵심으로, 연극을 실행하는 자라고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배우는 전통적으로 광대, 재인, 양수척, 수척, 화척, 창우, 우인 등으로 널리 불리어 왔으며, 조선조 말까지 사회적 신분이 제한되었다. 따라서 배우가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난 것은 신연극 이후의 일이며, 신연극 초창기에도 배우를 하면 집안에서 제사를 못 지낸다느니 했으며 여배우는 매우 드물었었다. 신파극 초기에 임성구, 한창열, 고수철, 김도산, 김소량, 윤교중, 조중환 등이 활약했으며, 특히 임성구는 ‘인력거꾼으로 나와도 비단옷을 입었’을 정도로 인기있는 스타였다. 여성배우는 1910년대 말 창극계통에서 전향한 김소진이 최초라고 하며, 1920년대에 들어서야 이월화나 복혜숙 등이 등장하였다. 최초의 배우학교는 1920년 2월 현철이 세운 ‘예술학원’이었다. 연극반과 무용반이 있었는데, 배역에 대한 불만으로 분란이 일어나 문을 닫고 말았다. 여기의 연극반원 김정원과 이경손이 동경유학생들과 합류하여 ‘무대예술연구회’를 조직하여 시연하기도 했다. 현철은 1925년 다시 ‘조선배우학교’를 개교하고 이듬해 1926년 2월에 제1기생을 졸업시키기도 했다. 복혜숙과 양백명은 이 학교를 중퇴하고 ‘토월회’로 가기도 했다. 1920년 초반의 학생극 운동은 많은 인테리 아마추어 배우를 양산하기도 했다. 홍난파, 유춘섭, 허하지, 홍해성를 비롯하여 마해송이 여역으로 출연했으며, 윤심덕도 배우에 합세하였다. 이월화, 복혜숙, 석금성 같은 여배우가 자리를 잡은 것도 이 때였다. 전문극단으로 계속된 ‘토월회’는 서월영, 이운방, 김수련, 박제행, 양백명 등을 연기인으로 선발하여, 나중까지 연극 영화인으로 연기하게 된다. ‘토월회’ 말기에는 강석연, 강석재, 최승이, 전옥, 심영, 이애리수 등도 신인으로 선발하였다. 1930년대 홍해성이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사실주의의 핵심 연기술인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이 소개되었다. 그 말기에는 동경학생예술좌 출신인 김동원, 이해랑, 이진순 등 우수한 신인 연기자들도 가입하였다. 한편 1930년대 전반기에는 ‘조선연극사’, ‘연극시장’, ‘신무대’ 등의 상업극단이 많았는데, 강계식, 전경희, 변기종, 신불출, 나효진, 이종철, 원우옥, 심영, 박제행 및 여배우 이경설, 신은봉, 이애리수, 전옥, 문예봉 등이 활동하였다. 동양극장이 1935년 개관하여 월급제를 도입하게 되자 연기인들에게 큰 고무가 되었다. 황철, 차홍녀, 심영, 양백명, 김선초, 서월영, 문정복, 지경순, 남궁선 등이 활약하였다. 동양극장은 황철과 차홍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든가 지두한의 연기자에 대한 깊은 배려 등등 숱한 일화를 낳고 막을 내렸다. 사실 오늘날까지 동양극장만큼 배우를 우대했던 극단이 없을 정도이니, 실로 배우의 전성시대였다고 하겠다. 이후 1937년 만주사변 등으로 정세가 군국주의로 치닫게 되자 국민연극이 성행하였다. 국민연극경연대회에서 서일성, 황철, 김선초, 김양춘, 한일송, 박영신, 임효은, 강노석 등등이 수상하였다. 연기술의 연마라는 점에서는 중요했겠지만, 침묵할 수 있는 용기가 아쉽기도 하다. 해방과 함께 지식인층은 좌·우익 이념연극에 열중한 반면, 일반 대중은 아직도 신파극에 향수를 갖고 있었다. 결국 좌익 연기자들은 월북하고 당시 우익의 남자 연기자로는 이해랑, 김동원, 박상익, 주선태, 오사량, 이화삼, 고설봉 등을 여자 연기자로는 황정순, 김선영, 유해초, 유계선, 백성희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옛 동양극장의 연기자들도 꾸준히 활동하였다. 1950년대는 국립극장의 설립과 6·25동란이 연기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고설봉, 강계식, 변기종, 이해랑, 김동원, 백성희 등의 기성배우를 비롯하여, 최무룡, 장민호, 조미령, 강효실, 나옥주 등의 신인배우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한편 1950년대는 여성국극 내지 악극이 마지막으로 성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임춘앵, 김주전, 조금앵, 강숙자, 김진진, 박녹주, 김경애 등은 여성국극단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국극 배우이기도 했다. 1960년대 희곡이나 동인제극단의 새 바람은 새로운 많은 연기자들을 요구했다. 김동원, 장민호, 백성희 정도를 제외하면, 신구, 오현경, 이낙훈, 김성옥, 최불암, 이순재, 여운계, 나옥주, 천선녀, 김혜자, 김민자 등 새로운 연기자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더구나 TV가 등장하면서, 연기자를 방송 쪽으로 많이 빼앗기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극장주의 연극이 분명해지며, 더욱 폭넓은 연기자를 요구하게 된다. 특히 극단 ‘민예’는 탈놀이나 판소리 등 전통극을 현대극에 폭넓게 접목시켰고, ‘동랑레퍼토리’는 현대적 아방가르드 연극을 전통적 소재로 표현하고, ‘창고극장’은 최초로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했다. ‘현대극장’은 1970년대 상업연극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연우’나 ‘극단76’은 젊은 연극인들이 사회의식과 신선한 감각으로 도전장을 내었다. 배우들은 자연히 어떤 극단과 연계를 맺고, 극장주의 연극의 앙상블을 위해서 함께 훈련을 했다. 1980년대는 오태석이 ‘목화’를 창립하여, 한명희, 정진각, 조상건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적 연기 앙상블을 탐구하였다. 한편 마당극 계열의 연기자도 마당극의 부상과 함께 등장하니, 여기서 등장한 김명곤이나 문성근 등은 결국 중앙 연기자로 성장했다. 1970, 1980년대에 활약했던 연기자로 이호재, 박정자, 김성녀, 윤주상, 최종원, 김갑수, 이정희, 손숙, 윤석화, 김지숙 등을 꼽을 수 있겠다. 1990년대에 오면서, 보다 다양한 장르의 연극과 감각이 시도되고 있다. 뮤지컬의 부상으로, 남경주, 이정화, 전수경, 최정원, 소냐 등의 뮤지컬 배우가 등장했으며 나날이 많은 연기자들이 뮤지컬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마임도 역시 자리를 잡아서, 남긍호, 임도완 등이 힘쓰고 있다. 또한 새로운 많은 극단들이 생기면서 많은 배우들이 등장했는데, 정동숙, 남미정, 서이숙, 박지일, 남명렬, 오만석 등이 주목되었다. 그러나 아직껏 전반적으로 배우들의 개인기보다는 극단의 앙상블이 중요시되고 있으며, ‘목화’나 ‘연희단거리패’는 그 앙상블의 대표주자라고 하겠다. 이미원(연극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