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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전반은 밀려드는 근대의 물결에 온몸을 맡겨 그간의 소중한 유산을 유실하였고 20세기의 후반에는 인멸해 가는 유산을 가까스로 다시 세우려 애쓴 세기였다. 무용의 역사도 이런 두 얼굴의 20세기와 흡사하다. 사서에 ‘처용아비가 밤드리 노닐며 춤을 추었다’는 기록처럼 우리에게 춤이 흔하였다. 시원은 민족의 기원만큼이나 오래 되었고 민족의 역사와 늘 함께 하면서 수 천년을 이어왔고 왕조시대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궁중에서 민간의 연향에서 꽃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국권을 상실하고 가무를 담담하던 교방청들이 무너졌음에도 몇몇 뜻 있는 지사들이 그 춤 예술을 보존하게 된다. 이런 우리 춤이 중대한 위협을 받은 것은 바로 근대의 입구에서다. 그 무렵 이 땅에 새로운 형태의 춤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1921년에 해삼위 출신의 ‘조선학생음악단’이 공연하는 등 근대의 물결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 1926년 경성공회당에서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2~1962)의 공연은 각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공연의 영향으로 무용의 선구자 최승희(崔承喜, 1911~?)와 조택원(趙澤元, 1907~1976)이 춤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후 그들의 문하에서 배출된 무용인들이 우리춤 역사의 주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잘 상징하는 것이 무용(舞踊)이란 단어의 사용일 것이다. 그간 ‘무(舞)’나 ‘춤’으로 불리던 춤을 무용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단어는 일본의 영문학자 쓰보우찌(坪內逍遙, 1859~1935)가 조합한 말이다. 상체의 몸놀림을 뜻하는 무(舞)와 하체의 몸놀림을 듯하는 용(踊)을 결합하여 무용이란 이름을 만들어 영어의 ‘dance’, 불어의 ‘danse’, 독어의 ‘tanz’를 대용한 것이다. 이 단어가 곧바로 우리에게 건너왔다. 그리고 이전의 춤을 구식으로 치부하고 자신들의 춤을 신무용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이 서야 할 자리에 <부채춤>이나 <화관무> 등의 신무용이 서서 이 땅을 대표하였고 무대에서 교육현장에서 모든 것이 신무용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오랜 역사의 전통춤은 ‘니나노춤’이라는 누추한 자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당시 “녹음기를 틀고 춤을 가르치면 무용가였고 장고를 치며 춤을 가르치면 기생”이란 말이 남루한 우리춤의 처지를 잘 설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8년 고래의 민속들을 발굴하여 경연하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시작되었고 1964년에는 문화재보호법이 발표되고 12월부터 중요무형문화재제도가 시작되었다. 춤이 지정된 것은 그리고 한참 후인 1967년 <진주검무>가 지정되면서 부터이다. 이는 그간 세상의 무관심과 천대 속에서 춤을 지켜온 이에게 작은 위안이 되는 단순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조국근대화의 기치 아래서 상실해 가는 옛 풍속에 대한 연민은 무형문화재제도를 가속하고 지원 등을 점차 늘게 하였고, 국가가 인정하는 예술이란 측면에서 점차 힘을 얻어가게 되었다. 무용도 점점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데, 1969년 <승무>가 지정된 연후에는 더욱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즉 독무에 무형문화재를 수여하면서, 그간 단체종목에 비해 소홀했던, 개인의 역량이 부각되어 무용에서 개인의 이름을 딴 류(流)파가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실 무용의 최종적인 꿈은 역시 홀로 무대를 점유하는 독무이다. 이런 선호도로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문하생집단이 만들어지며 춤일의 동반자로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것이 모두 순기능이라 주장할 수는 없지만 전통에 대한 욕구와 탁마는 오늘날 전통춤이 무대와 교육현장에서 활발히 전승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진주검무>에서 시작된 무용의 지정은 1989년 <살풀이춤>까지 총 7개 종목이 지정되었는데, <진주검무(晋州劍舞)>, <승전무(勝戰舞)>, <승무(僧舞)>, <처용무(處容舞)>, <학연화대합설무 (鶴蓮花臺合說舞)>, <태평무(太平舞)>, <살풀이춤> 이었다. 이 7종목의 춤들은 점차 1세대에서 2세대로 기능이 옮겨지는 과정에 있다. <진주검무>는 1·2세대가 동시에 있고, <승전무>는 2세대, <승무>는 1·2세대, <처용무> 1세대, <학연화대합설무> 2세대, <태평무> 1세대, <살풀이춤>은 1세대인 것이다. 1세대의 특징은 ‘역사로부터의 마지막 계승자’란 의미를 가진다. 한 예를 들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에 따라 찬란하던 한국의 궁중가무는 존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었다. 이때 일제는 일본음악계의 권위자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에게 물었는데 그는 현지조사 후 한국의 궁중가무를 동양의 보물로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이로서 이왕직아악부가 생긴 것인데, 장악원(掌樂院), 교방사(敎坊司), 장악과(掌樂課), 이왕직아악대로 이어져오던 조선 궁정의 가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여기에 1922년 가을에 입소한 김천흥(金千興, 1909~)이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처용무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계승한 마지막 사람이 바로 일세대들인 것이다. 그리고 예전 광대로 대우받던 스승들의 품에서 얻은 전승물을 오늘 예술의 반열로 이끌어 올려놓은 개척자들인 것이다. 2세대의 특징은 ‘지킴이’란 특징이 있다. 오늘날 무형문화재를 승계한 2세대는 무형문화재 지정 이전에 이미 예능을 전승하기 시작한 사람이 많다. 모든 현대적인 유혹들 속에서 예로부터의 예능을 찾아 나선 것이다. 지정제도와 전혀 상관없이 거들떠보지 않던 무형의 가치를 품으면서 변혁의 시대에도 꾸준히 연마하여 오늘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의 품에서 한평생을 바쳤고 이제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마쳐갈 분들인 것이다 춤이 허공에 그리는 문자다 보니 어떠한 기록보다 그 몸 자체의 기록이 중요하다. 옛 선조의 품에서 몸 자체로 기록을 옮겨 담았으니 몸 자체로 예술품이 되는 것이다. 이런 유일무이한 현존이 바로 우리춤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분들인 것이다. 진옥섭/공연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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