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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공간 이후 춤계의 재편과 장르 세분화 탐색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한반도에서 해방과 동시에 남북 분단을 가져왔다. 해방 직후 일제 시대에 신무용 즉 한국의 근대적 창작춤을 주도하던 세 사람은 모두 남한을 떠나게 된다. 배구자는 일본으로 갔으며 최승희는 46년 여름 북한으로 갔고 조택원은 친일 행적 논란에 휘말린 끝에 47년 가을 미국으로 갔다. 최승희의 월북 직후 북한 기관의 협력을 얻어 설립한 최승희무용연구소는 1953년 국립 기관으로 격상되었다. 남한의 무용인들은 조선교육무용연구소를 비롯하여 단명에 그쳤지만 여러 협회 조직을 세워 춤의 활로를 꾀하였다. 당시 남한 무용계는 좌익계 무용인과 우익계 무용인들이 연합 공연을 갖는 등 이념 대립이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한에 단독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49년말에 남한에서는 반공주의가 주류를 이루게 되며 한국전쟁으로 인해 분단과 이념은 고착화된다. 남한에서는 일부 무용인들이 월북하였으며, 그 후 일시 공백기를 거쳐 신인들의 등장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5년 동안 함귀봉, 장추화, 정인방, 한동인, 김보남, 진수방, 정지수, 이석예, 조용자가 비교적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임성남, 송범, 김상규, 김삼화, 옥파일 등도 간간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궁중정재의 무용인들은 사설 국악원으로 집결하고 권번 출신의 무용인들은 춤의 맥잇기를 계속하였다. 이 기간에 창작발레가 한동인의 서울바레단에 의해 처음으로 무대화됨으로써 신무용에 이은 또 하나의 장르가 자리잡게 되는데, 신무용 시대에 비해 춤 장르의 용어들이 현대무용, 교육무용, 민족무용, 예술무용 등 다양하게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다수의 무용가들이 월북하거나 납북되었으며 또 월남한 무용인도 다수 있었다. 남한 출신 무용인들은 북한 무용계에서 상당 기간 동안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으로 무용계는 다시 공백기를 맞이하였으며,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무용계는 실질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대개의 무용가들은 나름의 창작 집단을 연구소 형태로 조직하였다. 50년대에 춤 창작 공연을 자주 한 무용가는 송범, 이매방, 김백봉, 진수방, 임성남, 김백초, 김윤학, 강선영, 김진걸, 주리, 정인방, 조광 등이었다. 박외선은 무용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50년대에 춤계는 장르 구분이 조금씩 진전되는 조짐을 보였으며 현대무용은 초보 단계에 머물러 상대적으로 한국무용과 발레가 활발한 편이었다. 그래도 한국 전통춤과 창작춤의 두 영역을 겸하는 무용가는 흔하였고 발레와 현대무용 그리고 남방무용을 왕래하는 무용가도 흔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무용인들은 신무용이라는 이전 명칭을 떠나 각자의 전문 춤 영역을 갖기 위해 고심하였다. 그 결과 현대무용에 해당하는 신흥무용과 한국무용이 등장하였으며, 민속춤 사위를 응용해서 무용극을 시도한 무용가도 더러 있었다. 작품들은 한국의 토착 정서, 전쟁의 상처, 인간 실존, 목가풍의 정경, 낭만적 정염 등을 주요 소재로 해서 시적인 분위기로 그려내었다. 그러나 장르 구분이 정착되지 않은 데서 유추되듯이 테크닉의 부족과 창작 여건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해 무용가들은 공감할 만한 춤 양식을 시도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하였다. 53년 이화여대 체육과에 무용 전공이 설치되어 정규 학과는 아니었지만 무용가 양성 전문 과정이 대학에 처음 개설되었고 57년에 서울예고에 무용과가 설치되었다.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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