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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100]마을 공동의 문화공간 정자나무

[한국문화100]마을 공동의 문화공간 정자나무 예로부터 마을의 휴식과 신앙 또는 회합이 이루어졌던 정자나무의 가치를 재조명해본다. 정자나무편 대본 내레이션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의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로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혹시,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혹시, 마을주민들과 서로 인사하며 지내시나요?혹시, 마을주민들과 모여서 어울린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은 넘쳐나도 삭막하기만한 현대의 도시. 서로가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간과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기는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마을사람들이 정을 나누던 공간이 있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거나 쉬기도 했던 오래된 고목. 우리 조상들은 편안한 그늘을 제공해주던 큰 나무를 정자나무라 부르며 사랑방처럼 함께 머물렀습니다. 정자나무는 한결같은 포근함으로 어른들에게는 휴식을 아이들에게는 놀이공간을 제공하였습니다. 정자나무의 넉넉한 규모와 수령처럼 정자나무와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인터뷰김판조그전에는 집이 초가삼간이잖아요. 늘어진 초가집인데 더워서 못살아. 그러니까 점심을 먹으면 다 나온거예요. 다 나와서 오후 세시정도 되어 조금 서늘해지면 그때 일터로 나갔는데 꽉차버려요, 여기가. 이렇게 올라가서 저렇게 늘어진 가지에다가 훈주(줄타기)도 타고 여기 나뭇가지에다가 그네도 매어놓고 그네도 타고 그랬어요. 어르신들이 나뭇가지 찢어진다고 못하게 했지. 내레이션현대의 도시들이 들어나고 사람들이 각자 바빠지면서 정자나무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늘 정이 넘쳤던 정자나무의 모습을 기억하고 따뜻하며 푸근했던 그 순기능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름지기재단과 서울디자인재단이 공동으로 기획하는 마을정자나무프로젝트입니다. 자막마을정자나무 가꾸기 프로젝트, 아름지기재단, 서울디자인재단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350세 느티나무 인터뷰장영석 / 아름지기재단 사무국장그동안 먹고 사는 문제, 급속히 산업화되고 경제적인 부분들을 쫓다가 결국은 다시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전통에서 힌트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자나무만 하더라도 그냥 단순히 오래된 나무일뿐이지만 사람들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아래 같이 모여서 사람 살만한 동네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되거든요. 요즘 만들어지는 그 어떤 최신식의 건물이나 현대적인 공간보다도 사람들에게 더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곳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자나무 하나하나를 고쳐가는 것이 단지 자연보호 운동이 아니고 더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김순희이런 공간이 생기니까 동네도 아름답고 공기도 좋은데 환경이 깨끗해지니까 살기 좋고 보기 좋지요. 박지훈주변에 자주 왔는데요. 정비된 후에 풍경도 더 괜찮아 진 것 같고 포근한 기분이 들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내레이션정자나무는 단순히 마을의 큰 나무가 아니라 사람, 자연, 문화가 어우러지던 마을의 상징적인 소통 공간이었습니다. 사람사이의 단절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 정자나무가 가지는 정의 가치는 우리가 다시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인터뷰방영자안락하고 시원하고 굉장히 정서적으로 좋네요. 이혜숙(혼잡한)도심 속에 있는 느낌이 안 들고 편안하고 어느 시골에 와있는 그런 느낌이 드네요. 내레이션마을 공동의 문화 공간 정자나무,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할 우리의 문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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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소통과 헌신의 지도자, 세종대왕

자막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릉 na : 지난 5월 15일, 세종대왕 탄신 617돌 숭모제전이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에서 봉행되었다. 숭모제전은 조선을 탁월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글창제는 물론 국방, 과학, 문화 등 수많은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의 위업과 애민정신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이다. int : 박종국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세종대왕의 교육 정신을 계승하고 이어가고자 하는 취지에서 정부에서는 1982년도에 세종대왕 탄신일을 법정 기념일(스승의날)로 정했습니다. 세종대왕의 정신과 교훈을 이어받아 교육을 시키는 것에는 기본적인 바탕에 그분의 신의와 믿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거짓말 하지 않고 신뢰를 지키면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심정, 즉 마음이 고르면 정치와 행정 모두 조금의 문제 없이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직언도 서슴없이 하셨는데 na : 세종은 결코 ’고분고분한’ 왕이 아니었다.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 임금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추진력이 강한 군주였다. 목표가 일단 정해지면 끈질기게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다독이며, 또 어떤 때는 위협까지 하면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결단을 내리는데 있어 끊임없이 신하들과 의논하고 토론했고, ’소통하지 않는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다’라고 보았던 세종은 설정된 목표에 왜 도달해야 하는지,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조만간 어떤 파국을 맞게 되는지를, 상세하고 명확하게 일깨워가면서 함께 나아갔다. 이것이 찬란한 조선시대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리더십의 요체였다. int : 박현모 / 여주대학교 교수,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대부분 정치가나 관료들, 또 어떤 기업이나 조직의 장만 해도 내가 잘해서 너희에게 베풀어 줄게 이런 생각을 하지, 더불어서 목표를 정하고 그들의 수준을 끌어올려서 함께 갈려고는 하지 않거든요. 아시다시피 한글창제, 문자란 권력을 백성들에게 준 거잖아요. 그건 굉장한 불편함을 지도자가 감내하는 거거든요. 문자라는 권력을 주고, 또 해시계 물시계와 같은 시간이라는 중요한 정보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거 거든요. 본인은 왕 스스로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수준을 확 끌어 올려서 함께 나아가도록 하는, 그런 일종의 모험인데 그 점에서 굉장히 우리가 요즘 배워야 할 요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na :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보며 정사를 돌보기에 힘썼던 세종은 재위 중반부가 되면서 온몸은 망가지고 갖가지 질병으로 힘들어하면서도 그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설득하고 추진하고, 확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말 뿐인 지도자가 아닌 몸으로써 결과로써 백성을 하늘같이 섬기는 정치를 해내었다. int : 박현모 / 여주대학교 교수,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외국인들도 세종에게 굉장히 공감하는 코드들이 있는데, 지도자가 결정할 때 바로 눈앞에 보이는 엘리트들이 아니고, 가장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결정을 내리는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사람이 반응을 보이고 그것이 말로 휴머니즘에 대표적인 사례다. 이것은 단지 한민족의 문제가 아니고, 글로벌하게 다 통하는 리더십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조치를 하고 그걸 제도화해서 경국대전에 반영되도록 한 그런 휴머니즘적인 리더십, 리더십의 지평을 좀 확 넓히면 굉장히 사람들로 하여금 신이 나게 하는 그런 리더십의 사례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na : 취미이자 특기가 공부였고, 의젓하고 조심하며 부지런한 성격의 소유자 세종. 성격이 다정다감해서 부모 형제에게 효제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겸손하면서도 공경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 왕이라고 자신의 지위를 들어가니 않고 겸손으로 백성을 섬겼던 왕 소통과 인내가 부재한 이 시대에 사회 계층의 각각의 지도자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소통과 헌신의 리더십을 일깨워 또 다른 세종시대가 열리길 바래본다. 자막 세종대왕 업적 1397년(태조 6년, 1세) 4월 10일(양력 5월15일)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탄생하다. 1408년(태종 8년,12세) 충녕군에 책봉되고 심온의 딸(소헌왕후)과 혼인하다. 1412년(태종12년,16세) 충녕대군에 진봉되다. 1418년(태종18년,22세) 6월 왕세자로 책봉되다. 1418년(태종18년,22세) 8월 10일(양력 9월 18일) 조선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하다. 1419년(세종 1년,23세) 이종무가 227척의 병선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하다. 1420년(세종 2년,24세)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키다. 집현전의 기구를 확장하여 궁중에 설치하다. 1421년(세종 3년,25세) 주자소에서 금속활자 「경지자」를 완성하여 인쇄술을 개량하다. 1423년(세종 5년,27세) 금속화폐 「조선통보」를 주조하다. 1424년(세종 6년,28세) 사죄(死罪) 삼복법(三覆法:삼심제)을 정하여 죄인의 억울함을 줄이다. 불교의 종파를 선종, 교종 양종 35사로 통합하다. 악기도감을 설치하고 악기를 제조하다. 1426년(세종 8년,30세) 젊은 학자를 뽑아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하게 하다. 1430년(세종12년,34세) 새로운 세법인 공법(貢法)의 실시 여부를 각도의 수령과 백성들에게 물어 찬반의 숫자를 조사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론조사) 관노비(官奴婢)의 출산휴가에 대한 법을 정하다. 1433년(세종15년,37세) 압록강 이북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을 설치하여, 국경을 이룩하다. 정초,이천 등의 「혼천의」를 제작하다. 1434년(세종16년,38세) 장영실이 제작한 「자격루」를 보루각에 설치하여 사용하다. 조판 주조의 법을 개량하고, 새 활자 「갑인자」를 만들다.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다. 1437년(세종19년,41세) 이천 등이 파저강 야인(여진족)을 정벌하고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이 동북으로 두만강에 이르게 하다. 1441년(세종23년,45세) 「측우기」를 제작하고, 「수표」를 세우다. 1443년(세종25년,47세)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언문청을 설치하다. 1445년(세종27년,49세) 화포를 개량하여 화포의 사정거리가 2배 이상 늘어나다. 「용비어천가」,「의방유취」를 편찬하다. 1446년(세종28년,50세) 소헌왕후가 승하하여 영릉(서울 내곡동)에 장사하다. 훈민정음을 반포하다.「훈민정음 해례본」을 완성하다. 1447년(세종29년,51세) 「치화평」, 「취풍형」, 「여민락」등의 악보를 완성하다. 「석보상절」을 간행하고,「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하다. 서울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을 개축하다. 1448년(세종30년,52세) 경복궁 안에 내불당을 건립하다.「동국정운」을 간행하다. 1449년(세종31년,53세) 두만강 유역의 6진을 모두 개척하다. 1450년(세종32년,54세) 2월 17일(양력 4월 8일) 영응대군 집 동쪽별궁에서 승하하시어, 소헌왕후가 안장된 영릉(서울 내곡동) 서실에 합장하다. 1469년(예종 1년) 영릉을 서울 내곡동에서 경기 여주군 능서면 위치에 천장하다. 자막 우리 모두가 소통과 헌신의 리더십을 일깨워 이 시대에 또 다른 세종시대를 열어 나가길 소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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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3

[한국문화100]민족기원의 상징 단군

[한국문화100] 민족 기원의 상징 단군 한민족의 시조이자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과 홍익인간 정신에 대해 알아본다. 단군대본 내레이션우리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 고조선.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던 시기, 부족들을 통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한 인물이 바로 한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단군이다. 자막고조선(기원전2333년) 요동과 한반도 서북구 지역에 존재한 최초의 국가단군 우리민족의 시조 내레이션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첫 기록은 고려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찾을 수 있으며 자막단군신화가 기록된 최초의 사서 삼국유사단군왕검이 아사달을 도읍으로 조선을 개국했다 내레이션특히, 고조선의 건국에는 우리 민족 시조 신화인 단군 신화가 포함되어 있다. 아주 오랜 옛날, 하늘의 신인 환인에게는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환웅은 아버지 환인에게 ‘하늘에서 살기보다 인간세계로 내려가서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고 이에 환인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라는 홍익인간 정신을 당부하며 자막홍익인간 홍 크다(규모가 거대한 모습) 성장 생산성 경쟁력 자유익 돕는다 더한다 이롭게 한가 빼앗음 착취 억압 방관사람 사이 관계 인간세상 공동체 내레이션인간세상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백산 자락으로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살던 환웅에게 어느 날,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빌게 된다. 곰과 호랑이의 정성을 갸륵하게 여긴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당부한다. 성질이 급한 호랑이는 약속한 기일을 참지 못하고 굴 밖으로 뛰쳐나와 사람이 되지 못했지만 환웅의 말을 믿고 잘 참은 곰은 결국 아름다운 여인이 된다. 사람들은 곰에서 변한 여자를 웅녀라고 불렀고 웅녀는 환웅과 결혼하여 건강한 아들을 낳게 된다. 이 아이가 고조선의 첫 번째 임금인 단군이다. 인터뷰윤명철 / 고조선단군학회장 동국대학교 교수일부에서는 곰과 호랑이의 존재 특히 곰이 웅녀로 변신한 다음에 환웅과 결혼했기 때문에 이것을 곰 토테미즘(자연물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는 형태)이라든지 아니면 신화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신화와 토테미즘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당시 곰과 연관되어 있던 특정한 집단일수도 있고요. 아니면 곰은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의 곰이 아니라 원래 우리 말, 특히 알타이어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가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 중앙아시아 전체에 퍼져있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바로 가미라고 불리는데요. 이 가미라는 것은 알타이어에서 무당을 뜻합니다. 감, 검, 금, 고마, 개마 이렇게 나타납니다. 이때 곰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의미의 곰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무당을 뜻하면서도 주로 밝음과 상대되는 어둠과 연관된 하늘에 대비되는 땅과 연관된 단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민족의 여러 개 지명, 산명, 인명 등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의미의 곰 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우리 알타이어 문화권에서 가지고 있는 감계언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한 개 집단과 땅 지역과 농경문화를 관리하는 지모신의 고마, 개마, 검 집단의 결혼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자막참성단(사적 136호)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 내레이션사적 제136호 참성단. 강화도 화도면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께서 제천의 대례를 행하고 뜻을 드높였던 곳이다. 그러한 뜻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어, 단군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를 건국한 것을 기리는 매년 10월3일 개천절에는 여전히 중요한 제천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자막 단기 4347년 개천대제 2014년 10월 3일 마니산 참성단 인터뷰이상복 / 강화군수1년 동안에 많은 고생을 해서 곡식도 잘 재배를 했고 또 여러 가지 보람 있는 일도 있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감사의 뜻도 하늘에 올리는 뿐만 아니라 내레이션각지의 단군성전에서도 개천절에는 어김없이 민족의 시조 단군을 기리는 행사를 거행하며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홍익인간,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단군 신화 속의 이념은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최고 이념으로 윤리의식과 사상적 전통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인토뷰김창환 / 국학원 사무총장우리나라 국조 단군이 나라를 건국할 때 이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한 것이 홍익인간입니다. 홍익인간은 말 그대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너와 내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이고 또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사상입니다. 우리가 지금 물질문명이나 경쟁 속에 사는 우리 사회에서는 너와 내가 분리 되어 있고 너와 내가 경쟁을 해서 이겨야지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홍익인간 사상은 나뿐만 아니고 상대방, 인간뿐만 아니고 자연 모두가 행복하고 이로운 세상을 꿈꾸는 그런 사상입니다. 내레이션단군신화에는 다른 나라의 신화에서와 달리 신들 혹은 인간과의 대립, 갈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홍익인간의 이념에는 조화와 평화를 중시하는 세계관이 담겨있다. 단군. 단군과 그의 정신은 단순히 부정확한 역사와 과장된 신화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 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적 역할을 해왔다. 단군의 의미와 정신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우리 민족의 출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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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

한국문화100 독도편 대본 내레이션한반도 동쪽의 작은 섬. 천연기념물 336호. 바다를 거치는 새들의 안식처.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여 다양한 어종이 모여드는 황금어장. 천연가스층이 발견된 해저자원의 보물창고. 신라시대 사람 이사부부터 조선의 안용복 그리고 1950년 해방 이후 독도의용수비대원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곳.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저는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입니다. 평화로운 섬인 저 독도는 아픈 과거로 지금까지 상처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의 첫 희생물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야욕에 불타던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1905년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독도를 주인 없는 섬이라며 불법 편입합니다. 그런데 저 독도가 과연 일본의 주장대로 주인 없는 섬이었을까요? 1145년에 발간된 삼국사기를 포함하여 한국의 수많은 옛 문헌과 지도들은 독도를 오랜 옛날부터 한국의 영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1454년 제작된 세종실록지리지는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0년 대한제국은 칙명 제 41호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합니다. 일본의 기록은 어떨까요? 일본은 1905년 이전에는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일본 문헌은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17세기 말 일본은 공식문서를 통해 독도가 공식영토가 아니라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1877년 일본정부 최고 행정기관인 태정관은 일본 전역의 지적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밀한 조사 끝에 독도가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110년간 숨겨져 있다가 1987년에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태정관 문서는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님을 일본정부가 공식 확인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카이로, 포츠담 선언 등 전후 처리 과정에서 패전국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쫓겨납니다. 저 독도도 한국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는 독도를 분명한 한국의 행정관할 구역으로 선포합니다. 인터뷰성일종 / (사)독도사랑운동본부 부총재분명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일본과 우리가 이러한 가치의 문제 때문에 많이 싸우게 될 겁니다. (독도가 일본의 것이라고)잘못 교육받은 일본의 메인스트림(주류사회)과 우리의 젊은이들이 대응을 하게 될 텐데요. 그에 대한 일환으로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막연히 독도는 정부가 지켜줄 것이라고 지금도 국민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서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가 소중한 영토에 대한 교육을 통해서 일본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민부 / 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독도는 우리의 땅임에 틀림이 없고 또한 국제법적으로도 현재 우리가 이 땅을 소유하고 있고 방공식별구역이라든지 항공식별구역 등등 국제조약을 통한 국제 협약에서도 현재 이 부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이 문제는 얼마든지 우리가 논쟁을 해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만 일본은 자기들이 시네마현에 편입을 했다고 하는 1905년 사실 하나만 가지고 줄기차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 국력을 튼튼히 해서 조금도 허술한 면이 없도록 독도를 잘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레이션저 독도는 대한민국 주권회복에 상징입니다. 저를 둘러싼 일본의 역사왜곡문제는 건전한 한일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치명적인 현안입니다. 동반자적 관계로 미래를 열기 위해 일본의 끊임없는 도발적 행동으로부터 평화의 섬, 저 독도를 기억하고 지켜주세요. 저는 영원히 한반도의 동쪽 끝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로 자랑스럽게 서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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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생명의 흙, 황토

황토는 한국인의 정서적 감흥에 가장 잘 부합되는 색깔과 느낌이다. 가치를 알아보고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황토 대본) 나레이션 중국 최고의 지리서 산해경, 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최고의 의학전서 동의보감. 황토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에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황토는 구들방, 초가집 등 주거문화를 시작으로 조상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재산이었다. 또한 예로부터 살아있는 생명체라 하여 많은 약성을 가져 무병장수의 흙으로도 불려 왔다. 인터뷰 노희명/서울대학교 응용생물학부 교수 황토란? 황토는 말 그대로 누런 흙을 뜻합니다. 영어로 보면 loess로 독일어 어언을 갖고 있는데, 나일강 유역에서 처음으로 발견 됐음에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나레이션 생명의 흙 황토, 황토는 학술적으로 바람에 의하여 운반되는 쌓인 황색의 광물질을 의미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암석이 풍화되는 과정에 생긴 토양’을 총칭하여 황토라 한다. 황토는 단순한 흙이라는 범주를 뛰어 넘어 주거와 식생활뿐 아니라 다양한 생활 제품으로 이용되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 황토로 유명한 이곳은 지하 6미터 아래에 있는 입자가 작고 색이 짙은 황토를 채굴 하는 곳이다. 고창황토를 연구하시는 박영택 선생님께 우리 고유의 황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터뷰 박영택 /황토 명인 황토분말이나 건축자재를 만드는 황토의 채취장입니다. 산의 1미터정도 깎고 그 밑의 황토를 채취를 해서 황토를 가공해 황토제품을 제작합니다. 황토는 예로부터 조상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일부였지만 현재는 황토를 일상생활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충남 /계족산 하지만 이곳 계족산에서는 현대인들이 황토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다. 도심 속에 위치한 황톳길을 맨발로 걸으며 황토를 느끼고 상쾌한 기운도 얻어 갈 수 있는 곳이다. 최희주/ 신세대유치원 교사 저희 유치원의 슬로건이 자연생태 활동위주입니다. 자연 생태 활동 위주로 교육을 하다 보니 자연 황토가 건강에 도움이 많이 되고, 황토의 촉감놀이도 느낄 수 있으며 시멘트에서 사는 아이들보다는 자연에 어울러져 사는 아이들이 좋을 꺼 같아 오게 됐습니다. 흙과 우리 민족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흙을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다양한 흙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황토의 유용성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우리 전통 흙 문화로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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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조선시대의 지식인의 상징, 퇴계 이황

조선시대 학자인 퇴계선생의 업적을 알아보자 ---대본--- 자막)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퇴계의 업적을 귀감 삼아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나레이션청렴결백한 공직자이자 우수한 교육자, 그리고 성리학을 발전시킨 사상가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비인 퇴계이황. 퇴계 이황의 업적은 6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퇴계의 여러 업적중 가장 두드러 지는 것은 학자로서의 모습이다. 중국의 주자 이후에 동양에서 최고의 학자가 퇴계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가 이처럼 많은 이들에 존경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가 학문을 연구한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퇴계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공직자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가 벼슬을 79번이나 사퇴했다는 이야기는 후세에 많은 귀감이 되는 좋은 일화다. 또한 도산서원을 비롯한 서원건립에 힘을 써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는데, 출세를 하기 위해 학문을 닦는 안 좋은 학습 풍토를 개선하는데 퇴계 선생이 일조를 한 것이다. -인터뷰퇴계 선생이 살아 계실 당시에는 벼슬을 한다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과거 공부를 해서 벼슬 정승판서가 되면 부귀영화가 다 따라왔어요.그런데 퇴계 선생은 임금이 벼슬을 주면 사양했습니다.그 횟수가 70번이 넘습니다.명종이란 임금이 퇴계 선생을 모시려고 했는데 안 오시니깐 화공을 보내서 도산서원을 그리게 했어요.퇴계 선생이 도산을 기술한 도산기라는 글이 있는데 그 것을 (그림에)쓰게 하고, 그 다음에 신하들을 시켜서 ‘명현부지탄’이라 ‘어진선비를 불러도 안오는 것을 탄식하노라’ 하는 시를 만들어서 임금이 자기 침실의 병풍에 쳐놓고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퇴계 선생 이후에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가 퇴계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많은 학자가 나오고 풍속이 순화해지고 도덕적인 수준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퇴계 선생이 직접 기른 제자들 중에는 나라에 기둥이 되는 명신들이 많았습니다. 자막퇴계이황(1501~1570) 나레이션그는 올바른 교육 문화를 위해서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하였다. 또 항상 모범적인 태도로 바람직한 선비상을 보여 제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육자 이기도 했다. 그는 2000여편이 넘는 시를 남긴 문학자이자 효와 예법을 중시하고 실행한 인격자이며 성리학을 알린 사상가 등 다양한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자막 매화시28년동안 매화에 관하여 지은 시를 모아 놓은 책이다.매화를 사랑한 퇴계 선생은 75제 107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남겼다. 무불경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조심하고 공경하여야 한다는 뜻. 도산십이곡퇴계선생이 도산의 산수를 소요하여 읊은 시조 성학십도유교철학의 주요체계 10가지를 도식으로 나타낸 것으로 68세떄에 작성하여 선조대왕께 보냄. 퇴계선생서절요퇴계선생의 중요한 서간(용건을 알리는 메모)을 모아놓은 책 퇴계선생언행록퇴계선생의 평소 언행을 기록해 둔 책으로 1613년 도산서원에서 간행함 나레이션특히 성리학의 심성론을 발전시키고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규명하는 등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을 정립하였는데 큰 공을 세웠다. 유학의 철학적인 부분을 성리학이라고 부른다. 공자 시절 성현의 가르침들은 많았지만 이가 학문적으로 체계화 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13세기 송나라때와서 주자를 중심으로 학문적인 체계를 이루게 되는데 이를 성리학 이라고 부른다. 이 성리학을 발전시키고 널리 알린 대학자가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다. 자막주자(1130~1200)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 도산서당퇴계선생이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직접 머무르면서 제자를 가르치던 곳 인터뷰사실 퇴계 선생은 조선의 유학자이기에 앞서 일본,독일,영국 등에 알려진 세계적인 유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퇴계 선생이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의 역사를 당생과 당파의 역사로 매도한 것 때문입니다. 성리학, 주자학, 유학이 폄하된 면이 있습니다.그러나 학문적으로 일본과 독일 같은 곳에서 퇴계학 연구가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레이션지금도 일본과 독일 등에서는 퇴계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퇴계의 업적을 귀감 삼아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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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드넓은 영토를 개척한 광개토대왕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장 시켰던 광개토대왕에 대해 알아본다. ------------------------------------------------------------------------------------------- Na 이곳은 충북 충주에 위치한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전시관에는 고구려가 만주부터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던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비석, 충주 고구려비이다. int 박경애 / 충주 문화관광 해설사 한반도의 유일한 (고구려) 석비라는 사실 만으로도 굉장히 큰 역사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비 비문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서 그때 당시에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넘어서 이곳 충주지역까지 진출했었던 확실한 증거자료입니다. Na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의 장수왕 시대의 기록이 남아 있는 충주 고구려비, Na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까지 그 기초를 닦아 놓은 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장수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이다. Na 어느 나라나 어느 민족이나 자랑할 만한 왕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여러 가지 업적 가운데 나라를 키우고 영토를 확장하는 왕만큼 존경받는 왕이 없을 것이다. Na 그래서인지, 광개토대왕을 가리키는 완전한 이름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인데, 이 이름은 땅을 넓게 차지하고 나라를 잘 다스린 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int 고운기 /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는 주로 중국 쪽 나라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광개토대왕비에는 그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와의 관계 그리고 또 바다 건너 일본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보면은 광개토대왕은 북쪽으로는 중국에 여러 나라들과 활발한 외교전을 벌였는가 하면 또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면서 남진정책의 시발점도 바로 광개토대왕 때 부터 이루어졌고, 광개토대왕은 동서남북을 통틀어서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한 확장시켜 나갔던 그런 왕이었고, 이런 기록들이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집니다. Na 중국 지린 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경기도 구리시에서는 후손들에게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과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고자 실제 크기의 광개토대왕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그 비문의 내용을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Na ‘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Na 왕위에 올라 20여년의 기간 동안 나라를 부국하게 만들기 위해 쉴 틈없이 달렸던 광개토대왕은 39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게 된다. int 고운기 /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고구려의) 국경이 확대가 되고, 또 그 확대된 국경 속에서 나라가 온전히 이어나갈 수 있게끔 그 틀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 언제 드러나냐면 그의 아들인 장수왕 때 드러나요. 장수왕은 왕위에 무려 70년을 넘게 있었어요. 그리고 이름도 장수왕이에요. 장수왕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고구려가 있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정말로 잘 물려받았던 것이 뭐냐면, 이렇게 큰 나라를 지키고 유지해 나가는 데에는 전쟁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무력에 의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70년을 고구려를 끌고 갔거든요. 그것이야말로 사실 우리가 고구려의 역사 속에서 특히 5세기에 광개토대왕에게 배워야 하는 가장 훌륭한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죠. Na 우리민족을 일컫는 말 중에 배달의 민족이라는 말이 있다. 배달의 뜻은 고구려의 기상과 뜻을 널리 펼쳤던 우리 민족을 높게 나타내는 말이다. 단순히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가와 백성을 아우르는 통솔력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장시켰던 광개토대왕, 그는 서양의 정복 왕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견되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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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세계화 된 국제공인스포츠, 태권도

대표적인 한민족 고유의 무술로, 우리나라에서 창시되어 세계화된 국제공인스포츠이다. 우리 고유 무술 태권도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대본)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투기 스포츠 신체 단련과 정신적 무장을 통한 올바른 인간화를 중시 또 다른 대한민국의 국기 태권도다. 무기 없이 손과 발을 이용해 공격과 방어하는 무도, 태권도다 조선, 중국, 일본의 최고의 무예를 집대성한 동아시아 무예사의 보고, 무예도보 통지. 무예도보통지에서 권법은 무기가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키울 수 있는 능력을 보고 하였다. 조선적 권법을 체계화한 무예도보통지는 오늘날 맨손무예의 원형이 되었고, 이후 발차기 등의 동작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며 태권도로 발전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인터뷰 강규진/ 태권도진흥재단 교육부담당관 태권도의 란? 태권도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심신 수련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무예이며, 태권도는 무기 없이 손과 발을 이용해 공격과 방어하는 무도이다. 우리민족의 기상이 넘치는 태권도의 힘과 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자. 태권도의 태권도 3대 기본 구성이란? 기본발차기 태권도에서 중시되는 기본 구성을 알아보자. 품새는 혼자서 상대를 가상하고 한 자리에서 두 동작이상을 순간적으로 행하여 힘과 유연성 등 호흡과 동작의 완급을 발전시키는 동작이다 겨루기는 품새를 통해 익힌 공격방어의 기술을 응용하여 실제로 상대편과 대결하는 기술이다. 마지막으로 격파는 손과 발 등의 공격 및 방어의 부위를 각종 보조 기구를 통하여 강화 단련함으로써 파괴력을 기르는 것으로 품새 겨루기와 함께 태권도를 구성하고 있다. 태권도의 국제화? 태권도가 특유의 장점으로는 대한민국의 문화가 태권도 속에 담겨있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태권도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사범에 대한 존경심, 상대에 대한 이해(존중), 스스로 몸과 마음을 수련할 수 있다는 점이 있고, 또 하나의 이유로는 가족 스포츠로 할머니, 할아버지, 손자 등 가족끼리 함께 할 수 있는 스포츠로 세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오게 된 것입니다. - 오늘날 태권도가 세계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수많은 태권도인들의 분투가 밑받침되었다.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단체를 하나로 통합했으며, 세계태권도연맹을 중심으로 태권도는 전 세계에 크게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1980년 국제 올림픽위원회 프로그램 위원회에서 태권도가 공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94년 9월 4일. 파리 IOC 제 103차 총회에서 여든 다섯명의 IOC 위원의 전원 찬성으로 마침내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하계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태권도가 세계로 전파 된지 불과 40년 만에 지구촌 스포츠로서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또한 1967년 최초로 태권도를 주제로 문화콘텐츠가 제작되었고, 무도에서 무예로 스포츠로 다시 세계의 문화로 무한한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세계 속 한류 상징이 된 우리의 태권도. 국가와 인종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예절과 자신감을 주는 스포츠이자 앞으로도 널리 알려야 할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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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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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농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다, 풍물 굿

농악이라 불리는 풍물 굿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대본---내레이션이때 농사꾼들의 능률을 올려주기 위해서 한데 모여 흥을 돋우는 의식을 벌였는데 이를 풍물 굿 이라고 한다.주로 농사를 할 때 행해져 농악으로도 알려져 있는 풍물 굿은 농경사회를 이뤄온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알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농촌문화다.풍물 굿이 주로 타악기를 이용한 흥겨운 리듬의 굿판을 벌이는 게 기본 형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때때로 춤과 노래등의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재미를 더해주곤 한다.뿐만 아니라 서로 음식도 나누어 먹고 대화도 하는 등 다목적 기능의 종합예능 형태를 띠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버라이어티 행사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풍물 굿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한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공동노동을 하면서 노동의 애환을 달래주는 음악과 춤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그러나 풍물 굿은 두레라는 강력한 조직에 힘입어 상당히 체계적으로 발달하였다. 인터뷰풍물 굿이란 농악이라고도 하는데요, 소위 풍물 꾕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등의 타악기들을 동원을 하고 여기에 음악적인 요소, 무용적인 요소, 연극적인 요소 등이 종합적으로 결합되어져 만들어지는 우리나라의 전통 공연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물 굿은 이른바 집단적인 신명이라고 하는 (한국인들이 신난다고 하는 것) 것을 가장 깊고 포괄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그런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공연 예술이라는 점에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겠습니다.내레이션풍물 굿의 형태와 특징은 지역마다 각기 다른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 한 팀들을 통해 풍물 굿을 만나보자.자막이서들소리보존회 (경상북도)경북 청도군 이서면에서 전승되는 농업노동 풍물굿으로 주민들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내레이션우리선조들의 마을 공동 문화상을 알아 볼 수 있는 대표 전통 문화, 풍물 굿. 농경문화가 없어지면서 자연스레 풍물 굿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전통문화를 지키는 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한 이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는 계속되리라 믿는다.앞으로도 풍물 굿은 한국 최고의 농민예술로 우리들에게 많은 울림을 줄 것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한민족의 한과 정서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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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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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3

[한국문화100] 비무장지대 DMZ, 비극의 땅에서 희망의 땅으로

비극의 땅으로 인식되고 있는 비무장지대의 생태이야기 --대본-- 내레이션- 비무장지대를 처음 방문하고자 했을 때 나는 왠지 모를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 민간인에겐 철저히 통제되어진 이 땅을 직접 밟을 생각에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 세계 유일의 분단 보존 지역이자 민족상잔의 비극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땅. - 영어로 DMZ라고도 불리는 이 곳의 첫 모습은 나에게 생각보다 평화롭고 차분하게 다가왔다. - 한반도 휴전의 상징이자 자연생태계의 보고로 각광받고 있는 비무장지대, 나는 지금부터 이 곳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한다. - 비무장지대의 시작은 1953년 진행된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남과 북은 직접 충돌을 막고자 한반도 중심인 북위 38도에 휴전선을 긋고 위 아래로 각각 2KM씩 철조망을 친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 이때부터 민간인의 출입을 철저히 막아온 비무장지대는 약 2억 7천만평에 달하는 광대한 범위의 지구에서 유일한 특수지대로 탄생하게 된다. - 비무장지대가 군사적 완충지대이기는 하나 여전히 충돌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 그래서 민간인이 들어 올 수 없도록 휴전선 남쪽으로 5~20km정도를 통제구역으로 지정해놓았다. - 이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는 사람이 살 수는 없지만 농사를 짓기 위해 농부들이나 안보관광을 위한 관광객들의 출입은 허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 비무장지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생태계가 아주 잘 보존 되어있다. - 60여년 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으니 자연은 당연히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동식물들이 많이 살고 있어 최근엔 생태학자들에게 연구가치가 높은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 나는 오랜기간 비무장지대 내의 생태계 연구에 힘써 온 김계성 작가를 만나봤다. 인터뷰 - 여기 민통선에서만 보이는 꽃으로 말씀드릴 수가 있는데, 이게 지느러미 엉겅퀴입니다. 왜 그런지 자세히 보시면, 이 줄기에 고기 지느러미 같은 모양이 있단 말입니다. 엉겅퀴의 종류에는 고려엉겅퀴 그리고 그냥 엉거퀴, 지느러미 엉겅퀴, 가시 엉겅퀴, 흰 엉겅퀴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건 고기지느러미를 닮아서 특별합니다. 민통선에 많이 자생을 하고 있습니다. - 이게 단풍잎돼지풀입니다. 외래종인데, 국가에서 유해종으로 지정된 열두종의 식물 중 한 종입니다. 이 단풍잎돼지풀은 사실 우리나라에 도래한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한국전쟁 무렵 그때 도래된 것으로 알고있거든요, 그게 어떻게 들어왔냐면 다국적군의 군용베낭 거기에 씨앗이 묻혀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의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한국전쟁 후부터, 특히 민통선 인근의 미군부대가 많았잖아요, 그래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일반 국수나무가 별도로 있어요, 이건 나도국수나무입니다. 나도국수나무는 민통선에서만 보이고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내레이션 - 비무장지대는 식물뿐만 아니라 곤충, 조류, 포유류 등 다양한 천연기념물 및 멸종위기 종 들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특히 철새들의 서식지 및 이동경로가 되고 있어 국제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인터뷰- 지금 비무장지대에서 아주 주목해서 봐야 될 부분이, 멸종위기 동물입니다. 특히 멸종위기 1급이 8종이나 있거든요, 저희들이 조사하면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렁이 같은 1급서부터 두루미, 재두루리 등의 조류, 그다음에 포유류 중에서는 삵 살쾡이가 멸종동물 2급인데, 이런 멸종위기 동물 1급과 2급 전체를 합하게 되면, 약 30종정도가(비무장지대에)있어요. 이 좁은 지역에 법적으로 보호해야 될 멸종위기 종이 30종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다른 의미에서는 멸종위기 종들이 다른 지역에서 살 수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피난처라고도 생각이 되지요. 이 부분이 비무장지대가 가지고 있는 생태적인 가치라고 생각이 됩니다. 내레이션 - 남과 북이 서로를 미워하면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땅. - 그러나 60여년 간 인간의 발길이 끊이면서 이 곳은 그 어디보다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탈바꿈해갔다. - 이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 환경을 계속 지키고 보전한다면 아마도 한반도의 평화는 저절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 평화와 통일의 밝은 미래가 오는 그날까지 비무장지대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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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3

[한국문화100]마을 신앙의 중심 서낭당

민중의 염원과 기원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마을 신앙의 중심 서낭당의가치를 재조명한다. 제목 : 마을 신앙의 중심 서낭당 내레이션 성황은 서낭당에 모신 신을 뜻하는 것으로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지금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많이 사라졌지만 마을 어귀나 산허리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돌무더기, 오래된 나무, 작은 당집 그리고 나무와 당집이 같이 있는 형태 등으로 서낭당은 존재했다. 서낭당에는 오방색을 뜻하는 오색띠가 매어져 있거나 금줄이 쳐져 있는데 이러한 것은 복을 부르고 사악함을 쫓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서낭당을 개인적 혹은 마을공동체 신앙의 수호신 삼아 섬겼다. 인터뷰 김창호 /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서낭당이 지금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남아있는 서낭당들도 무형문화재라는 입장에서 보존되고 있는 차원인데요. 사실, 서낭당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마을 공동체의 표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서낭제를 통해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도 하고 그 안에서 다음세대에 대한 마을의 전통을 교육하는 것도 일어납니다. 굉장히 순기능적인 여러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마을이 옛날 같지 않고 아파트와 같은 분할된 가구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으로 변해서 옛날에 한마을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가 되었던 모습은 찾기가 힘든데,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것이라는 입장 이외에도 한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을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서낭당을 통해서 주어졌던 것인데요. 그런 부분들이 오늘날에도 꼭 필요하고 없어졌기 때문에 아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막 성황당 1937년 발표된 정비석의 단편소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토속신앙과 인간의 삶을 신선하고 조화롭게 묘사 내레이션 우리의 문학과 노래에는 서낭당이 자주 언급되었다. 그만큼 우리 민중들과 가까웠던 것이 서낭당이다. 정비석의 소설 성황당은 후미진 평안도 산골에서 숯을 구워먹고 사는 순이 부부와 그녀를 노리는 사내들의 이야기를 원초적이고 관능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특히, 성황당과 순이의 관계를 통해 토속신앙과 인간의 삶을 신선하고 조화롭게 묘사했다. 자막 깊은 산중에서 숯을 구워 생계를 꾸려가는 현보의 아내 순이는 모든 일을 성황님의 은덕으로 여기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현보를 도와 숯가마에 불을 때던 순이가 더위를 참지 못하여 옷을 벗고 개울에서 목을 할 때, 예전부터 순이를 노리고 있던 산림간수 긴상이 그녀의 옷을 감추고 협박을 한다. 순이는 이에 단호히 대항하고 앙심을 품은 긴상은 순이의 남편 현보를 산림법 위반으로 고발하여 감옥에 가둔다. 이때, 순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칠성이 찾아와 긴상과 칠성은 순이를 사이에 두고 격투를 벌인다. 며칠 뒤, 다시 칠성이 나타나 순이에게 현보가 3년은 감옥에서 지내야 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같이 도망칠 것을 종용한다. 그가 가져온 분홍 항라적삼과 수박색 목메린스 치마에 마음이 끌린 순이는 칠성을 따라나선다. 그러나 30리쯤 갔을 때 산을 떠나 살아야 한다는 사실과 현보에 대한 그리움, 무엇보다도 성황님의 벌에 대한 무서움 때문에 순이는 칠성에게서 도망쳐 집으로 돌아온다. 순이가 “성황님 ! 성황님 !” 을 외며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방안에서는 “에헴” 하는 현보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밤 따라 접동새와 부엉새 소리는 순이의 가슴을 파고드는 듯이 정다운 것이었다. 자막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 내레이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에서는 두 가지 형태의 서낭당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하회마을 가장중앙에는 삼신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가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회마을이 조성될 때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 나무의 수령은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신목을 서낭당 삼아 정월대보름에는 제를 올리며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과 공동의 소망을 빌기도 한다. 인터뷰 손주호 / 대구광역시 지금 만나고 있는 연인과 안 싸울 수는 없겠지만, 싸우더라도 서로 잘 잡으면서 이 운명 끝까지 꼭 가져가고 싶습니다. 김명숙 / 서울특별시 저를 비롯해서 제 가족과 친지, 주위의 분들, 다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김문배 / 서울특별시 곧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무사히 잘 태어나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그것을 빌러 왔습니다. 내레이션 특히, 삼신당은 자식을 귀하게 여겨 후손이 잉태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잘 들어주어 마을 전체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하회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앞산의 중턱에는 또 다른 서낭당인 중당이 조성되어 있다. 서낭당과 같은 마을제당은 주민들의 종교심성을 공유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이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마을의 신을 중당에 모셔와 제사 지내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한다. 해설사 인터뷰 박순화 / 안동문화관광해설사 중당은 국신당을 모셨어요. 국신당은(공민왕의 모신 것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70여일을 몽진을 오셨어요.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그래서 안동에는 공민왕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조성되었지 않나 싶습니다. 풍산류씨들이 하회마을에서 많은 인재가 특히, 영의정 서애 유성룡 대감 같은 명재상이 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자막 국신당은 신격화된 고려의 공민왕을 의미하며 특히 안동지역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신앙되고 있다. 자막 강원도 강릉시 내레이션 강원 강릉시에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강릉단오제 기간 동안 대관령산신을 모셔와 서낭제를 지낸다. 자막 학산서낭당 강릉단오제의 주신 대관령국사성황 범일국사가 태어난 학산의 서낭당으로 매년 음력 4월15일 머물러 굿과 제례를 올린다. 내레이션 강릉고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께 제사하고 험준한 대관령 산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풍작과 풍어 집안의 태평 등을 기원한다. 제를 시작으로 진행되는 강릉단오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축제로 신과 인간이 자연스럽게 만나 하나가 되는 만남의 공간이다. 서낭당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섬기는 것은 단순히 기원의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식, 심적인 유대, 연대감을 강화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민중이 가깝게 여기는 마을제당이자 개인제당이었던 서낭당.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할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다.

제작
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대한민국 국화, 무궁화

대한민국의 나라꽃[국화(國花)]이며, 예부터 한반도를 부르는 ‘근역(槿域)’의 유래이기도 하다. 한국문화100 무궁화편 대본 대한민국의 국화, 무궁화 내레이션 옛날 옛날에 장미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린왕자가 있었습니다. 그 행성 옆에는 저 어린공주가 외롭고 쓸쓸하게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함께할 친구를 찾았죠. 자막 안녕, 무궁화 내레이션 아무도 찾지 않는 행성이지만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어요. 궁금해진 저는 그 친구에게 말을 걸었지요. 넌 누구니? 안녕, 난 한국의 국화 무궁화라고 해. 오, 그래? 그럼 넌 어떤 꽃이니? 나는 한국인과 무려 오천년을 함께한 민족의 꽃으로 고조선 이전인 신시시대부터 한화로 불리며 한국인과 함께해왔지. 자막 무궁화는 고조선 이전인 신시시대부터 한화로 불린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내레이션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내 품종은 수 백 종으로 배우 다양해. 대표적으로 배달계, 홍단심계, 백단심계 등이 있지. 자막 무궁화의 품종은 수 백 여종으로 매우 다양함 대표적으로 배달계, 홍단심계, 백단심계가 있음 내레이션 이름만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니? 물론이지. 자막 배달계 흰색을 좋아하는 배달민족을 닮았다해서 배달계로 불리며 단심이 없는 순백의 무궁화 내레이션 우선 배달계 무궁화는 흰색을 좋아하는 배달민족을 닮았다고 해서 배달계라고 불려. 그리고 무궁화 중에 품종 수가 가장 많은 홍단심계는 붉은색 계통의 꽃잎과 단심으로 가지고 있어서 홍단심계로 불리지. 자막 홍단심계 붉은색 계통의 꽃임에 가운데 붉은 단심이 있으며 무궁화 중에 품종수가 가장 많음 내레이션 또 백단심계는 흰 꽃잎 가운데 붉은 단심이 있는 무궁화야. 자막 흰 꽃잎에 가운데 붉은 단심이 있음 재래종과 도입종의 교잡에서 선발한 무궁화 내레이션 아 그럼 넌 백단심계 무궁화구나 오, 똑똑한데? 아 그리고 꽃잎에 무늬가 있는 아사달계나 외국도입품종인 청단심계 무궁화도 있어 자막 청단심계 아사달계 아사달계는 꽃잎에 무늬가 있는 무궁화이며 청단심계는 외국도입품종이다. 내레이션 또한 나는 황실이나 귀족들에 의해서 국화가 정해진 다른 나라들과 달리 민중들에 의해서 나라꽃으로 정해졌단다. 오, 멋있다. 근데 왜 난 너를 한 번도 보지 못 했을까? 그건 한국인들이 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사실 나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거의 멸종될 뻔 했었어 일본인들이 민족정신을 말살 시킨다고 나를 보기만 해도 눈병이나고 진드기가 많이 꼬이는 꽃으로 매도했거든. 그 바람에 현대의 한국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갖게 되었지 아, 그랬구나. 자막 일제강점기시대 때 무궁화는 일본의 민족정신 말살에 의해 거의 멸종 될 뻔 했다. 진드기가 많은 꽃, 눈병을 옮는 꽃 내레이션 하지만 이제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제정할 만큼 나에 대해 관심이 많아져서 괜찮아. 그런데 왜 하필 8월 8일이야? 그 이유는 8월에 내가 제일 만개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숫자 8을 옆으로 보면 무한대 기호가 되지? 응, 그렇네. 그 기호는 끝없이 반복되고 무궁하다는 뜻으로 내 이름의 뜻과도 같아 그리고 나는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걸 100일 동안 매일 반복해 이러한 나의 영원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한국인의 정신에 반영되어 있지. 너 정말 대단한 꽃이구나. 그런데 해가 지면 널 다시 볼 수 없는 거야? 아니야, 한국에 가면 날 다시 볼 수 있어 아 한국? 한국은 어디에 있어? 저기 있는 별 보여? 안녕, 무궁화야?

제작
문화포털
등록일
201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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