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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루(문화후기)

가짜를 소비하라, 진짜처럼

작성자
sta * * * * *
작성일
2019-02-18(월) 08:49
애들러와 깁

애들러와 깁

작성자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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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평점
0점 / 10
개요
연극 - 만 13세 이상
기간
2018-10-12~2018-10-28
시간
평일 8시/토.일 4시 / 월 쉼
장소
이거 퀴어극 아니에요!! 왜 퀴어극으로 셀링됐는지 모를;; 미술사상 유명한 레즈비언 커플이 나오고 둘을 탐구하는 극인 것도 맞는데, 정작 중요한 건 '이 예술가 커플에게 미쳐버린 미저리 여배우 팬이 도대체 무슨 짓까지 하는가'입니다. 루이즈 정말이지 이성적으로 철저하게 미쳐버린 캐릭터이고, 욕망과 위선을 이렇게까지 잘 두른 여배우 캐릭터라니, 너무 매력적인 동시에 끔찍합니다.
주인공 루이즈는 그야말로 완전체입니다.
내가 돈 주니까 닥치고 시키는대로 하라는 갑질부터 불륜-무단침입-절도-협박-명예훼손-고인모독-살인모의-동물살해-사체훼손-살인까지 아주 가지가지 다 해요. 문제가 있다면 저나는 인성터진 캐를 내 새끼로 품지 못하고 오히려 ‘얼른 저 새끼가 망해버리는 꼴을 봐야하는데’ 염불외우며 보는 관객이기 때문에 보면서 분조장 와서 루이즈 뒷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는 것 정도? 애들러 살아있었으면 루이즈가 깁한테 하는 거 보고 총 들어서 대갈통 쏴버렸을 거다 이거에요..!!!!!!!! 어디서 감히 애들러를 죽였네마네 니가 불쌍하네마네 내가 구해주네마네 떠들어?!!???! 깁 손톱의 때만큼도 못한 게!!!! (애들러 빙의)

루이즈 차라리 “지금 도덕 같은 데 얽매일 데가 아니야” 하면서 못하겠다는 남캐 닥달하는 그런 거나 대놓고 “씨발!!!!!!!!!” 이러면서 발 쾅쾅 구르고 지 성질 못이겨 발광 하는 건 괜찮았는데, 막 엄청 선량한 척 하면서 “저도 개를 키워봐서 (얼마나 슬프실지) 알아요” 이러는 거 용서가 안됨. 야 이 새끼야 니가!!!!! 방금!!!!! 죽였잖아!!! 눈앞에서!!!!! 19년간 함께해온 식구같은 아이를!!!!! 니 손으로!!!!
애들러와 깁 커플은 알면 알수록 정말로 '세상에 잊혀지고 싶어했던 예술가'라는 느낌입니다. 저는 모든 예술가는 남몰래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을 품고있고 안 그런 척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고 믿고 있는 사람인데, 그런 냉소적인 눈으로 봤을 때도 이 커플은 정말로 잊혀지고 싶어했다는 느낌이에요. 말년에 자기네 작품들을 찾아다니며 모조리 다시 구입해 몽땅 없애버렸다는 데서 그 진심이 마구 느껴지잖아요. 게다가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무례가 지긋지긋했을 만도 했구요. 그런 두 사람을 루이즈는 영화/연기라는 명목으로 다시 세상에 선보이려고 하죠. 두 사람이 절대로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두 사람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두 사람의 허락없이, 두 사람의 이름으로.
보면서 좀 양심에 찔렸던 게, 제가 만약 관객으로서 루이즈 연기를 봤다면 극찬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거든요.. 루이즈가 완전 싸이코패스이긴 한데 연기존잘 연기광인 싸이코패스라서, 그녀가 표현하는 애들러를 보곤 영화 속 애들러 평생 가슴에 품었을 것 같다 이거에요.. 게다가 이 연극 자체가 애들러와 깁을 다시금 세상 사람들에게 환기시키잖아요ㅠ 둘은 이 연극조차도 만들어지지 않길 바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겁니다. 연극 속 벌어지는 사건들이 가짜이긴 하지만, 애들러와 깁은 역사 속에 진짜 존재하니까요. 그리고 그들의 고통과 거부 역시 진짜였을 테고요.
결국 루이즈는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로, 결국 진짜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트로피를 들고 가증스럽게 감동받은 연설을 하는 루이즈 정말 꼴보기 싫었어요ㅋㅋㅠㅠㅠㅠ 와 정말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인성이 없을 수가 있지? 안 그래도 최희진 배우 좋아하는지라 처음부터 깁한테 마음이 쓰였는데 가면 갈수록 깁이 너무 몰리면서 짠내나서ㅠㅠㅠ 아이고.. 아이고오.... 보나마나 영화에서도 깁 캐릭터 완전히 왜곡시켰겠죠. 루이즈를 죽입시다 흑흑
애들러와 깁 첫만남 때 어둠 속에서 역광으로 배우들 실루엣만 보이는 거 엄청 로맨틱했는데, 뒤로 보이는 90년대 노래방영상이 모든 걸 다 망쳤습니다..... 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흰 화면만 나오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니까요. 둘이 조근조근 대화하는 뒤로 둘이 90년대 얼빡뮤비를 찍고... 영상 마지막 장면 때문에라도 뺄 수 없는 건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너무 촌스럽고 이상하니까, 그냥 마치라잌 갤러리 영상작품인 척 흰 영상에 뭔가 아지랑이만 가끔 지나다니는 그런 걸로 바꿔줬음 좋겠어요.
맨날천날 례에술 한답시고 상대 착취하는 인간들만 보다가, 상대로 인해 인생과 예술이 완성된 예술가 커플 보니까 너무 신기하고 아름답고 놀라웠습니다. 그냥 애들러와 깁 커플 얘기만 중점적으로 하는 다른 컨텐츠 있으면 보고싶을 정도. 하지만 이런 바람이 또 약간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건 그들의 바람과는 또 반대되는 욕심이다 싶어지거든요.

진짜는 오래전에 죽고, 이제는 가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가짜를 진짜로 믿고 애정하고 판단하는 게 또 대중과 관객들의 원죄겠지요. 우리는 가짜밖에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니 가짜를 열심히 소비할 수 밖에요. 마치 진짜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