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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

작가소개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 극작가로서, 희·비극을 포함한 37편의 희곡과 여러 권의 시집 및 소네트집이 있다. 1564년 잉글랜드 중부의 스트래트포드 어폰 에이번(Stratford-upon-Avon)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마을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영국의 전형적인 소읍이었고,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과 중농(中農)을 겸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읍장까지 지낸 유지였으므로, 당시의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스트래트포드 어폰 에이번(Stratford-upon-Avon)에는 훌륭한 초·중급학교가 있어서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기본적 고전교육을 받았으며, 뒤에 그에게 필요했던 고전 소양도 이때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577년경부터 가운(家運)이 기울어져 학업을 중단했고 집안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런던으로 나온 시기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1580년대 후반일 것으로 생각되며, 상경의 동기가 극단과 어떤 관계였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으나, 1592년에는 이미 그가 유수한 극작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선배 극작가인 R.그린의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590년을 전후한 시대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에서 국운이 융성한 때였으므로 문화면에서도 고도의 창조적 잠재력이 요구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배경을 얻어 그의 천분은 더욱 빛날 수 있었다. 당시의 연극은 중세 이래의 민중적·토착적 전통이 고도로 세련되었으며, 특히 그리스·로마의 고전(古典)을 소생시킨 르네상스 문화의 유입(流入)을 맞아 새로운 민족적 형식과 내용의 드라마를 창출해 내려는 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592∼1594년 2년간에 걸친 페스트 창궐로 인하여 극장 등이 폐쇄되었고, 때를 같이하여 런던 극단도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이때부터 신진극작가인 셰익스피어에게 본격적인 활동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당시의 극계를 양분하는 세력의 하나였던 궁내부장관(宮內府長官) 극단(당시는 유력자를 명목상의 후원자로 하여 그 명칭을 극단에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의 간부 단원이 되었고, 그 극단을 위해 작품을 쓰는 전속 극작가가 되었다. 그는 이 극단에서 조연급(助演級) 배우로서도 활동했으나 극작에 더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을 전후해서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과시하여 <비너스와 아도니스(Venus and Adonis)>(1593)와 <루크리스(Lucrece)>(1594) 등 두 편의 장시(長詩)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의 활동기는 1590년∼1613년까지의 대략 24년간으로 볼 수 있다. 이 기간에 그는 모두 37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해 보면, 초기에는 습작적 경향이 보였으며, 영국사기(英國史記)를 중심으로 한 역사극에 집중하던 시기, 그것과 중복되지만 낭만희극을 쓰던 시기, 그리고 일부의 대표작들이 발표된 비극의 시기, 만년에 가서는 화해(和解)의 경지를 보여주는 이른바 로맨스극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시기적 구획(區劃)이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연극인으로서 충실하게 보냈으며, 자신이 속해 있던 극단을 위해서도 전력을 다했다. 1599년 템스강(江) 남쪽에 글로브극장(The Globe)을 신축하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의 허락을 받아 극단명을 ‘왕의 극단(King’s Men)’이라 개칭하는 행운도 얻었다. 그러나 이런 명칭은 당시의 관례였을 뿐 상업적인 성격을 띤 일반 극단과 차이가 없었다. 1613년 그의 마지막 작품인 <헨리 8세>를 상연하는 도중 글로브극장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616년 4월 23일 52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사망하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생전에 출판된 것은 19편 정도이고, 1623년 이후 동료들에 의하여 전집이 간행되었다. 이 전집은 이절판(folio)의 대형판으로 전작품 37편이 모두 들어 있다. 당시의 극본은 관례상 출판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작품의 정확한 창작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내용
이탈리아의 인육저당 이야기와 상자고르기 이야기를 짜맞춘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친구 바사니오로부터 벨몬트에 사는 포샤에게 구혼하기 위한 여비조달 부탁을 받고, 자기 배를 담보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면서, 반제불능 때에는 자기의 살 1파운드를 제공한다는 증서를 준다. 포샤는 구혼자들에게 금, 은, 납이 들어 있는 3개의 상자를 보이면서 자신의 초상이 들어 있는 것을 고르게 한다. 바사니오는 구리상자를 골라 구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안토니오의 배가 돌아오지 않아 재판을 받게 된다. 남장한 포샤가 베니스법정의 재판관이 되어 살은 떼어가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판결한다. 샤일록은 패소하고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명령받는다. 이윽고 안토니오의 배가 돌아와 샤일록의 순진한 딸 제시카도 연인 로렌조와 결혼한다. 로맨틱한 줄거리에 감미로운 장면도 많지만, 당시 런던시민이 가졌던 금융업자에 대한 증오와 반유대감정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국내공연연보
1929년 이화여전기독청년회 / 이상수 연출 1933년 극예술연구회 / 유치진 연출 / 법정장면만 연출 1952년 목포의 극단 / 법정장면만 연출 1964년 4월 22일~5월 23일 국립극단 / 명동국립극장 / 이진순 연출 1974년 극단 앙상블 / 김춘원 연출 1976년 4월 극단 민중 / 시민회관별관 / 이효영 연출 1983년 9월 극단 현대극장 / 패트릭 터커 연출 1983년 7월 7일~14일 극단 시민극장 / 세종문화회관별관 / 아성 연출(원각사 합동공연) 1983년 9월 13일~17일 극단 시민극장 / 의정부시민회관 / 아성 연출 1983년 9월 18일~19일 극단 시민극장 / 성남시민회관 / 아성 연출 1983년 광주시립극단 / 나상만 연출 1986년 대구꾀꼬리극장 1987년 창작극회 / 나상만 연출 1989년 2월 23일~26일 극단 마산 / 경남대 완월강당 / 문종근 연출 1992년 4월 16일~28일 극단 성좌 / 문예회관대극장 / 권오일 연출 1992년 극단 현대극장 / 패트릭 터커 연출 2001년 4월 2일~29일 서울시극단 / 세종문화회관소극장 / 채윤일 연출
예술가
유치진(柳致眞, 1905~1974) 우리 근대연극사에서 동랑 유치진만큼 희곡창작, 연출, 연극교육, 극장운영 등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한 연극인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그는 극작가가 부족했던 우리 연극계 현실에서 일찍부터 창작극을 써서 무대에 올림으로써 근대적 희곡과 연극을 이 땅에 정착시킨 선구자이다. 1931년 발표한 <토막(土幕)>에서 1958년의 <한강은 흐른다>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에 걸쳐 그가 발표한 희곡은 무려 40편에 가깝다. 특히 1933년 2월, 그의 처녀작 <토막>이 극예술연구회에 의해 무대에 올려지면서 삽시간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 창작된 작품들은 일제의 토지 수탈과 착취에 따른 이농 문제 등 당시 조선의 침통함을 정공법으로 묘사한 초창기 리얼리즘극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일제가 소위 국민문예라는 국책문화운동을 전개한 1940년대에 접어들었을 때, 유치진은 총독부의 지시로 극단 현대극장을 만들어 극단 활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에 그는 <흑룡강>, <북진대> 등 친일어용희곡을 발표함으로써 평생의 오점을 남긴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추나무>를 발표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희곡 창작에서 손을 뗀다. 해방 이후 우익 민족진영의 막후 리더로서 활동하던 유치진은 <조국>, <며느리> 등을 발표했으며, 이후 <자명고>를 위시한 <별>, <원술랑> 등의 계몽사극을 창작한다. 이데올로기 대립과 외세, 반탁 자주독립으로 점철되었던 해방 직후의 국가 상황을 고대사와 근세사를 빌어 우회적으로 풍자 비판한 일종의 목적성을 띤 작품들이었다. 1931년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한 이후 극연좌(1938), 현대극장(1941), 극예술협회(1947), 신협(1950) 등으로 이어지는 극단 활동을 전개했으며, 1950년대 초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립극장이 문을 열었을 때 초대 극장장으로 취임했고, 1960년대에는 연극 전용극장인 드라마센터를 세우고 연극아카데미와 극단 동랑레퍼토리를 설립하는 등 일생을 연극운동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연극인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1960년대 초 동국대학에 연극과를 만들었으며, 서울대학에 연극과를 설치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적도 있었고 숙명여자대학에 최초로 희곡론을 개설하여 강의도 했다. 이 모든 것은 드라마센터 부설 연극아카데미와 연극학교, 그리고 서울예술대학으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연극인재 양성과 함께 한국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기반이 된 것이다.
리뷰
(……)터커 연출의 특징은 표명된 말은 물론 표명되지 않은 말까지도 단순한 진술로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적 언어-배우의 동작, 장치, 의상, 조명, 음악-바꾸어 관객의 감각에 직접 호소하는 것이다. 무대는 보여주고 들려줌으로써 추상적 언어를 구상화시킨다는 기본원리를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여기에는 연출의 창안이 필요하다. 대본의 무대화는 바로 이 연출의 창안으로서 비로소 무대다운 무대가 이루어지며 그때 관객은 희곡에서 맛볼 수 있는 이상의 감동을 극에서 맛보게 된다. 터커는 잼마와 더불어 이 극을 셰익스피어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하여 작품의 내용과 의미를 이해시킬 것인가에 고심했고 그 결과 말로 듣는 연극보다는 눈으로 보는 연극, 관객이 보다 즐겁고 재미있게, 그리고 심리적으로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볼 수 있는 연극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개막과 더불어 관객은 베니스로 안내된다. 뒤로 배가 보이고 항구, 곤도라가 있는 거리에는 갖가지 장사꾼, 노름꾼, 건달청년들 그리고 창녀까지 어울려서 북적대며 소란을 피운다. 관객은 한눈에 이 도시가 이상보다는 현실, 정신보다는 물질, 사랑보다는 돈을 더 숭상하는 곳임을 알아차릴 수 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상의 무료함을 탄식하는 안토니오의 첫 대사는 이곳의 생의 메마름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밧사니오를 만나 반기는 그들의 비정상적인 몸짓과 사람을 사기 위해 서슴없이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거래에서 우리는 그들의 우정과 인간관계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느낀다. 반면 다음 장면 벨몽트의 포오샤의 집에는 아름다운 음악, 우아한 놀이, 고상한 언동 그리고 미모와 재덕을 겸비한 여인이 있다. 위텐버그와 엔시노 이상으로 차이가 있는 이 두 도시의 격차와 대조는 이 극의 메타피-밝음과 어둠, 문명과 미개, 고상한 정신과 천박한 물질과의 대립간을 구성한다. 극의 궁극적인 목적도 이러한 대립의 화해와 조화에 있다. 그것은 베니스의 재판이 벨몽트의 영향 하에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해결되며 두 도시의 남녀가 서로 결합함으로써 성취된다. 그러나 베니스를 대표하는 안토니오만은 이러한 화해로부터 소외된다. 마지막 장면, 모두가 행복과 기쁨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 혼자만 외로이 한구석에, 오로지 돈주머니 하나만을 쥔 채 서 있는 모습은 관객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제공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극의 전체적인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부각시켜주고 있다. 결혼을 서약한 반지를 놓고 벌이는 장면은 재판 장면 다음에 이어짐으로써 이 극이 샤이록의 재판으로 대단원을 내리는 극이 아님을 명백히 하는데 특히 이 장면에서 안토니오를 가운데 놓고 포샤와 밧사니오가 실갱이를 벌이는데 이는 마치 사랑의 삼각관계를 연출하는 것과 같은 처리로써 두 사람에 대한 밧사니오의 사랑을 시험하고 분명한 결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인물 간의 관계로서 포샤와 내릿사의 관계는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니라 친구이며 동료 사이와 같았고 그것으로서 벨몽트의 인간관계를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이 두 사람에 의한 장면을, 자칫 지루하고 단조로울 장면들을 생기에 넘치게 만들었다. 샤이록은 <베니스의 상인>의 최대의 인물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터커는 샤이록을 흔히 생각하는 고약하고 잔인한 유태인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우선 기독교와 유태교를 대립시켰고 베니스가 기독교적 도시임을 강조하기 위해 교회의 종과 기도를 활용했다. 샤이록은 늙고 추한 인간이 아니라 그의 신앙과 신념대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비굴하지도 사악하지도 않은, 어느 의미에서 당당한 인간이었다. 재판장에서 그의 기쁨의 표현이나 절망의 표현에는 과장이나 멜로드라마의 센티멘탈리즘은 전혀 없어,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는 관객을 실망시킬 정도였다. 여기서 강조된 점은 종교를 이유로 한 인간의 멸시와 천시의 허위 내지 위선이었고 중을 등장시켜 절망에 빠진 샤이록을 부축해나가는 휴머니즘이었다. 법관복을 입은 포샤가 재판석이 아니라 법정 중앙에 위치하여 유동적인 액션을 펼친 것은 좋으나 좌우 두 방청석 중 유독 기독교측만 지독히 소란스러워 균형을 잃은 것은 그렇다치고 재판 진행자체의 흥미에 소홀한 것은 유감스러웠다.(……) ‘영(英)연출가 한국(韓國)연기진의 <베니스의 상인>’, 한상철, <한국연극>, 1983년 10월호
관련도서
<베니스의 상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 정성국 역, 홍신문화사, 2003 <햄릿: 베니스의 상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 권오석 역, 대일출판사, 1998 <베니스의 상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 박시인 역주, 삼중당, 1981 <베니스의 상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 김재남 역, 삼중당, 1981 <베니스의 상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 오화섭 역, 박영사, 1975 <베니스의 상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 박동호 역, 신문출판사, 1973 <베니스의 상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 김재남 역, 양문사, 1959 <(신역)셰익스피어전집1~5>, 셰익스피어 저, 한용환 역, 정통출판사, 1980 <무대에서 만나는 셰익스피어1>, 셰익스피어 저, 김희선 외 역, 파란자전거, 2003 <셰익스피어 공연읽기>, 지구연극연구소 외, 동인, 2003 <셰익스피어 극의 이해(비극) >, 이대석, 한양대학교출판부, 2002 <셰익스피어 비평사>, 이경식,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셰익스피어 작품 해설1·2>, 한국셰익스어학회 편저, 범한서적, 2002 <셰익스피어 평전>, 파크 호넌 저, 김정환 역, 북폴리오, 2003 <셰익스피어와 글로브 극장>, 알리키 저, 마은영 역, 미래엠앤비, 2003 <윌리엄 셰익스피어>, 앤터니 홀든 저, 장경렬 역, 푸른숲, 2005
연계정보
-레이디 맥베스
-극예술연구회
-민중극장
-극단 성좌
-국립극단
-유치진(柳致眞)
-갈매기(Chaika)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리어왕(King Lear)
-맥베스(Macbeth)
관련사이트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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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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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현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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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셰익스피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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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어영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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