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창랑정기

개요
1938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유진오의 단편소설. 작가 자신의 유년시절 이야기로, 현대의 첨단을 가고 있는 물질문명에서 느끼는 인생의 무상과 향수를 그린 작품이다. 작중 ‘나’가 7~8세 때 아버지를 따라 가보았던 삼종 증조부되는 서강대신의 거처 ‘창랑정’을 중심으로 그곳에서 처음 느꼈던 감회와, 그곳의 교전비(轎前婢)로 있었던 을순에 대한 애잔한 감정을 이끌어내어 유년시절의 향수를 그린다. 정신적인 향수는 거기에 물질이 개입될 때 산산이 부서지는 것으로, 작가는 폐허가 되어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는 창랑정의 옛 기억을 더듬으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1인칭 서술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잃어버린 과거에의 기억과 도도한 시간의 변화 속에서 모든 것이 남김없이 변모되어가고 만다는 변화의 원칙, 또는 추이를 시적인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개인적 영욕이나 향수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지만, 역사의 영광과 소멸, 새로운 변화 등 시간적 변화의 질서를 감동적으로 제시하는 작품이다.
내용
외형적 형태는 7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단락에서 ‘나’는 향수를 이야기함으로써 현재의 시간으로부터 기억의 떠올림이라는 회상적인 시간시점에 의해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는 계기를 마련한다. 제2·3단락은 기억의 상한점을 7~8세 때로 거슬러올라가 그때 처음으로 찾아갔던 ‘창랑정’과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삶의 양상을 제시한다. 제3·4·5·6단락은 거기서 만났던 소녀 교전비 을순이와의 만남의 충격 내지 사춘기적 감정의 미묘한 교호를 떠올리고, 다시 기억의 시한을 현재로 접근시켜 창랑정의 후일담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을순이와 함께 창랑정 후원에서 캐냈던 칼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역사의 한 영욕을 상징한다는 의미 외에도 발전과 변화보다는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려는 서강대감과 긴밀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6장에는 정경부인의 죽음, 서강대신 및 종근이 할머니의 죽음이 제시되어 있다. 이것은 늙은 한 세대의 종언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이 집안에 닥쳐올 어떤 큰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다. 제7단락은 창랑정의 몰락사실과 ‘나’의 첫 방문으로부터 20년이 지난 현재의 퇴락한 창랑정의 상태를 서술하고 있다. 구세대의 영광에 집착하는 한 세대가 소멸하자 그 다음 세대인 종근은 한문책을 던져버리고 양복을 갈아입게 되며 난봉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나’는 영욕을 거듭하는 이 창랑정을 여러 번 꿈꾼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옛날의 창랑정을 찾아 추억에 잠기게 되지만, 강 건너 비행장에서 들리는 프로펠러 소리를 들으며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저자
유진오(兪鎭午)
생애(1906~1987)
호는 현민(玄民). 서울 종로 출생.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에 입학했다. 같은 해 동교(同校) 전조선인(全朝鮮人) 학생으로 ‘문우회(文友會)’를 조직, <문우>를 발간했고 이재학(李在鶴) 등과 시집 <십자가>를 출간하기도 했다. 1926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부에 입학, ‘경제연구회’라는 서클을 조직했다. 이 무렵부터 이효석(李孝石)과 사귀면서 창작에 몰두, 1927년 이후 <조선지광>, <현대평론> 등에 단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29년 법문학부를 졸업한 후, 경성제대 강사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광복 후에는 문단을 떠나 법학자로서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제처장, 고려대학 총장, 신민당 당수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1927년 단편 <스리>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한 그는 계급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주목된 바 있다. 계속해서 <오월의 구직자>(1929), <가정교사>(1930), <여직공>(1931), <김강사와 T교수>(1932) 등 많은 작품을 내놓았는데, 주로 가난에 허덕이는 하층민이나 지식인의 곤경을 대상으로 하여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의 분노와 좌절을 그리고 있으며, 거의 모든 작품을 통해 도시생활의 물질주의적 양상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김강사와 T교수>는 지식인 소설의 한 전형으로서 식민지 상황의 물질적 악덕에 의해 나약한 지식인이 파멸하는 비극적 일면과 식민지 교육과 일본인 지식인들의 위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어떤 부처>·<치정>(1938), <나비>(1940) 등에는 모두 경제적으로 무력한 도시 가족들의 문제와 이의 해결을 위해 주부들이 여급으로 나서게 되는 문제를 다루었으며,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 <화상보>(1939)에서는 당시 인텔리층을 휩쓸었던 데카당스와, 그에 반대되는 제로이즘을 대립시켜 애정의 편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시대의 희생자로서의 지식인과 여급의 초상을 통해 불안과 절망, 궁핍 등의 시대적 징후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문학세계는 행동이 아닌 인식범주로서 그 최종목표를 삼고 ‘관념’을 통해 사회에 대한 개인의 대응방법, 또는 세계를 향한 자아의 적응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말
나의 아호(雅號)는 ‘현민(玄民)’으로 되어 있다. 아호라는 것은 어떤 아취(雅趣)에 관계된 별명인 듯한데, 아취라곤 하나도 없는 ‘현민’이 아호라는 것은 이상한 감이 없지 않으나, 본명 이외의 이름을 아호라 칭하는 것이 용허된다 하면 ‘현민’도 일종의 아호임에 틀림없다. 실상인즉 나에게는 어렸을 때에 선친이 지어주신 ‘자(字)’와 ‘호(號)’가 있다. 자는 ‘자경(子卿)’이라 하였고, 호는 ‘지암(芝菴)’이라 하였다. ‘지암’의 유래는 미심하나, 어머니 태몽 속에 고향집 뒷산에 있는 바위가 나타났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바위에 먼저부터 이름이 있어서 나의 호가 지암이 된 것인지, 나의 호가 지암이 되어 그 바위가 이름을 얻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렸을 때, 나는 시골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기암이, 기암이”하고 귀여워해 주는 것을 구수하게 들었고, ‘기암이’는 나의 아명(兒名)의 하나거니 하였다. 그러나, 차차 철이 들어 모든 낡은 것에 대한 반항의식이 강해지자 나는 아버지가 지어주신 그 호를 의식적으로 버렸다. 어째 봉건적인 냄새가 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저널리즘에 손을 대게 되자, 나는 곧 여러 가지 펜네임의 필요를 느꼈다. ‘진오(陳伍)’, ‘이지휘(李之輝)’, ‘현민’, ‘권일문(權一文)’ 등이 그것이다. 여러 가지 펜네임이 필요하게 된 것은 나의 붓끝이 법률, 정치, 경제, 사회, 문예, 심지어는 미술평론 등에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복면을 하기 위함보다도, 한 이름으로 여러 가지 글을 쓰면 남이 신용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 몇 이름 중에서, 지금 살아 남은 것이 ‘현민’인데, 아호든 펜네임이든간에 어째서 ‘현민’이란 이름을 택하였느냐고 묻는다 하면, 나는 똑똑하게 대답할 수 없다. 그저 획수 적고, 부르기 좋고, 싱겁지도 짜지도 않고, 의미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고, 아(雅)도 아니고 속(俗)도 아닌 이름을 고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어렴풋이라도 무슨 뜻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굳이 캐어 묻는 사람이 있다 하면, 나는 ‘현(玄)’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읽을 때에 대단히 좋은 자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고, ‘민(民)’은 백성·민중·인민 등의 말을 좋아하던 것이 또한 사실이라고 대답할 밖에 없다. (1956년 2월) - ‘나의 아호(雅號) 유래’, 유진오, <다시 창랑정에서>, 창미사, 1985
관련도서
‘유진오의 초기작품 연구’, 이강언, <한국현대소설의 전개>, 형설, 1992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한국근대문인대사전>, 권영민 편, 아세아문화사, 1990
연계정보
-메가폰
관련멀티미디어(전체3건)
이미지 3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