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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네의 승천

출연 / 스태프
출연 한네/김성녀 만명/정현 필주/오승명 이씨/유재연 이장/김흥기 쇠돌네/차혜영 진우/오유강 덕보/이광수 마을사람들/이도련,공호석,손권목 아낙네/변경희,천옥희,이현목 순검/김진천,이은구 스태프 작/오영진 연출/손진책 제작/허규 기획/박규채 각색/장소현 작곡/김영동 안무/정병호 미술/최연호 의상/최보경 조명/구길웅 무대감독/이윤재
내용
만명이 시냇물에 떠 내려온 꽃신을 발견하고 상류를 향해 올라가다가 선녀담에 투신한 한네를 구해낸다. 만명이를 짝사랑하는 쇠돌이네에 의해서 이 사실이 알려진다. 부락제를 앞두고 선녀동 사람들은 그 사실에 대해서 불안해 하는 한편 쫓아내려고 한다. 제주이며, 만명의 부친인 윤필주의 허락을 받고 제사가 끝날 때까지 머물도록 한다. 한네는 걸립패의 성화에 재물 대신 자신의 치마를 신장대에 건다. 만명은 죽은 어미의 치마를 한네에게 대신 입힌다. 만명은 출입금지를 무시하고 한네의 치마감을 뜨기 위해 장터로 나간다. 치마감을 사가지고 돌아오려는데 노름꾼들이 나타나 투전판으로 유인한다. 결국 만명은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죽이게 되고 쫓기는 자가 되었다. 부락제는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축원을 빌면서 소지를 올린다. 만명 어머니의 치마를 입은 한네가 나타나 제주인 필주에게 소지 올릴 것을 허락받는다. 필주는 한네의 모습에서 20년 전에 죽은 만명의 어멈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철찬후 신놀이에 접어들 무렵, 목중탈을 쓴 필주가 만명이네 움막을 찾아가 한네를 범한다. 한네는 더럽힌 몸으로 만명을 맞을 수 없어 결국 선녀담에 투신하고 만다. 뒤늦게 찾아온 만명은 필주로부터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는, 자신도 한네의 뒤를 따른다. 필주도 제상 앞에 돌아와 그들에게 축원을 드리려는 듯 꿇어앉다가 그만 제상을 안고 무너지듯 쓰러져 죽고 만다. (참고 : <오영진 연구>, 한옥근, 시인사, 1993)
오영진 (1916~1974)
1916년 평남 평양출생. 호는 우천. 1938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경 발성영화제작소에서 영화연구관련 일을 했으며, 1942년 귀국하여 숭인상업학교에 재직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 평양에서 조만식, 부친 오윤선 등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활동했으며, 1952년 문총 중앙심의위원회 부위원장, 중앙문화사 사장과 월간 문학예술 주간을 역임하였다. 한국영화문화협회 이사, 예술원 4분과 위원장, ITI 한국본부 부위원장의 활동도 하였다. 1959년 제1차 국제연극대회에 유치진, 박석인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을 했으며 1964년부터 1967년까지 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42년 국민문학에 시나리오 <배뱅이굿>과 <맹진사댁 경사>를 발표하여 연극계에 데뷔하였으며, 1959년 문교부시나리오상과 제3회 부일시나리오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저서로는 <오영진 희곡집>과 수기<하나의 증언>이 있다. 대표작품 <향연>,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해녀 뭍에 오르다>, <허생전>, <무희>, <맹진사댁 경사>
허 규 (1934~2000)
1934년 경기도 고양 출생. 서울대 농대 임학과를 거쳐 경희대 국문과를 1970년에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연극회에서 연극연출을 수업하고 제작극회 연구동인, 실험극장 창립동인, 청주여사대 강사를 거처 1973년 극단 민예의 대표가 되었다. 1960년 <껍질이 깨지는 아픔없이는>으로 연출가로 데뷔하였으며, 1964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기념연극제에서 실험극장의 <리어왕> 연출의 성공으로, 같은 해 국립극단 공연 <순교자> 연출을 맡았다. 1960년대의 그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에 영향을 받아 비사실주의 경향의 연출수법을 시도했으며, 1960년대 말부터 한국고유의 연극술을 도입하는 등 현대연극에 우리의 전통극을 수용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민예극장을 창단하면서 그는 단원들에게 탈춤, 판소리, 무속예능, 시조 등의 실기를 훈련시켜 우리의 고유하고 독창적 연극을 창안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1977년 <물도리동>으로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으며, 1979년 <다시라기>로 대한민국연극제 연출상을 수상하였다. 연극 외에도 KBS, MBC, TBC에서 PD겸 연출가로 활동하였다. 대표작품 <수업>, <돈키호테>, <허생전>,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고려인 떡쇠>, <사힐린스크의 하늘과 땅>
손진책 (1947~ )
1947년 경북 영주 출생의 연출가. 1967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과에 입학했으며 같은 해 극단 산하에 입단하였다. 1972년 서라벌예술대학 부설 민족연극연구소 강사로 일하였으며, 1973년 구자흥, 정현, 김흥기, 공호석, 오승명씨 등과 함께 허규 선생을 모시고 극단 민예를 창단하였다. 1974년 장소현 작의 <서울 말뚝이>로 첫 연출데뷔를 했으며, 1976년 명동국립극장의 마지막 공연인 <한네의 승천>을 연출하였다. 1981년 <허생전>을 시작으로 마당놀이의 개념을 수립, 해마다 작품을 올리고 있다. 1982년 문예진흥원 해외연수자로 선발되어 영국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에서 연수를 받았다. 1986년 윤문식, 김종엽, 김성녀, 정태화 등과 함께 극단 미추를 창단하였고, 창단공연으로 <지킴이>를 연출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한강축제에 총감독을 맡았으며, 1989년 서울연극연출가그룹 회장, 1994년 ITI(국제극예술협회) 부회장,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연극제 예술감독, 2002년 FIFA 한일월드컵 개막식 총연출을 역임하였다. 1976년 제12회 한국연극영화예술대상 신인상을 필두로 한국연극예술상, 서울연극제, 백상예술대상, 이해랑 연극상을 다수 수상하였다. 대표작품 <서울 말뚝이>, <한네의 승천>, <지킴이>, <오장군의 발톱>, <신이국기>, <남사당의 하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리뷰
평론
김성녀는 국악 훈련을 받은 새 얼굴로 이번 작품에서 우리 정악을 기초로 만들어진 힘든 노래를 잘 소화해냈다. 아직 연기의 폭이 좁아 어머니, 누이, 애인, 창녀 등 다각적인 면을 갖고 있는 한네 역을 모두 휩쓸만한 위엄을 보여주지는 못했으나 만명 역의 정현과 함께 뛰어난 노래로 이번 무대의 인상을 훨씬 산뜻하게 만들어줬다. 민예극장의 무대가 늘 그렇지만 이번 무대는 특히 모든 연기자들의 협동과 노력이 같은 수준으로 무대를 휩쓸어 감명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을 한국적 음악극의 시도로 보고 있는 연출가 손진책과 함께 작곡의 김영동, 안무의 정병호 등의 음악과 춤이 훨씬 정리되어 어떤 시도에서 어떤 가능성으로 한 발 전진한 느낌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일간스포츠>, 구히서, 1976년 4월 11일)
관련도서
<오영진 연구>, 한옥근, 시인사, 1993
연계정보
-맹진사댁 경사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해녀 뭍에 오르다
-허생전
-시집가는 날
-십대의 반항
-오영진(吳泳鎭)
관련사이트
극단 민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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