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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혈포강도

출연/스태프
* 출연 초연 : 순사/임성구, 강도/한창렬 등 극중극 <장님타령> 출연/박해일, 황호순 기영도 이민재 임정일 유제상 신태영 김영민 * 스태프 무대디자인 및 장치/이상봉 조명/김의중 효과/도재현 의상/이상명 소품/조흥래
내용
10막의 작품으로 제1막은 전당포 강도입장, 제2막은 강도살인, 제4막은 순사파출소, 제6막은 요리집, 제10막은 강도체포 등으로 되어 있다. 육혈포(권총)를 가진 흉악한 강도가 변장술에 능하여 쉽사리 잡을 수 없었는데, 젊은 순사가 인민을 보호하는 본분을 다하려고 목숨을 걸고 싸워 끝내 강도를 생포한다. 순사는 육혈포를 맞아 죽어가면서도 강도에게 ‘잘못을 뉘우쳐서 좋은 사람이 되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권총을 소지한 흉악한 강도의 신출귀몰한 만행과 강도를 쫓는 형사대의 요란한 출동, 주민의 빗발치는 항의와 경찰 당국의 고심, 이러한 상황에 등장하여 침착하고도 용감하게 강도와 맞서 끝내 생포하고 개과천선의 충고까지 아끼지 않는 젊은 순사의 멋진 연기야말로 당대 관객들에게는 즐거운 오락이었다. 참고: <우리연극 100년>, 서연호·이상우, 현암사, 2000
리뷰
최초의 신파극단인 혁신단의 제2회 공연 작품인 탐정극. ‘신파극’이란 용어가 광고에서 최초로 쓰였던 작품이며 신파극 중 가장 인기를 모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08년 일본 신파극단이 공연했던 <피스톨강도 청수정길(淸水定吉)>을 혁신단 단장인 임성구가 번안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시 탐정극이 추구한 주제인 권선징악을 바탕으로 한 책임감과 정의심, 그리고 개과천선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재공연 - 1912년 5월 23일, 연흥사, 혁신단 임성구 일행 - 1980년 5월 31일~6월 23일, 공간사랑, 이강열 연출, 극단 조형극장, 신파극 시리즈 1. - 1980년 7월 17일~23일, 연극회관 쎄실극장, 이강열 연출, 극단 조형극장 평론 조선 4천년 이래로 연극이 없다가 근래에 들어 여기저기 공연장이 생겨나고 있으나 모범으로 삼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우리가 직접 나서게 되었다. (1912년 5월 23일 공연 전단 중) 근자에 정열적인 일부 젊은 연극인들에 의해서 이미 30여년 전에 없어진 신파극이 재현되고 있다. 그것도 초창기에서부터 토착화되는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10년을 주기로 네 작품이 무대에 올려졌다. 초창기인 10년대의 것으로는 <육혈포강도>가, 20년대의 것으로는 <월급날>이 그리고 30년대 작품으로 <배나무집 딸>과 <젖먹이 살인사건>이 재연되었다. 이상의 레퍼토리 선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기획의 자세는 어디까지나 아카데믹했고 따라서 원형을 재현해보려는 진지한 의지가 보였다. 각기 성향이 다른 세 극단이 참가했기 때문에 극단마다 특색이 달랐고 성과도 달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당초 신파극 공연을 기획한 측에서는 우리 근대연극사의 주류로 내려오던 신파극이 어떤 것이며, 그 재현이 가능할 것인가, 또 그 오늘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막연히 알고 있던 신파극에 대해 새롭게 인식시키기 위해 시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결과는 대체로 괜찮았던 것 같다. 우선 신파극이 우리의 생활감정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다음으로는 지나간 시대의 신파극이야말로 진정한 대중연극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신파극 재현의 의미를 다음 두 가지로 압축하게 되었다. 첫째, 신파의 원형재현은 어디까지나 보존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 둘째, 이 시대의 감각에 맞는 대중극을 창조해내는데 신파극에서 무언가 발견해 보려는 것이었다. 사실 초창기의 신파극을 오늘날 재현할 수는 없다. 본 사람도, 또 실제로 한 사람도 없고, 그리고 대본 마저 없기 때문에 서책을 통해 유사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 본보기가 조형극장의 <육혈포강도>공연이다. 그러나 <육혈포강도>공연에서 우리 선인들의 공리주의적 연극관만은 충분히 볼 수 있었고, 정열적인 연기술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두번째의 에저또와 76소극장은 30년대 작품이었기 때문에 당시 출연자들과 대본 등으로 거의 가깝게 가서 그런대로 관객의 공감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공감은 어디까지나 ‘과거연극’이라는 관객들의 계산과 향수가 깔려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과거의 신파극이 오늘날에도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예술이란 언제나 그 시대의 생활양식과 감각에 맞는 것이 생성하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30년대의 신파극을 보면서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은 신파도 황당무계한 것만은 아니고 30, 40년대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무엇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어떤 암시를 받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지나간 시대의 연극형태를 재현하는 것은 청산되어질 것은 하루빨리 청산되고 발전적인 것은 재빨리 뽑아내자는데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신파극 재현의 과제, 1980년 <육혈포강도> 프로그램 중, 유민영) … 신파가 제대로 재현됐느냐 아니냐를 따지기에 앞서 신파극에 대한 연극사학의 뒷받침이 너무 미흡한 것 같다. 신문에 보도된 공연 기록과 몇 개의 짧막한 관람평이 신파극에 관한 연극사적 기록의 전부이다. 그러니까 지난 신파페스티벌은 그런 황무지에서 신파극의 내용을 살펴본 거의 최초의 시도였던 셈이다. 그래도 신파의 마지막 부분이나마 목격한 원로 연극배우들의 증언을 듣고 젊은 연출가가 그걸 이해한데로의 형태로나마 재조립을 해본 것이다. 이렇게 재조립된 <육혈포강도>를 보면서 애매한데로 다음과 같은 신파의 특징을 느낄 수 있었다. 1910년대로선 듣기에도 신기하기만 했을 육혈포를 들고 일인전당포를 터는 강도는 말하자면 근대판 일지매다. 그 호쾌하고 막강한 힘을 가진 강도와 돈만 아는 일인 전당포 주인 그리고 육혈포든 강도를 포승줄과 칼로 잡으러 덤비는 순사. 이렇게 성격이 확실한 인물들로 구성된 단순한 상황이 신파의 특징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둘째, 양식화되고 과장된 배우의 연기, 이것이 신파의 통쾌하고도 신나는 재미중의 중요한 부분이였으리라. 배우의 뛰어난 개인기는 근대 연극이 소개되기 전 광대의 재주와도 통하는 데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과장된 동작과 발성은 신파 이후에도 적잖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연기라면 으레 실생활과 다른 몸놀림과 말투를 생각하는 선입관이 그런게 아닐까. 이런 점들은 신파의 특징이자 예술성이 없다고 경멸받게한 요소이기도 하다. 신파가 저질이든 대중과 영합했든 그 실재 자체를 묻어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 원형을 찾아낸들 그 모습 그대로 지금 공연될 수도, 관객의 호응을 받을 수도 없다. 다만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던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을 오늘의 연극에 활용할 길을 찾을 뿐이다. 이번 <육혈포강도>의 재공연은 재현에서 활용쪽으로 한걸음 더 옮겨진 셈이다. 그것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활용되었는가는 앞으로 비평받아야 될 문제이겠다. (<육혈포강도>를 보고, 1980년 <육혈포강도> 프로그램 중, 지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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