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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봉기 역사맞이굿

작품명
고부봉기 역사맞이굿
구분
1993년 이후
작품소개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은 1988년 결성되어 마당극을 비롯한 진보적 연극운동을 주도한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현 한국민족극운동협의회)가 동학농민운동 100주년을 맞아 제작한 작품이다. 이 공연은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공동대표 한승헌, 염무웅, 이이화, 김범수, 명노근)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공동 주관한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준비되었으며, 1994년 2월 26일부터 27일까지 동학농민운동의 현장이었던 전라북도 정읍과 고부 일대에서 공연되었다. 극작·연출 노트 (……) 그 동안 동학농민혁명은 보수세력이나 친일파에 의해 왜곡되고 축소되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농민군의 활동을 때로는 반역으로 다루기도 하고 때로는 무식한 농민군의 부질없는 항거로 생각해 오기도 했습니다. 또 이 땅의 역대 독재정권은 독립국가를 세우고도 이 역사적 사실에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않고 정치적 이용물로만 생각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년 동학농민군들의 저항 정신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독립국가 건설의 토대로, 독재정권 아래서는 민주사회 실현의 지주로 면면히 이어 왔습니다. (……) -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을 여는 말’, <고부봉기 역사맞이굿> 팸플릿,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1994 (……) 틀거리를 잡아 작품을 구성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점에 특히 유의한다. 역사적 사건의 세밀한 묘사에 치중하는 것보다는 중핵적인 흐름을 큰 중심줄기로 잡아내고 이를 몇 가지 잔가닥으로 흐트러뜨려 풀어내면서 마디마디마다 유기적 연관관계로서 살아 있는 나무등걸을 만든다. 앞뒤 문맥이나 구조의 순차적이고 논리 정연한 구성방식에 지나치게 매이지 않는다. 굵은 선으로 가서 매듭을 짓되 앞뒤를 태극선 같은 이음새로 연결을 짓는다. 아니면 틈새를 주어 창조적 여백을 두든가 한다. 맺고, 차고 이움, 내고 닮, 내지름과 꺾음새, 태극선 등은 이 작품에서 구사하는 동력선이다. 이러한 작품의 동력선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과 남긴 과제가 굴러오고 또한 굴러가는 역사적 공간방위의 동력선과 부합되도록 지극히 애써본다. 시간과 공간을 옮겨가며 벌어지는 마당별 각 종목들은 다음의 이름으로 개별화한다. <갑오세, 가보세>, <났네 났네 난리가 났어>, <칼노래 칼춤>, <님이시여 님이시여>, <드는 낫으로 네 목을 치리라>, <모시고 드소서>, <천석꾼 만석꾼아 보릿고개 주먹밥 썩 내놓아라>, <오날은 백만 농군이 모다 봉준이로다> 이들 개개의 마당들은 한 가지 진행 방향으로 가는 한 몸뚱아리의 것이되 그 몸을 구성하는 각기 고유한 부위들이다. 한 부위가 아프면 온몸이 아프지만 이들 각 부위들은 부분의 독자성을 견지한다. 각 부위의 종목마다 완결구조를 가지고 전체 속에서 저 나름대로 자유분방하다. (……) - ‘연출의 말: 갑오농민군의 숨길을 찾아나서서 - 고부봉기 역사맞이굿 창작에 관한 몇 가지 짧은 생각’, 채희완, <계간 민족예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1994.봄
작품내용
(……) 마침내 오후 4시 앞길놀이 <갑오세 가보세>의 시가행진으로 굿은 시작됐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의 대형 영정이 서고, ‘살아 있는’ 전봉준이 탄 대고(大鼓) 차량에 이르러 풍물패, 농민군, 관군 등 출연진이 뒤를 이었으며 다시 4백여 개의 깃발과 영기가 줄을 이었다. 정읍역을 출발해 터미널, 군청, 고수부지까지 1시간 동안 진행된 가장행진은 시민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장관을 이루었다. 가장행진으로 군중 수는 엄청나게 불어나 고수부지 무대 앞가 인근도로까지 어림잡아 5천여 관중이 집결했다. 무대는 김정헌의 <땅의 사람들>이라는 대형 걸개 그림이 전면에 배치되고 전봉준 장군을 중심으로 김개남, 손화중의 초상화가 무대 위에 모셔졌다. 6시께 공식 개막열림굿 <때가 왔네 때가 와>가 시작돼 심우성 씨 집전으로 고사가 진행됐다. 고사에 이어 이이화, 김삼룡, 김원기, 김도현 씨 등 각계의 축사가 있었다. 김도현 문체부차관은 축사에서 “정부가 개혁을 앞장 서서 추진하는 이 시대에 이 행사가 앞으로 정부와 민중이 함께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피력했다. 고사 뒤 끝에 동학농민군 유족들도 나와 분향을 한 후 “유족들이 못나, 떳떳이 나서서 선열을 받들지 못해 죄송하다”며 마음속 깊은 감사와 함께, 감격하며 울먹였다. 이어 초청한마당인 공옥진 창무극과 정읍 동초등학교 어린이 합창단의 순서가 진행됐다. 27일 이평국교에서 마련된 김명곤의 소리와 함께 특별출연 형식으로 삽입된 이들 프로그램은 전체 굿을 더욱 다양하고 풍성하게 했다. 전야굿의 압권은 역시 고부봉기상황을 재현한 <났네 났네. 난리가 났어>와 동학의 종교적 측면과 농민군의 투쟁 및 희생을 총체적으로 상징화한 <칼노래 칼춤> 등 2편의 마당굿이었다. 총 3시간여 진행된 두 편의 마당굿은 민극협 출연진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작품화한 흔적이 엿보였는데, 쌀쌀한 날씨임에도 관중들을 꼼짝없이 붙잡았다. 두 작품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각기 차별성을 갖되 전체 틀거리에서는 서로를 보완하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등소마당, 사발통문과 식사의례마당, 접전마당으로 구성된 <났네 났네…>(광주 극단 토박이의 박효선 연출)는 광주, 목포지역 연희패가 주로 출연해 이른바 ‘전라도 마당굿’이 갖는 전투성과 풍성한 재담을 섞어 서사적 극진행을 보여주었다. 채희완의 연출로 서울 한두레팀이 주로 출연한 <칼노래…>는 칼노래 칼춤, 효수거리 청수한동이 등 세 마당으로 짜여져 있는데, 무예․탈춤․노래․제례의식 등을 각 마당별로 당시 이란 민중의 본원적 세계를 상징화했다. 두 편의 마당굿으로 당시 농민혁명의 전체상을 체득하며 새 기운을 얻은 관중들은 뒷전거리에서 저마다 횃불을 들고 대동한마당의 신명난 춤판으로 뛰쳐나왔다. 어두운 고수부지를 대낮같이 밝히며 출렁이는 횃불 속에서 관중들은 귀가할 줄을 몰랐고, 사회자는 내일의 굿판을 위해 서둘러 폐회를 선언해야 했다. 이날 출연진과 역사기행팀 등 많은 사람들이 숙박한 내장산 입구 여관과 술집에서는 새벽녘까지 노래소리와 얘기꽃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준비기획 일꾼들은 27일의 상황점검과 준비를 하면서 꼬박 밤을 새워야 했다. 27일에는 조소마을 전봉준 고택과 이평면 말목장터, 고부면 고부관아 터, 배들평야의 만석보 등지에서 하루 종일 역사재현굿이 계속됐다. 오전 9시 전봉준 고택에서 식전행사인 <님이시여, 님이시여>로 명명된 마당밟기와 단비제례의식이 거행되고, 같은 시간 말목장터에서는 기포재현굿 <드는 낫으로 네 목을 치리라>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어제의 관중들도 속속 현장에 도착했다. 이평면사무소 앞 사거리 광장 주위에는 일백 개의 깃발과 영기가 형형색색으로 나부끼고 주변건물 옥상마다 농민군 장두급들이 배치됐으며, 거리 곳곳에서 연희패와 풍물패들이 기포를 촉구하며 분위기를 돋워갔다. 백 년 전 그날의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존재인 말목장터 감나무는 수난의 세월을 이겨온 보람을 오늘에야 만끽하는 듯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수입개방 강요하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녹두장군 나가신다 UR아 물러가라’ ‘우리 쌀로 키운 자식 건강하고 똑똑하다’ ‘칼로스 쌀로 키운 자식 애비에미 몰라본다’ ‘남북합의서 즉각 이행’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깃발 문구가 말해주듯 일백 년 전과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는 오늘의 현실을 저 감나무는 어떻게 느끼는지……. 구경 나온 촌로들도 벌써 얼굴이 상기된 채 구전돼 온 그날의 얘기를 되새기며 “모든 것을 2백 년 된 저 감나무는 알고 있다”면서 회한에 잠겼다. 면사무소 마당에서의 판열음 고사굿에 이어 11시 20분 기포재현굿의 징소리가 울렸다. 감나무 옆 정자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이 조병갑의 탐학과 봉건왕조의 부패, 외세의 침략을 설파하고 농민들의 봉기를 촉구하는 장쾌한 연설을 하자, 모두 농민군이 돼버린 수천의 관중들은 환호의 도가니를 이루며 고부관아 진격을 서둘렀다. 점심 무렵 일단의 별동대에 의해 고부국교에 설치된 관아가 점령됐고, 나머지 대다수 관중은 이평국교로 이동해 만석보 혁파를 위한 농민군 훈련을 했다. 그리고 밥을 하늘로 모시는 식사의례에 따라 정성껏 준비된 음식을 즐겁게 나누었다. 군중들이 이평국교 운동장을 꽉 메운 가운데, 상황 상황 사이에 유랑연예패의 습격담과 정석진 관군 일행 체포 등을 다룬 재현굿도 펼쳐졌다. 2시 40분 새로 편성된 관중농민군(관중들이 농민군 역을 맡았음)은 뼈에 사무친 만석보를 향해 거대한 파도를 이루며 행군을 시작했다. 이평국교에서 예동마을까지 3Km에 달한 포장도로에는 전날 정주시내 시가행진 대열에 새로운 관중 농민군이 합세해 1Km에 달하는 긴 대오를 이루며 하늘을 찌르는 기세로 고부들판을 가로질렀다. 3시 10분 예동마을 언덕에 도착한 행렬은 만석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진을 풀고, 각 지역 농민군이 합류하며 소식을 듣는다는 내용의 거리굿 <천석꾼아 만석꾼아, 보릿고개 주먹밥 썩 내놓아라>를 연출했다. 언덕에 울려퍼진 함성과 열기는 지축을 흔들었고, 끝없이 펼쳐진 배들평야를 굽어보는 전봉준 등 세 사람의 영정도 황토빛을 발하면서 ‘일백 년 만에 내 여기 다시 왔노라’며 살아 움직였다. 마지막 순서인 만석보혁과 재현굿은 이틀에 걸쳐 모아진 열기를 한 정점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그 제목처럼 참석자들은 ‘모다 봉준이’가 됐다. 동진강 강바람이 벌판을 세차게 때리는 가운데 짚더미로 꾸민 만석보에 불화살을 날려 일거에 혁파하면서, 벌겋게 대지를 달구는 불길과 함께 ‘백만 봉준이’ 무리는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농민군과 관군의 접전이 다시 한번 재현되고, 차전놀이로 농민군이 승리하면서, 이어 들불과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불글씨 등으로 불바다가 된 배들평야에서 참석자들은 마지막 신명을 돋우며 대동세상을 맛보았다. 6시반 무렵 모든 행사는 끝나고 최후로 만석보 강둑의 ‘보국안민’ 불글씨가 어둠을 사르며 귀가하는 사람들을 배웅했다. (……) - ‘현장: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을 찾아서 “오늘은 백만 농군이 모다 봉준이로다”’, 김선출, <계간 민족예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1994.봄
출연/스태프
스태프 총연출/채희완
예술단체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전국의 마당극 단체들은 1987년 이후 사회적으로 민주화의 열기가 고조되고 다양한 연대의 틀들이 결성되자 확장된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88년 1월 박인배(전 극단 현장 대표), 유인택(현 기획시대 대표)을 중심으로 전국의 20여 개 공연단 대표들이 모여 그 동안 축적해 온 성과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사업으로 ‘민족극한마당’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제1회 민족극한마당은 서울 종로3가 미리내 예술극장에서 1988년 3월과 4월 두 달에 걸쳐 열렸는데 당시 많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마당극 단체들은 이 성과를 계기로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현 한국민족극운동협회)를 결성하였다. 1990년대 들어 새로운 시기를 맞은 마당극은 각 단체별 특성이 양식화되고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마을 공통체의 제의성과 축제성을 되살리는 데 앞장서는 등 마당극 정신을 새로이 구현하게 되었다. 민족극운동협의회는 1994년 연합작품으로 동학100주년 기념굿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을 주도하여 역사 속의 민중사를 마당극 양식으로 표현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도 한국민족극운동협의회는 경북 성주군 성주성밖숲에서 매년 민족극한마당을 펼치고 있는데, 2006년 현재 19회를 맞이하였다. 민족극한마당은 해외의 연극인들에 의하여 Korea progressive theatre festival HANMADANG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민족극한마당 이외에도 민족극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민족극과 예술운동>을 간행하고 있다.
비평
(……) 1994년은 유난히도 대형 총체공연물들이 여러 편 무대에 올랐었다. 물론 대부분의 작품들이 한해 내내 진행되었던 대대적인 백주년 기념사업의 흐름 속에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그 해의 공연들은 역사적 무게 때문에 규모가 한껏 부풀려진 그런 작업들과는 달리 새로운 장르와 형식을 시도하는 실험성을 띤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신창극을 표방한 <천명>은 대본에 따라 기존의 대목을 따오는 방식이 아니라 전곡을 새롭게 창작함으로써 창극의 음악적 통일성을 시도했고,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은 관중이 직접 백년 전의 사건을 재현하면서 사건을 향유하는 새로운 체험이었다. ‘동학혁명’의 압도하는 역사적 무게와 장르와 기술을 망라하는 공연예술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대형 총체공연물에 대한 창작자들의 충만한 욕구가, ‘백주년’이라는 때를 맞아 맞닥뜨린 열기였다. 그러나 충만한 욕구가 충만한 무대로 이어지기에는 당시 총체 공연물에 대한 예술계의 축적은 일천했다. (……) - ‘<금강>, 역사와 드라마가 만나는 두 경우 - 역사 소재의 총체공연물의 한계 극복하지 못해’, 김소연, <컬쳐뉴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2004.10.18 (……) 굿은 망자의 한을 풀고 저승으로 천도하여 완전한 죽음, 저승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재생 의식이다. 그래서 ‘해원상생굿’이며 ‘역사맞이굿’이다. 과거의 싸움을 오늘의 시점에서 재현하여, 의로운 죽음을 정당화하고, 억울하게 죽은 이의 맺힌 것을 풀어내는 ‘해원상생굿’ 또는 ‘역사맞이굿’을 전통의 방식대로 하지 않고 다양한 민족의 연희양식에 민중의 삶의 내용을 역사화한 항쟁의 내용을 담은 싸움굿을 70년대 이후부터 마당극 또는 마당굿이라 불러왔다. 오늘날 마을 현장에서는 그 지역에서 과거에 있었던 싸움들이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정립되고, 싸움에 참여한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여러 가지 싸움굿들이 재현되고 있다. <고부봉기 역사맞이굿>, <제천의병제>와 같은 동학 100주년 기념 행사나 의병항쟁 기념 의병굿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추모제들도 굿을 통하여 항쟁의 의로운 죽음을 역사화 하는 해원굿, 싸움굿, 역사맞이굿이었다. (……) - ‘의병항쟁과 해원굿’, 문무병, <민족문화와 의병사상>, 안동대안동문화연구소, 박이정, 1997
관련도서
<계간 민족예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1994.봄 <민족문화와 의병사상>, 안동대안동문화연구소, 박이정, 1997
연계정보
-칼노래 칼춤
-갑오세 가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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