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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토월회

단체명
토월회
장르
극단
개요

동경유학생들이 주도한 소인극 단체(연극을 직업으로 하지 않는 일반인의 공연 활동) 중 하나. 토월회는 처음에는 문학 동호회로 출발했다가 대중의 의식 계몽을 위해 고국에 귀국 공연을 선보였다. 본격 신극(사실주의 연극)을 표방한 토월회의 활약은 당시 연극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토월회는 당대 함께 소인극 운동을 벌였던 단체인 갈돕회, 형설회 등과는 달리 직업극단으로 변신, 활약한다. 토월회의 귀국 공연은 신극 운동의 저변을 마련했다.

해설

현실에 토착해 있되(土) 이상은 하늘(月)과 같이 높게 가져야 한다는 뜻의 ‘토월회’의 처음 모습은 문학 청년들의 독서 낭독을 위한 모임이었다. 1922년 5월경 창립 멤버는 박승희, 김기진, 김복진, 박승목, 이서구, 김을한, 이제창 등 7명이었다. 동경유학생들이 일본 땅에서 시작한 명작의 번역, 읽기, 비평의 자리가 토월회의 전신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여름방학을 맞아 고국에 동포를 위한 문화운동을 벌이기로 중지를 모으는데, 원래부터 연극에 관심을 보였던 박승희가 대중을 깨우치는 데는 연극이 가장 적절하다고 동료들을 설득한다. 토월회는 이웃 사람에게 돈을 꾸고, 동경미술학교 학생들의 협력을 받아 김복진이 무대미술을 완성하고, 여배우 세 명(이월화, 이정수, 이혜경)을 어렵게 구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국내에서 제1회 공연(조선극장, 7월 4일~8일)을 갖는다. 토월회의 제1회 공연연극은 매우 우량한 성적으로 금팔일밤까지 흥행을 마칠터인데, 무대장치와 등장인물의 조화가 매우 교묘하여 식자의 칭찬이 맛핫다. - <동아일보>, 1923년 7월 8일 사실적 무대장치와 연기의 칭찬 등을 미뤄보아 학생들의 활동에 대해 당시 분위기는 퍽 호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회 공연의 레퍼토리를 보면 유진 필롯 작 <기갈>(전원 출연), 안톤 체홉 작 <곰>(연학년 주연), 버어나드 쇼 작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나>(박승희 주연), 그리고 박승희 작 <길식>(김기진 주연) 등이다. 하지만 토월회 공연의 실상은 아마추어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공연 중 박승희와 이월화가 대사를 잊어버리는 바람에 중도에 막을 내리고 관객에게 사과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1회 공연에서 참패한 토월회는 원래 계획과는 달리 창립공연에서 진 빚을 갚기도 해야 했고 명예 회복을 위해 2회 공연을 갖게 된다. 박승희는 자금준비로부터 번역, 각색, 연출, 연기까지 도맡아 했고, 김복진, 연학년, 김기진 등 창립회원들도 공연준비에 온 몸을 바쳤다. 무대장치는 김복진과 이승만이 원우전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는데, 이승만은 <알트 하이델베르트>의 궁전벽화를 1주일이나 걸려 그렸다. 토월회의 제2회 공연은 9월 18일부터 1주일간 조선극장에서 올렸다. 레퍼토리는 톨스토이 작 <부활>(4막), 마이아 펠스타 작 <알트 하이델베르크>(5막), 스트린드베리 작 <채귀>, 그리고 제1회 때 평이 좋았던 버어나드 쇼의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나>를 여주인공 이름에 따라 <오로라>라 하여 상연했다. <부활>에서는 카추샤 역의 이월화, 네프류도프 공작 역에 안석영이 열연해 갈채를 받았고, 첫막의 사랑장면에서는 조택원이 주제가 <카츄샤 애처롭다, 이별하기 서러워>를 불러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토월회의 제2회 공연은 제1회 공연보다는 성공적이었다. 토월회는 젊은이의 순결한 열로 수확을 얻게 됐으며 따라서 진부한 조선극단의 레벨을 어느 정도까지 본격적의 그것으로 이끌어 노았다. - <매일신보>, 1931년 5월 22일 하지만 본격 신극을 위한 토월회의 활동은 여기까지였다. 토월회는 2회 공연 이후 전문 직업 극단으로 변신하게 된다. 박승희 외 창립 멤버들이 거의 탈퇴한 상태에서 극단의 시스템도 동인제에서 프로듀서 시스템으로 바뀌어 박승희가 회장, 시인 홍노작이 문예부 경리, 미술부 경리는 원우전, 경리부 경리는 정원택, 출연부 경리는 이백수가 맡아 새롭게 출범한다. 토월회는 새로 변신한 이후 첫 공연이자 제3회 공연으로 박승희의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 홍노작 역의 <회색의 꿈>을 YMCA 강당에서 올린다. 공연의 막간에는 명곡의 연주를 들려줬는데, 이것이 훗날의 막간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3회 공연부터 토월회는 상업극단의 길을 걷게 된다. 4회 공연으로 올린 <부활>과 <사랑과 죽음>은 일본에서 신파극으로 유행했던 작품이었고, 5회 공연의 톨스토이 작 <산송장>의 각색은 이 공연에서 불려진 주제가 <갈까부다 말까부다 오로라 밑으로>란 노래를 <카츄사>의 노래와 함께 널리 유행시켰다. 그리고 <지장교의 유래>와 <이내 말씀 드러보시요>라는 일본작품들의 번안극을 올린다. 1925년 이후부터 토월회는 본격적 흥행극단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서구를 전무로 앉히고, 광무대를 1년간 계약해 레퍼토리도 가무극 위주로 하기로 결정해 활동을 벌인다. 박승희가 쓴 <산셔낭당>, <이내 말슴 드러보시요>, <사랑과 죽음>, <명예와 시인> 등의 레퍼토리를 판소리, 가야금, 조선권번의 권번춤 등과 함께 3일씩 바꾸어 가며 광무대에서 연중무휴로 공연한다. 초기에 내세운 본격적 신극을 올리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 몇 사람의 독주로 이뤄지는 극단 경영, 일본의 간섭에 따른 경제난 때문에 내분이 일어나기도

하나 인기작 <춘향전>이 나옴으로써 어려움을 극적으로 타개해나간다. <춘향전>은 명창 김창룡의 창을 곁들여 복혜숙(춘향 역), 양백명(방자 역) 등이 출연해 20여 일 동안 장기공연을 하고 토월회로는 처음으로 지방 순회 공연에 나서게 된다. 대형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이 토월회에 들어온 것도 이때쯤이다. 윤심덕을 맞은 토월회는 그녀를 주연으로 삼아 미국의 영화를 이경손이 각색한 <동쪽길>, <노토 나온 모자>, <밤손님>, <카르멘>, <곰> 등을 무대에 올린다. 그러나 경영난을 타개하지 못하고, 내분이 일어나 토월회는 1926년 2월 24일에 광무대와의 일년 계약을 채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첫 번째 해산을 하게 된다. 토월회가 재기 공연을 가진 것은 2년 뒤였다. 명문가의 자제에 일본 유학까지 한 박승희는 4년간의 악전고투로 전재산을 날린 뒤에도 연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토월회의 제57회가 되는 재기공연 레퍼토리는 박승희의 <이 대감 망할 대감>, <사의 승리>, <혈육>, 홍노작 번안의 <오남매>, <추풍감별곡> 등이었다. 대표 박승희는 1년 뒤 다시 박진을 끌어들여 다시 진용을 만든다. 연출부에 박승희, 문예부에 박승희·박진·이운방, 무대장치부 및 조명에 원우전, 무용부에 조택원, 출연부에 이백수·이소연·서일성·박제행·윤정섭·석금성·강석연(객원)·강석제·권익남·김영순·김도영·김소영·김마리아·김광자 외 연구생 8명이었다. 그리고 토월회의 최대 히트작 박승희 작·연출의 <아리랑 고개>(1929)를 올린다. 식민지 시대에 있어 일제의 한국농민 수탈과 착취를 그린 <아리랑 고개>는 대중의 큰 호응을 받는다. <아리랑 고개> 이후 민요 아리랑은 일제에게 금지곡이 되며, 토월회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진다. 토월회는 조선극장과 다시 1년 계약을 맺고, 주역진도 전옥, 강홍식으로 바꾸어 활발한 활동을 재개하지만, 레퍼토리의 부족 등의 고질적 문제에 다시 봉착 또다시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토월회는 막간극을 올리고 연극도 악극식으로 바꿔 올리는 등 안간힘을 썼으나 버티지 못하고 다른 신파극단들처럼 지방으로 순회를 돌다 결국 1931년 완전히 해산하게 된다. 토월회의 활동은 본격 신극 운동이었다기보다는 근대극 운동의 준비 단계인 낭만주의적 연극 운동이었다.

아리랑 고개

<아리랑 고개>는 농토를 잃고 고리채에 허덕이는 농민들이 고향을 떠난다는 내용의 작품으로,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잘 반영해 큰 호응을 받았다. 망국의 아픔에 젖어있던 당대 민중에게 슬픔 속에서 울분을 토하게끔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 <아리랑 고개>에서는 아리랑 정서를 만히 발견할 수 있으니 흉년이 들어 문전옥토를 그대로 남에게 빼앗기고 동리의 미움을 바다서 사랑하는 향토에서 생활을 부지하지 못하고 유랑의 길을 떠나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조선을 잘 상징한 것이다. 이 각본이 첫공연에 대성공을 한 것은 조선현실의 파악에 가장 용력한 까닭이다. 조선민중의 가슴속에 깁히 깁히 들어있는 아리랑적 조선적 한성이 무조건하고 그 암시를 바다들인 까닭이다. 무대의 아리랑 고개에서의 표현이 울리는 것이 아니고 일반관객의 가슴 속에 들어잇는 아리랑이 스스로 우는 것이엇다. (……) 이 <아리랑 고개>는 보아갈수록 새로운 눈물을 자아낼 것이다. (……) - <동아일보>, 1929년 10월 27일 (……) 무대에서 공연하는 사람들도 정말 울음으로 변했다. 그 까닭으로 모든 약속이 허물어진다. 나는 연출자의 신분으로 냉정해라 소리를 여러번 질렀다. (……) 그러나 결국은 나도 울고 말았다. 나뿐이 아니었다. 노래는 여운을 남기고 계속하면서 이건 도무지 무대도 무대 뒤도 객석도 극장사무실도 울음투성이다. 나는 기다릴 수가 없어서 막을 내리라 소리쳤는데, 웬걸 막줄을 잡은 놈마저 엉엉 소리치며 울고 있지 않은가. 누구 한 사람 무대고 객석이고 움직이지 않고 그냥 울기만 했다. (……) - 박진

리뷰

(……) 무대장치나 배경화에 전력을 기우리고 실지 출연을 중요시하지 안어서 연습이 부족하고 서투른 점이 만엇슬 뿐 아니라, 심지아 무대에 올나 배우가 대사를 니저버리고 쩔쩔맨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였었다. (……) 배경화나 무대장치로 관중의 눈을 끌지 말고 실지출연에 전력을 기우려 관중의 마음을 끌어야 할 것이다. 또는 무엇보다는 극본선택과 번안에 좀더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하겠다. (……) - <동아일보>, 1923년 10월 14일

관련도서

<우리연극 100년>, 서연호·이상우, 현암사, 2000 <한국근대연극사>, 유민영,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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